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상범 리치몬드제과 대표

국내의 제과·제빵 명장은 단 7명이다. 이 가운데 3명이 나폴레옹과자점 출신이다. 권상범 리치몬드제과 대표, 서정웅 대한제과협회장, 김영모 김영모과자점 대표 등이다. 그야말로 제과 업계에서는 ‘살아있는 전설’이다.

권 대표는 나폴레옹과자점의 초창기 멤버로 개업 2년 만인 1974년 공장장을 맡아 나폴레옹과자점의 부흥을 이끈 주역이다. 서 회장과 김 대표가 그에게서 기술을 배웠다. 사업도 크게 성공했다. 3개의 제과점과 리치몬드제과기술학원을 운영하고 있다.
[성공하는 사람들의 습관] “열정 쏟으면 꿈은 마침내 이뤄집니다”
그가 태어난 곳은 오지로 소문난 경북 봉화군이다. 정규 학력은 초등학교 졸업이 전부다. 올해 예순다섯 살인 그가 청년층을 보낸 시기는 1960~70년대다. 지독히도 가난한 시절이었다.

그런 그가 대한민국 명장으로 명예를 얻고, 사업가로도 크게 성공한 비결은 뭘까. 그의 성공 스토리를 들어보면 목표를 향한 강한 집념, 신(新)기술 중시, 도덕을 강조하는 경영 철학 등 3가지를 꼽을 수 있다.

먼저 그는 목표가 뚜렷한 사람이다. 젊은 시절에도 그랬다. 본격적으로 제과 기술을 배우겠다고 작심하면서 30년 목표를 세웠다. “배우는데 10년, 가르치는데 10년, 사업하는데 10년 등 30년 목표를 정했지요. 한 번도 잊어버린 적이 없어요.”

권 대표가 빵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61년 열여섯 살 때다. 경북 의성에서 다과점을 운영하는 외갓집 일을 도왔다. 1년 뒤에 이왕 시작한 일 “더 큰 곳에서 배워보자”는 생각에 대구의 한 제과점에 취직했다.

다시 1년 뒤 “더욱 욕심이 생겨” 서울로 올라왔다. 그의 나이 열여덟 살 때였다. 수중에는 달랑 2000원이 있었다. 보름 정도 일자리를 찾아 헤매다 종로 5가에 있던 성림제과에 취직했다. 따로 월급은 없었다. 숙소도 없어 연탄 오븐 위나 작업대 위에서 잠을 잤다. 그러다가 당시 꽤 큰 규모의 풍년제과로 자리를 옮겼다.

30년 목표 정해 ‘일로매진’
[성공하는 사람들의 습관] “열정 쏟으면 꿈은 마침내 이뤄집니다”
풍년제과에서 그는 제대로 된 제빵 기술을 배웠다. “케이크 만드는 법을 배우고, 반죽의 온도를 계산하는 법도 익혔지요.” 당대 최고의 제과 기술자인 김충복 선생도 그곳에서 만났다.

그는 김 선생의 추천으로 1972년 나폴레옹과자점의 공장장으로 옮기면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는다. 1975년 나폴레옹과자점 강인정 사장의 추천으로 일본 유학길에 오른 것. 도쿄제과학교 6개월 코스였다.

일본에서의 그는 1분 1초도 아껴 썼다. “새벽 4시에 일어나 학원에 갔어요. 수업을 마친 뒤에는 학원 인근 제과점을 둘러보고 집에 돌아왔죠. 새벽 1시 전에는 잠자리에 들지 않을 정도로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6개월 만에 귀국한 그는 차원이 다른 사람이었다. 일본에서 배워 만든 제품들이 모두 인기를 끌었다. 손님이 늘면서 5명에 불과했던 직원이 30여 명으로 늘어났다. 나폴레옹과자점의 전성기가 시작됐다. 가르치는데 10년을 보내겠다는 목표를 실행하던 시기였다.

그는 공장장일 때 직원 교육에 열을 올렸다. “더도 말고 3개월만 아침 일찍 일을 시작하고 저녁 11시까지 매장을 지키라고 했어요. 제품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기가 만든 제품이 어떻게 판매되는지 보는 것도 중요하기 때문이죠.”

나폴레옹과자점에서 공장장으로 일한 지 7년 만인 1979년 초 그는 독립을 결심했다. 마포구 아현동 마포경찰서 옆에 점포를 얻었다. 처음에는 장사가 잘되지 않았다. 품질을 최우선하다 보니 주변 제과점보다 30% 정도 비쌌다. 하지만 고집을 꺾지 않았다. 팔리지 않은 빵은 다음날에 다시 팔지 않았다. 남은 빵은 몽땅 경찰서에 가져다줬다.

이듬해인 1980년 봄부터 차츰 손님이 늘기 시작했다. 소문이 나면서 멀리서도 찾아왔다. 1983년 서교동에 2호점을 냈다. 1993년 서울 대치동에서 리치몬드제과기술학원을 설립했다. 이 또한 사연이 있다.

