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후진타오’ 시진핑 부주석의 과거와 현재

China's Vice President Xi Jinping waves upon arrival at Haneda International Airport  in Tokyo, Japan, Monday, Dec. 14, 2009. (AP Photo/Shizuo Kambayashi)
China's Vice President Xi Jinping waves upon arrival at Haneda International Airport in Tokyo, Japan, Monday, Dec. 14, 2009. (AP Photo/Shizuo Kambayashi)
중국 공산당은 지난 10월 18일 폐막한 제17차 중앙위원회 제5차 전체회의(17기 5중전회)에서 시진핑(習近平) 국가부주석을 군사위원회 부주석으로 선출했다.

후진타오(胡錦濤) 중국 국가주석이 1인자가 되기 전 밟았던 코스다. 국가부주석과 공산당 간부를 가르치는 중앙 당교(黨校) 교장에 이어 군사위 부주석을 함께 거머쥔 점이 그렇다.

시 부주석은 2012년 10월 공산당 서열 1위인 총서기로 선출되고, 이어 2013년 국가주석직까지 승계할 것이 확실시된다. 시 부주석의 과거와 현재는 중국의 미래를 엿볼 수 있는 창(窓)이 될 것으로 보인다.

◇ 화합형 지도자 =‘조화사회’를 추구하는 현 지도부의 노선을 이어받을 화합형 인물로 꼽힌다. 그가 공산당의 황태자로 자리 잡은 건 불과 2년 전이다. 2007년 10월 17기 1중전회에서 함께 정치국 상무위원에 오른 경쟁자인 리커창(李克强)보다 먼저 인민대회당에 들어서면서부터다.

시진핑을 황태자로 올려 세운 건 태자당(太子黨:공산당 원로 자제)의 대부로 통하는 쩡칭훙(曾慶紅) 전 국가부주석으로 알려진다. 쩡 전 국가부주석은 “시진핑이 후진타오의 공청단(공산주의청년단) 직계 제자인 리커창을 뛰어넘을 수 있었던 우세는 각 방면에서 모두 받아들일 수 있다는 점”이라며 원로들을 설득했다고 한다.

마오쩌둥((毛澤東)과 덩샤오핑(鄧小平) 시대와 달리 집단 지도 체제로 바뀌는 현실에 적합한 통합형 지도자라는 점이 유효했다는 설명이다. 당내 민주가 확대될 것을 예고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를 모든 계파가 거부감 없이 수용하는 인물로 키운 건 아버지였다. 어렸을 때부터 ‘자기가 하고 싶지 않은 것은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지 마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다. “단결은 절대적으로 패배하지 않는 영원한 전제”라고 말하는 시 부주석이 좋아하는 인물이 인화 단결에 재주가 있던 유방·유수·유비·송강인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소탈하면서도 정이 있고 청렴하면서도 신중한 것이 시 부주석을 황태자로 만들었다는 분석도 있다. 푸젠성 닝더시 서기 시절 음력 정월 초하루 파리가 들끓는 화장장과 쓰레기 매립장을 돌며 노동자들과 손을 잡고 차를 마시는 친근함은 함께 간 기자들이 차나 사탕도 반기지 않는 모습과 대조되기도 했다.

상하이시 당서기로 발령받은 뒤 영국식 3층짜리 관사를 보고 원로들의 요양원으로 하면 적합하겠다며 거부한 것이나 항저우로 가는 직행 전용 열차를 마다하고 7인승 미니버스에 올라탄 건 아버지로부터 몸에 밴 검소함 때문이다.

누나가 입었던 옷과 붉은색 헝겊 꽃신을 신게 한 아버지는 소년 시진핑이 친구들이 놀린다는 이유로 신지 않으려고 하자 먹물로 물들여 신게 했다.

조자룡의 고향 정딩에서 부서기를 맡던 때 신체를 단련하고 군중과 가까지워질 수 있으며 휘발유를 절약할 수 있다는 점을 들어 늘 자전거를 타고 다닌 검소함도 여기서 비롯됐다.

작은 촌의 지도자 시절 알게 된 농민이 20년 후 골수염으로 다리를 자르게 되자 물심양면 도와주고 임지를 떠난 뒤에도 다시 찾아가 전기 문제를 해결하고 다리를 놓아주는 정을 보여줬다. 올해 새해가 시작될 때 시 부주석은 전국의 기층 당지부 서기 100만 명에게 개인 명의로 안부 문자를 보냈다.
FILE - In this March 13, 2009 file photo, Chinese President Hu Jintao, left, chats with Vice President Xi Jinping as they leave the Great Hall of the People after the closing ceremony of the National People's Congress in Beijing, China. Chinese Vice President Xi has been promoted to vice chairman of a key Communist Party military committee, state media reported Monday, Oct. 18, 2010, in the clearest sign yet he is on track to be the country's future leader. (AP Photo/Andy Wong, File)
FILE - In this March 13, 2009 file photo, Chinese President Hu Jintao, left, chats with Vice President Xi Jinping as they leave the Great Hall of the People after the closing ceremony of the National People's Congress in Beijing, China. Chinese Vice President Xi has been promoted to vice chairman of a key Communist Party military committee, state media reported Monday, Oct. 18, 2010, in the clearest sign yet he is on track to be the country's future leader. (AP Photo/Andy Wong, File)
◇ 공산당 입당 10번 퇴짜 맞은 반동의 자식 = 1953년 베이징에서 태어난 시 부주석은 아버지가 부총리에 오른 혁명 1세대다. 어머니 치신은 공산당과 팔로군 여전사 출신의 지식인이었다. 그 덕분에 그는 고급 간부 자제들만 다니는 베이징81학교에 입학하는 등 유복한 생활을 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실각으로 성장기의 대부분을 농촌에서 고된 노동으로 보냈다. 부친의 복권 후에도 중앙보다는 지방에서 주로 경력을 쌓았다. 다른 정치인과 차별화된 이런 모습이 그가 중국의 차세대 지도자로 떠오른 원동력이 됐다.

