숍마스터 이미선

대한민국 상위 1%에 속하는 부유층에 접근하기는 사실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명품 브랜드 숍마스터들에게 ‘그들’은 VVIP 고객이기도 하지만 때론 대화 상대, 때론 가족이 되기도 한다. 강남 명품 브랜드 숍마스터 1세대인 이미선 씨는 최상류층 고객 관리 노하우의 첫 번째를 ‘경청(傾聽)’으로 꼽았다.

“고객과 가까워질수록 개인적인 부탁을 하는 분들이 많아요. 운전사에게 돈을 보내며 돌잔치 선물 구입 등을 부탁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걸 사적인 심부름으로 생각하면 언짢겠지만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제 안목을 그만큼 믿기 때문에 사소한 것까지 부탁하는 게 아닐까요. 한 번은 VIP 고객이 시부모님 상을 당하셨다고 도와 달라고 하기에 8시간 동안 상가 손님상에 낼 전을 부치고 바로 감기 몸살이 나서 앓아누운 적도 있어요. 집을 찾아갔더니 제가 도울 일이 전 부치는 일밖에 없겠더라고요.(웃음)”

숍마스터 이미선 씨는 한눈에 봐도 커리어우먼의 기운이 넘치는 스타일은 아니다. 단아한 외모에 사근사근한 말투가 편안한 이웃집 언니 같은 인상이다. 하지만 녹록하지 않다는 명품 브랜드에서 15년의 커리어를 쌓은 ‘잘나가는’ 숍마스터로, 명품 브랜드 숍마스터 ‘1세대’ 가운데 한 명이다.

명품 ‘숍마’의 VVIP는 상위 0.1% ‘사모님’
“VVIP 고객 관리 노하우 으뜸은 경청”
그녀가 몸담은 브랜드를 살펴보면 공통점을 하나 발견하게 되는데, 바로 ‘보석’라는 사실이다. 전문 지식 없이는 세일즈하기 힘든 제품군이다.

“대학에서는 가정교육학을 전공했어요. 시집을 잘 가야겠다 싶어 중등교사 자격증도 땄었죠.(웃음) 그런데 사립중학교 교사로 들어가려니 (학교 측에서) 800만 원을 기부금으로 내라고 하더라고요.

집에서는 그렇게 해서라도 교사가 돼야 한다고 했지만, 사실 얼마나 아까운 돈이에요. 그 돈으로 일본에 가서 보석 디자인 공부를 하자 싶었죠. 부모님을 가까스로 설득해 800만 원을 들고 오사카로 건너갔어요.”

어학부터 시작해 오사카 조와 보석감정원을 거쳐 결국 오사카예술대학 부속 미술전문대학에서 주얼리 디자인을 공부했다.

어눌한 일본말 실력을 업그레이드하기 위해 친척의 ‘백’을 동원해 세일즈 아르바이트 자리를 얻었다. 당시 일하던 숍에서 판매하던 제품은 ‘샤넬’ 등 명품 주얼리 브랜드였다. 보석 판매와의 ‘인연’이 어쩌면 그때부터 시작됐는지도 모를 일이다.

1995년, 유학 생활을 접고 귀국했을 땐 이미 신입 사원으로 입사하기엔 부담스러운 나이가 돼 있었다. 하지만 면접 대상에서조차 제외되는 스물아홉의 ‘핸디캡’을 보기 좋게 무너뜨리고 워커힐면세점에 입사할 수 있었다. 바로 일본에서의 보석감정원 수료 경력 덕분이었다.

입사 후 자신도 몰랐던 고객 관리 노하우가 제대로 발휘되면서 얼마 되지 않아 ‘에르메스’, ‘까르띠에’, ‘던힐’ 등 브랜드를 한꺼번에 관리하는 ‘코너장’으로 승진했고, 6년 차 되던 해 같은 면세점 내 ‘피아제’ 점장으로 옮겼다. 최근까지 숍마스터로 활동했던 브랜드는 프랑스 LVHM의 명품 주얼리 브랜드 ‘프레드’다.

지난 15년간 축적된 고객 데이터베이스 중에 그녀가 ‘진정한 VVIP’로 분류하는 고객은 10여 명. 연매출 1억 원 이상을 올려주는 상류층 ‘사모님’들이 대부분이다.

“제가 일했던 명품 주얼리의 VVIP라면 상위 1%가 아니라 0.1%에 속하는 분들이라고 볼 수 있어요. 다른 분들은 몰라도 제가 생각하는 VVIP 열 분은 매출 기여도도 기여도지만 품성적인 면에서도 진정한 VVIP라고 할 수 있죠.”

이미선 점장은 “VVIP는 딱 2가지 부류로 나눌 수 있다”고 귀띔한다. 첫 번째는 손톱이 닳도록 가사와 가족을 위해 사는 사모님들이고, 또 한 부류는 살림과는 담 쌓고 사는 커리어우먼이라고.