“젊은 시절 풍년제과에서 근무할 때 기술 배우기가 너무 어려웠습니다. 당시 공장장이 직원들에게 제품의 배합표를 알려주지 않았을 정도예요. 그때 결심했습니다. 훗날 여건이 허락된다면 내가 아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도록 하겠다고요.”

1995년 마포구 성산동에 땅을 사 5층짜리 건물을 짓고 본점을 개업하고 학원도 옮겨 왔다. 학원에는 현재 250여 명의 수강생이 제빵·제과 기술을 배우고 있다. 배우고, 가르치고, 내 사업을 하겠다는 인생 목표를 하나씩 이뤄 온 것이다.

“정직한 제품이 잘 팔려”

물론 오늘의 그가 있기까지 수많은 난관에 부닥쳤다. 하지만 그를 쓰러뜨리지는 못했다. 가난의 굴레를 자식들에게 물려주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가 그에게 있었다. 이왕이면 최고가 되겠다는 큰 목표를 갖고 30년 계획을 차분하게 실행해 왔기 때문이다.

그의 목표를 향한 집념과 함께 눈여겨볼 대목은 신기술에 대한 학습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시장의 트렌드는 빠르게 변한다. 소비자들의 욕구도 해마다 달라진다. 이는 기술과 제품의 지속적인 혁신이 필요한 이유다.

그런데 혁신은 사람이 하는 일이다. 더욱이 리더가 먼저 변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권 대표는 모범적인 경영자다. 새로운 기술 습득에 누구보다 부지런했기 때문이다.

그는 기회만 되면 일본에 건너갔다. 짧게는 보름, 길게는 3개월간 일본 제과점에 머무르면서 신기술을 익혔다.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유럽 연수도 다녔다. 독일·스위스·스페인·이탈리아 등 유럽의 빵 선진국을 다녀왔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1년에 두세 번 인천공항으로 달려간다. 해마다 프랑스 리옹에서 열리는 ‘월드 페이스트리 컵(World pastry Cup)’ 심사위원으로 참석하고 있다.

그에게 경영 철학을 물었다. 그는 “도덕”이라고 답했다. 무슨 뜻이냐고 재차 물었다. 그는 “내가 우선 열심히 하고, 남을 인정하며, 배려해야 한다는 뜻”이라고 들려줬다. 이런 말도 했다.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있기 때문에 정직하게 열심히 살아야 해요.”

그는 도쿄제과학교 유학 시절 선진 기술도 익혔지만 더 소중한 가치를 배웠다. 그것은 자긍심이었다. 그는 “일본의 선생과 학생들 모두 제과업에 대한 긍지가 대단했다”고 회고했다. 자긍심을 가지면서 도덕심을 중시하게 됐다.

이런 자세는 제품에도 반영됐다. 그는 “소비자가 최고의 가치를 느껴야 한다”고 말했다. 이는 단순히 맛있고 비싼 것이 아니다. “만드는 사람이 마음을 듬뿍 담아 정직하게 잘 만들 때 가치가 생겨납니다.”

여기서 ‘정직’하다는 의미는 뭘까. 그는 “자신이 늘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부지런히 공부하는 마음”이라고 말했다. “자신을 잘 알기는 정말 어렵습니다. 어떤 경우엔 C급 기술자도 자신이 최고인 줄 알아요. 끊임없이 성찰하고 공부해야 합니다.”

주변의 수많은 유혹에도 불구하고 프랜차이즈 사업을 하지 않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직영점도 더 늘릴 계획이 없다. “제과·제빵은 신선한 야채나 생선 같은 성질을 갖고 있어요. 우유나 버터는 조금만 관리를 잘못하면 상할 수 있고, 먼 곳으로 배달하기 위해서는 미리 만들어 놓아야 하는데, 그러면 수분이 다 달아나지요. 만든 장소에서 내놓아야 맛있고 영양도 살아있습니다.”

성공의 습관은 사람마다 다르다. 그렇지만 권 대표의 성공 습관은 눈앞의 이익에만 목을 매는 사업가들이 다수인 요즘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는 후배들에게 한마디 해달라고 하자 “소크라테스의 명언을 항상 마음속에 담아두고 살아왔다”고 귀띔했다. “쉬지 않으면 마침내 이뤄진다.”


약력 : 1945년 경북 봉화 출생. 일본 도쿄제과학교 및 스위스 리치몬드국립제과학교를 수료했다. 성림제과·풍년제과를 거쳐 나폴레옹과자점에서 공장장으로 일했다. 1979년 독립해 리치몬드제과를 설립했으며, 1983년 리치몬드제과기술학원을 열었다. 2002년 대한민국 제과명장에 선정됐다.

권오준 기자 j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