KT에 여성 임원이 가장 많은 까닭은

최근 발간된 인사·경영 전문지 ‘HR 인사이트(Insight)’ 6월호에 따르면 매출액 순위 국내 100대 상장 기업 가운데 21곳에서 총 51명의 여성 임원을 두고 있다. 이 가운데 최다 여성 임원을 보유한 기업은 KT로, 모두 12명이 근무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그 다음으로는 삼성전자 7명, LG전자 5명, 대한항공 4명 순이었다. 일반적으로 통신 회사는 여성들이 발붙이기가 힘든 곳으로 여겨져 남성들의 영역으로 인식돼 왔다. 하지만 KT의 우먼 파워에 의해 ‘금녀의 벽’이 무너지고 있다.

마케팅 책임지는 3곳 본부장 모두 여성
‘금녀의 벽’ 와르르…고객 마음 잘 읽어
무엇보다 주목되는 점은 KT의 여성 임원들이 핵심 보직을 맡고 있어 단순히 구색 맞추기식의 인사로 임원이 된 게 아니라는 것이다.

예컨대 KT의 마케팅을 책임지고 있는 부서인 기업고객전략본부·개인고객전략본부·홈고객전략본부 등 3곳의 본부장이 모두 여성 임원으로 채워져 있다는 것이 이를 말해준다.

기업고객전략본부장은 기술고시 출신으로 베이징사무소장·미디어본부장·미래기술연구소장 등 요직을 거친 이영희 전무다. 개인고객전략본부장은 신한은행 마케팅 전략본부장을 거쳐 지난해 KT에 합류한 양현미 전무가 맡고 있다.

유선통신을 책임지고 있는 홈고객전략본부장은 송영희 전무로 LG생활건강에서 마케팅담당 임원으로 일하다가 영입됐다. 이로써 KT의 3개 사업부문 마케팅은 ‘여성 임원 트로이카’가 책임지고 있는 것이다. 이뿐만 아니다. KT의 연간 예산 30조 원을 주무르는 자금당당 임원도 여성이다. 올 초 인사에서 가치경영실 자금담당 임원으로 선임된 조화준 상무가 주인공이다.

KT에 여성 임원이 많은 이유는 뭘까. 2008년 최고경영자(CEO)로 취임한 이석채 회장의 경영 철학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이 회장은 “임원 승진 대상에 오른 여성은 무조건 발탁하겠다”고 공공연히 밝힐 정도로 여성 인력 육성에 강한 의지를 보이고 있다.

KT의 여성 임원 12명 중 8명이 이 회장이 CEO로 취임한 후 선임된 것만 봐도 이를 알 수 있다. 외부 인재 영입에도 적극적이다. 양 전무와 송 전무, 홈IMC본부 IMC기획담당 박혜정 상무 등이 이 회장이 직접 스카우트한 임원들이다.

이 회장은 지난해 11월 여성가족부와 ‘여성 친화 기업 문화 확산 협약’을 체결하면서 여성 인재 육성을 공개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팀장급 이상 관리자 중심의 여성 리더십 양성 프로그램을 일반 여사원까지 확대하고 여성 인력이 자신의 특성과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분야에 지원할 수 있도록 직무 배치 제도(Talent Market)를 공모 방식으로 활성화하겠다고 선언했다.

게다가 출산과 육아 관련 규정은 ‘파격적’이라는 표현이 어색하지 않을 정도다. 산전 또는 산후 휴가제는 근로기준법의 60일을 넘어 최대 90일까지 줄 수 있다는 것이 대표적이다. 이 가운데 70일은 유급휴가가 가능하다.

생후 3년 미만의 영유아를 가진 직원은 양육을 위해 1년 이내 범위에서 휴직할 수 있다. 육아 휴직 기간 중 이수 가능한 e러닝 과정을 마케팅, 네트워크, 경영 지원, 리더십 개발 등 230개 강좌로 늘린 것도 눈에 띈다.

이 회장이 이처럼 여성 인력 육성에 팔을 걷어붙이고 있는 이유는 뭘까. 통신과 정보기술(IT) 사업은 대다수 고객이 여성이기 때문에 이들의 심리를 가장 잘 아는 이도 여성이라는 것이 이 회장의 평소 지론이다. 이 회장은 “KT의 가장 중요한 고객인 여성의 심리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인 여성을 핵심 부서의 임원으로 선발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입버릇처럼 말해 왔고, 실행에 옮기고 있는 것이다.
‘금녀의 벽’ 와르르…고객 마음 잘 읽어
외부 유능 인재 영입 적극적

‘왜 그녀는 저런 물건을 돈 주고 살까?(Why She Buys)’의 저자인 브리짓 브레넌(여성 마케팅 컨설턴트)은 “세계 소비의 80%는 여성들이 좌우한다”고 주장했다. 그녀는 의류(65%), 자동차(52%), 가전제품(45%), 건강관리 제품(80%), 여행(70%), 보험·투자·은퇴상품(90%), 주택(91%), 와인(55%) 등 여성들이 구매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통계를 제시했다.

