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두나무 우물가에 동네 처녀 바람났네. 물동이, 호미자루 나도 몰래 집어 던지고….”

후다닥 봄이 왔다. 유난히도 추웠던 겨울이었는데, 하루 만에 봄이 왔다. 우물 속에 들어 있다가 튀어나온 것처럼 봄이 왔다. 그 봄의 따뜻한 기운에, 동네 처녀들의 몸속에서 겨우내 숨어 있던 지방분이 타 오른다. 그 에너지를 어찌하지 못하고 처녀들은 읍내로 달린다.

시인 오세영 선생님은 “산천은 지뢰밭인가. 봄이 밟고 간 땅마다 온통 지뢰의 폭발로 수라장이다”라고 노래했다. 처녀들의 가슴살에서 터지는 지뢰만 있는 것이 아니다. 청계산 자락 비탈에 누가 주인인지 모르는 밭이 있다.

그 밭을 따스한 봄볕을 받으며 가만히 바라보면 오세영 선생님의 지뢰밭이 보인다. 작은 흙 방울 사이로 조심스럽게 머리를 쳐든 연녹색의 생명, 그 생명에 붙어 있는 보일 듯 말 듯한 작은 움직임, 그놈들을 잡으러 가는 개미의 무리, 흙 속에서 부글거리는 미생물들, 미생물을 삼켜버리는 나무뿌리, 힘차게 솟구치는 줄기 속의 분수, 나붓거릴 듯 말 듯한 초록의 생명들이 전쟁을 시작한다. 삶의 힘이다. 생명의 환희다.

청계산 굴다리 안, 구청이 마련해 준 비닐 장터에 아줌마와 할머니들이 모였다. 바가지와 쟁반에 두릅·냉이·쑥·취·원추리를 담아 놓고 수다 아닌 수다를 떤다. 아이들 얘기다. 사위와 며느리 칭찬도 섞인다.

봄은 강에도 왔다. 영월의 동강. 산자락을 천천히 흐르며 돌다 여인의 속살보다 더 희고 고운 모래톱에 안긴다. 모래톱은 강물 안의 작은 생명들에게 쉴 곳을 찾아 준다. 생명들은 그 속에서 아기도 낳고 키운다.

작고 가는 새끼 물고기들이 재빠르게 모래톱을 휘젓는다. 강의 생명들은 모래톱 속에서 그들의 생명을 지키고 다른 생명을 돕는다. 이렇게 자라고 크면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닌가. 혹시 우리도 그렇게 살아 온 것은 아닌가.

이 땅의 사람들은 300만 마리가 넘는 소와 돼지를 몇 달 만에 땅속에 묻었다. 소·돼지가 잠실야구장에 꽉 차면 5만 마리나 될까. 잠실야구장에 소·돼지를 가득 채우고 그들을 죽이는 것을 상상해 보라. 그리고 그런 짓을 60번을 반복한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는가.

봄이 되면 얼었던 그 시체가 녹는다. 녹은 피와 살이 강을 오염시키고 사람이 먹는 물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이것만이 문제일까. 모래톱을 파헤치고 그 속의 작은 생명들을 가차 없이 죽이고 쫓아내는 것도 마찬가지 살생이다. 비단, 인간에게 불리하고 유리함만 따질 것인가.

곡선의 부드러움과 여유. 그것은 감성만이 아니다. 생명은 굽이굽이 도는 물과 길에서 호흡하고 먹이를 찾고 몸은 쉰다. 빠른 물, 직선의 길은 위험하다. 몸도 마음도 여유를 갖지 못하고 격류 속에서 허우적거린다. 좀 느리면 안 될까. 좀 쉬면 안 될까. 좀 양보하면, 좀 손해 보면 어떤가.

기생충이 숙주를 죽이면 저 자신도 죽는다. 그런 기생충을 우리는 바보라고 부른다. 인간의 숙주는 지구다. 그런데 그 숙주인 지구를 이렇게 망쳐 버리고 저는 잘 살겠다고 우길 수 있을까. 인간은 지구에 기생하고 있다. 그 인간을 위해 지구를 좀 그대로 놓아두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지구, 그 자체에 대한 경외심을 갖고 스스로 겸손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 모두 생명을 갖고 있지만 그것은 내 것이 아닐 것이다. 생명, 누구의 생명이든 생명 앞에서는 모든 생명이 겸손해야 할 것 같다. 봄이 되어, 그 생명들이 흙속, 땅 위, 모래톱 안과 밖에서 생명으로서의 기지개를 켜는 시절에 생명에 대한 생명으로서의 겸손을 느끼고 싶다.
[CEO 에세이] 산천은 지뢰밭인가
노익상 한국리서치 대표이사

약력
: 1947년생. 66년 경기고 졸업. 71년 고려대 사회학과 졸업. 73년 고려대 사회학 석사. 1978년 한국리서치 설립, 대표이사 사장(현). 2002년 고려대 사회학 박사. 2007년 대한산악연맹 부회장(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