그의 삶을 바꾼 건 아홉 살 때 일어난 ‘소설 류즈단 사건’이다. 이 소설은 1920년대 공산혁명 전사였던 류즈단이 숙청당한 인물인 가오강을 비롯해 시중쉰 등과 함께 혁명운동을 하는 모습을 묘사했다. 책이 출판되자 당국은 “소설을 이용해 반당 활동을 했다”며 배후 인물로 시중쉰(習仲勳)을 지목했다. 그는 모든 직책에서 해임됐고 16년 동안 감시의 대상이 됐다.

시 부주석도 베이징에서 쫓겨나 허난성에서 초·중등학교를 다녔다. 문화혁명 때는 산시성 옌촨현의 산촌에서 6년간 고된 삶을 살았다. 너무 힘들어 3개월 만에 탈출을 시도하는 우여곡절 속에서도 그는 능력을 인정받아 공산당에 입당했다.

반동의 자식으로 찍혀 홍위병조차 될 수 없었던 그는 공산당 입당을 신청했지만 10번이나 퇴짜를 맞았다. 열여섯 살에 자원해 산시 북부의 황량한 황토 고원 동굴 속에서 살며 농촌 노동을 간 그는 이때를 인민을 위해 실제적인 일을 해야 한다는 신념을 키우게 된 인생의 전환점이었다고 회고한다.

시 부주석은 2003년 직접 쓴 회고문에서 “처음엔 외로웠지만 내 숙소는 현지의 마을회관처럼 변해갔다. 노인들과 젊은이들이 찾아오면 내가 알고 있는 동서고금의 여러 문제에 대해 상담해 드렸다”고 전했다.

1975년에는 칭화대 입학을 허가받아 베이징으로 돌아왔다. 그는 대학 졸업 후 겅뱌오(耿彪) 중앙군사위원회 비서장의 비서를 맡아 군인으로 중앙무대에 데뷔했다. 내빈 접대, 연설문 작성은 물론 군부대 시찰 등 각종 군사 업무를 처리했다.

이런 군 경력 덕분에 인민해방군으로부터도 무난한 지지를 받는 것으로 알려졌다. 전근을 갈 때마다 현지 주둔군을 위문하고, 해방군 장교와 사병의 마음속 스타라는 평가를 받는 펑리위안(彭麗媛)과 재혼한 것도 그에겐 든든한 ‘백’이 됐다.

시 부주석은 겅뱌오가 좌천되자 지방공무원 근무를 자원했다. 당시 중앙에서 농촌으로 지원자가 거의 없어 그의 결단은 주목을 받았다. 빈곤 지역인 허베이성 정딩현에서 그는 CCTV의 드라마 ‘홍루몽’의 촬영 장소인 룽궈푸를 개발, 관광 수입을 크게 늘렸다.

그 덕분에 조그마한 시골 마을은 매년 100만 명 이상이 찾는 관광 명소가 됐다. 이후 그는 푸젠성 푸저우시 서기, 푸젠성장, 저장성장, 상하이 서기 등을 거치며 승승장구했다. 푸저우시 서기 때 시위원회 앞마당에 ‘마상주볜(馬上就辨:즉시 처리한다)’이라는 현판을 걸어놓고 대만의 투자를 독려한 것은 유명하다.

◇ 할 말은 한다 = 정치 전문가 가오쯔카이는 “사회 안정과 공산당 통치를 매우 중시하지만 대중 앞에서도 감정을 잘 나타내지 않는 매우 신중한 사람”이라고 평했다. 아홉 살 때부터 아버지가 숙청돼 혹독한 고문을 당한 영향이 컸다.

리콴유(李光耀) 전 싱가포르 총리는 그에 대해 “남아프리카공화국 전 대통령인 넬슨 만델라처럼 고난을 거친 인물”이라며 “강한 감정 절제력을 갖고 있고 개인의 불행이 판단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때로는 직설적인 화법도 구사한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준비를 책임졌던 그는 중국이 인권 탄압국이라는 해외의 반발에 “남들이 좋아하든 싫어하든 우리는 상관하지 않는다. 세상이 넓으니 온갖 사람이 다 있다.

새장 속에 새들이 시끄럽게 지저귀면 제일 시끄러운 놈을 들어내면 된다”고 했다. 지난해 2월 멕시코에서 중국인들에게 연설하면서 “중국은 기아와 빈곤을 수출하지 않는다”며 ‘배부른 외국인들’은 중국 내정에 간섭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지난해 3월엔 젊은 간부들과 가진 좌담회에서 “형형색색의 사회 인사들이 투자 개념으로 젊은 간부를 유혹한다. 뇌물과 주색으로 뇌물 공세를 퍼부으면 도덕 방벽이 약한 젊은 간부는 넘어간다. 그 미끼에 걸려 불법 집단의 머슴이 되면 당과 인민이 준 권력을 그들에게 넘겨주게 된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그는 “언론을 대중과 접촉할 수 있는 기회로 활용하라”고 했지만 말의 성찬에 대해선 경계했다. 지난 5월 중앙당교 봄 학기 입학식에서 “문장과 말은 짧고 실질적이며, 새로운 이념·사고를 제시해야 한다. 거창하지만 공허하고, 거짓 수사로 가득 찬 말은 자신뿐만 아니라 당의 이미지까지 떨어뜨린다”고 역설했다.

오광진 한국경제 국제부 기자 kjo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