그러다 보니 대화의 주제가 요리부터 그림, 부동산, 아이들 얘기 등등 무궁무진하다. 고객이 매장에 한 번 나오면 2~3시간 대화는 기본. 숍마스터의 역할 가운데 딴 데 가서 오픈하고 털어놓을 수 없는 얘기들을 열심히 듣고 말동무가 돼 주는 것도 포함된다고 한다.

누구를 만나도 편안함을 줄 것 같은 그녀의 대화 기술에 ‘천직’을 찾은 행운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즈음, 슬쩍 딴죽을 걸어 봤다. 숍마스터도 결국엔 ‘월급쟁이’인 터. 사표를 던지고 싶었던 순간도 있었을 것 아닌가.

“(웃음)왜 없었겠어요. 1년에 두어 번 정도 한국에 들어오는 교포분이 한 분 있는데 2억 원이 넘는 제품을 구입한 뒤 VIP가 되셨죠. 한 번은 우리 브랜드가 아닌 다른 브랜드 제품들을 가지고 와서 애프터서비스를 맡기셨어요. 고객 서비스 차원에서 해 드렸는데 여러 가지 수공이 들어가다 보니 수십만 원의 비용이 발생했어요.

회사에서 무료로 해 주기가 곤란하다고 해서 고객에게 비용을 부담하라고 했다가 정말 봉변을 당했어요. 정말 못 들을 말까지 듣고 바닥에 앉아 한없이 울었죠. 그러고도 무슨 정신이 있었는지 그날 밤에 와인과 꽃다발을 들고 그 고객 집에 찾아갔죠.

무료 서비스를 해 드리지 못해 죄송하다고 했더니 예상외로 아주 반기시더라고요. 그게 고마우셨는지 다음날 매장에 나오셔서 몇 천만 원대 제품을 사셨어요. 결국 잘했다 싶더라고요. 하하….”

그녀는 숍마스터가 갖춰야 할 요건으로 세 가지를 꼽는다. 첫 번째는 긍정적 마인드, 두 번째는 구매할 때보다 더욱 철저하고 완벽한 클레임 처리, 세 번째는 여유 있는 자세와 인내심이다.

“몇 억 원 하는 보석을 한 번 보고 바로 구매하는 사람은 없어요. VVIP라고 해도 길게는 1년 동안 심사숙고하는 분들도 있죠. 그러니 숍마스터에게 인내와 여유는 필수 조건이에요.

저 같은 경우엔 고객이 잊을 만하면 전화를 하되 제품과 관련된 얘기는 전혀 하지 않지 않아요. 살림 이야기, 애들 이야기 등 실컷 수다를 떤 뒤에 끊기 전에 한마디 하죠. ‘언제 나오시겠어요?’라고요.(웃음)”

그녀는 “고객은 점장을 따라 다니게 돼 있다”고 귀띔했다.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만큼 새로운 사람과 관계를 형성하는 데는 시간도 걸릴 뿐만 아니라 번거롭다는 얘기다. 그녀가 확보하고 있는 VVIP 고객 역시 지난 15년 동안 그녀가 투자한 시간과 열정, 노력의 결과물들인 셈이다.

명품 주방기기 점장으로 자리 옮겨

‘보석의 통’으로 불리던 그녀가 최근 과감한 변신을 시도했다. 명품 주얼리가 아닌 이탈리아 주방 기기 브랜드인 ‘메프라(MEPRA)’ 청담갤러리 점장으로 옮긴 것.

‘메프라’는 110년의 역사를 지닌 이탈리아 명품 주방 브랜드로 그가 본격적으로 세일즈에 피치를 올릴 라인은 상위 0.1%를 위한 ‘메프라 헤리티지’ 라인이다. 디자이너의 시그니처를 새겨 넣은 ‘메프라 헤리티지’는 메프라에서도 최초로 론칭하는 라인으로 한국이 그 첫 ‘무대’라고 한다.

“처음에 연락을 받았을 땐 솔직히 긴가민가했어요. 그런데 제품을 실제로 보고 나서 ‘감’이랄까요, 확신이 들더라고요. 주방 용품 역시 여성들이 좋아하는 부엌의 ‘패션’이잖아요. 특히 ‘이탈리아 레드’라고 불리는 제품 컬러를 보고 저부터 한눈에 반했어요.”

6월 초 정식 오픈을 앞두고 그는 늘 그래왔듯 특기인 요리를 비롯해 주방 용품에 관한 스터디에 여념이 없다. ‘소문’을 듣고 그를 찾아올 고객들과 어떤 화두로 대화를 이끌며 ‘신세계’를 열어줄 것인지 벌써부터 궁금하다.

약력 : 관동대 가정교육학과 졸업. 오사카 조와 보석감정원 수료. 오사카예술대학 부속 미술전문대학 주얼리디자인과 졸업. 워커힐면세점 ‘에르메스’, ‘까르띠에’, ‘던힐’ 코너장. 워커힐면세점 ‘피아제’ 점장. 코오롱 ‘프레드’ 점장. ‘메프라’ 점장(현).

장헌주 기자 ch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