경영 컨설팅 업체인 맥킨지는 전 세계 101개 샘플 기업의 5만8240명을 대상으로 ‘근무 환경 및 가치’에 대해 조사한 결과 3명 이상의 여성 임원을 보유한 기업은 55%가 효과적이라고 답했고, 여성 임원이 없는 기업에서는 48%가 효과적이라고 답해 7%포인트 차이를 보였다고 발표한 바 있다. 인구의 약 50%를 차지하는 여성을 활용하지 않고는 기업이 발전할 수 없다는 전문가들의 주장도 적지 않다.

그렇지만 지나친 여성 우대 정책은 조직의 불협화음을 일으킬 수도 있지 않을까. 인사 컨설팅 업체인 타워스 와슨의 박광서 사장은 “임의적으로 여성 임원을 늘리는 것은 반대”라며 “경쟁력이 떨어지는 사람을 임원으로 앉히면 기업 발전에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금녀의 벽’ 와르르…고객 마음 잘 읽어
이에 대해 이공환 KT 인사담당 상무는 “통신과 IT 분야의 특성상 여성 인력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여성 특유의 유연함과 섬세함을 무기로 조직 내 새바람을 불어넣을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반박했다. 이 상무는 “남성들의 역차별 논란은 있을 수 없다”며 “동일한 조건에서 경쟁을 시키고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올라왔을 뿐”이라고 강조했다.

KT의 총 직원은 3만2000여 명, 여직원은 5000여 명이다. 이 중 임원은 360여 명, 여성 임원은 12명이다. KT는 내부 육성은 물론 외부 영입을 통해 지속적으로 여성 임원을 늘리겠다는 복안이다.

이공환 상무는 “최근 ‘일하는 방식’ 혁신을 추진하면서 성별의 구분은 물론 호칭의 구분 없이 관리자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했다”며 “능력 있는 여성 임원의 비율은 더욱 높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KT의 ‘인사 혁명’이 어디까지 이어질지 지켜볼 일이다.

---------------------------------------------------------------------------------------
인터뷰이영희 기업고객전략본부장

“후배들이여, 자연스럽게 일하라!”
‘금녀의 벽’ 와르르…고객 마음 잘 읽어
이영희 기업고객전략본부장은 3명의 전무급 여성 임원 중 유일하게 KT에서 잔뼈가 굵은 ‘KT 우먼’이다. 1981년 입사한 이 전무는 2002년 상무보로 승진해 KT 최초의 여성 임원이 됐다.

그녀가 대학 졸업 후 당시 공기업인 KT에 입사한 것은 남녀 차별이 덜하고 안정적인 직장 생활을 할 수 있는 곳을 원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직장 생활은 만만치 않았다. 그녀는 “입사해 14년 동안 승진하지 못했다”고 털어놓았다.

하지만 남성 동료들로부터 “여성이기 때문에 안된다”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다고 한다. 임원 승진 후에는 KT에서 여직원들의 ‘대모’ 역할을 자청했다. 여성 간부들을 모아 모임을 만들고 경영진을 초청해 경영 방침을 듣는 등 회사 내에서 여직원들의 위상을 한 차원 끌어올리는 데 최선을 다했다는 평을 후배들로부터 듣고 있다. 지금도 부장급 이상 100여 명의 여직원들이 분기에 한 번 모임을 갖고 있다고 귀띔했다.

그녀는 “후배들에게 좀더 자연스럽게 생활하라”고 조언한다. 일부러 강한 척, 똑똑한 척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남성 동료를 대하라는 것이다. “예전에는 괜히 자격지심으로 억척스럽게 일했던 기억이 나요. 하지만 이제 남성들도 여성 동료들을 많이 이해해 주는 분위기가 조성됐다고 생각해요. 마음 편하게 직장 생활을 하는 것이 서로에게 부담이 없어요.”

KT에서 핵심 보직으로 통하는 기업고객전략본부장을 맡은 뒤에는 부담감이 적지 않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이 전무의 요즘 일과는 살인적이다. 주말이 거의 없다고 한다. 그녀의 표현대로 “올인”하고 있다.

그러나 “즐겁고 보람 있다”고 당당히 말한다. “CEO가 여성 인재를 발탁하겠다고 공언했기 때문에 KT의 여직원들은 행복합니다. 열심히 일만 하면 기회는 언제든지 찾아오기 때문이죠.”

권오준 기자 j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