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건축의 종말은 ‘아파트 대재앙’

“소은을 못 이루고 중은이나 하나니/길이길이 한가하게 지낼 수만 있다면/잠시 한가함보다 나을 테지만….”

소동파의 시를 읽다보니 대은(大隱)·중은(中隱)·소은(小隱)이란 말이 나온다. 대은은 조정과 시가지에 사는 것, 소은은 벼슬을 버리고 산림에 묻혀 은거하는 것을 가리키고, 중은은 한직에 있으면서 마음의 여유를 갖고 정신적으로 은거하는 것을 말한다. 옛날 중국에서 벼슬길에 나간 사람들은 소은을 하기 바랐지만 대부분 생계 때문에 대은의 삶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래서 차선으로 선택한 게 중은이다. 중은도 쉬운 일이 아니다. 누구나 한직에 있으면 ‘밀려났다’는 주변의 따가운 시선 때문이다. 소동파는 지방관으로 근무하며 틈틈이 자연을 즐기면서 중은을 실행한 시인이기도 하다.

“뜰 앞에는 벽을 한 줄 두르는데, 너무 높지 않게 해야 한다. 담장 안에는 석류와 치자, 목련 등 갖가지 화분을 각기 품격을 갖추어 놓아둔다. 국화는 제일 많이 갖추어서 48종쯤은 되어야 한다.

마당 오른편에는 작은 연못을 판다. 사방 수십 걸음쯤 되면 넉넉하다. 연못 속에는 연꽃 수십 포기를 심고 붕어를 길러야 한다. 대나무를 따로 쪼개 물받이 홈통을 만들어 산의 샘물을 끌어다가 연못으로 졸졸졸 떨어지게 한다.

연못의 물이 넘치면 담장 틈새를 따라 채마밭으로 흐르게 한다. … 문밖에 임금이 부른다는 공문이 당도하더라도 씩 웃으며 응하면서 나아가지 않는다.”

다산 정약용이 제자 황상에게 써 준 ‘숨어사는 자의 모습(題黃裳幽人帖)’을 읽다보면 금세 은자가 사는 공간으로 들어가고 싶은 충동을 억제할 수 없다. ‘제황상유인첩’은 다산이 황상에게 명 말기 황주성의 ‘장취원기(將就園記)’를 읽어주자, 황상이 자신도 그렇게 살고 싶다고 스승에게 아뢰면서 그 꿈을 시로 지어 올렸다. 이때 다산은 ‘제황상유인첩’을 지어주며 어린 제자에게 숨어사는 선비의 바른 마음가짐을 말해 줬다.

황상은 후일 ‘일속산방(一粟山房:좁쌀 한 톨 만한 작은 집)’이라고 불리는 작은 집을 짓고 살았다. 다산은 가끔 일속산방을 찾아가 황상이 지어준 조밥에 아욱국을 먹고 시를 지으며 하룻밤을 묵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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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가 ‘주거용 기계’인 이유

요즘 도시에 사는 중·장년들의 로망은 바로 전원생활일 것이다. 전원에서 살려면 이 역시 바로 실천해야 한다. ‘돈이 모이면’ 또는 ‘퇴직하면’ 등의 조건이 있으면 그 조건이 충족된 후에도 실행하기 어렵다.

그런 점에서 2004년부터 울릉도에서 1년의 절반 가까이를 보내고 미국과 울릉도를 오가며 보낸다는 가수 이장희의 선택이야말로 바로 ‘실행이 답이다’를 새삼 알게 해준다. 생업 때문에 전원생활로 돌아가는 ‘소은’이 어렵다면 전원에 살면서 도시로 출퇴근하는 ‘중은’은 마음먹기에 달렸다. 일전에 한 지인이 서울에 살다가 양평 양수리로 이사해 출퇴근하고 있다며 들뜬 표정이었다. 이게 바로 ‘중은’이 아닐까.

아파트에 살면서 가끔 아래위층에 사는 사람들의 일상을 생각하면 끔찍한 생각이 든다. “정말 아파트는 야만적인 곳이야!” 까닭 없이 예민한 날이면 이런 생각마저 살짝 고개를 든다.

누구나 하루빨리 귀전(歸田:벼슬을 내놓고 고향에 돌아가 농사를 지음) 은거를 하겠다고 다짐해 보지만 소동파의 독백처럼 그게 쉽지 않다. 우리 시대는 그야말로 숨 막히는 ‘주거 기계’에 살고 있다.

주거 기계는 주택의 기능주의적 요소를 강조하는 모더니즘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즉 합리성에 기반을 둔 모더니즘의 건축은 노동의 재생산을 위한 주택의 대량생산을 낳았다.

“주민들에게 욕실이나 샤워실, 건조실을 제공하고 완벽한 조명 시설이 갖춰진 공간에 앉아 라디오와 텔레비전을 보면서 사람들이 자기 집이라는 아늑함 속에서 세상을 관조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 이곳에서는 국가 자본주의가 훨씬 더 능숙하게 작동한다.”

앙리 르페브르가 쓴 ‘모더니티의 조건’에서 주거 기계로 전락한 아파트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한다. 신도시는 이성적 기계가 철저하게 작동하는 도구적인 기계이고 신도시 아파트는 ‘주거용 기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는 집이 ‘재테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도구적 공간으로 전락한 이유이기도 하다.

현대사회를 소비를 조작하는 관료사회라고 본 르페브르는 공간이 자본주의적 생산을 새로운 지역들로 확대시키는 하나의 주요한 상품으로 기능한다고 보았다. 공간은 사회적으로 생산되며 자본주의는 ‘공간의 상품화’를 통해 그 붕괴가 지연되고 있다고 분석한 것이다.

“공간은 정치적이다. 공간은 이데올로기나 정치와 무관한 과학적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항상 정치적이며 전략적이었다. … 우리가 보기에 공간은 동질하게 보이고, 순수한 형태로 완전히 객관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사회적 산물이다. 공간의 생산은 특정 상품의 생산과 유사하다.”

공간이 상품화된다는 것은 자본의 끊임없는 이윤 창출의 도구로서 공간이 이용된다는 것을 말한다. 공간의 상품화 과정은 판매와 구매 및 소비 행위를 하는 공간에서 매우 활발하게 된다.

공간은 이제 단순히 상품의 소비를 촉진하는 수준을 벗어나 직접 공간 자체가 소비되기 시작한다. 소비 공간은 질적으로 현격한 차이, 즉 미학적 차별성을 강조하게 된다. 자본은 불균등한 공간이 갖는 모순을 은폐하기 위해 ‘욕망’을 이용한다.

자본의 새로운 공간 전략은 물리적 자본 축적 환경을 구축해 공간을 생산할 뿐만 아니라 공간 자체를 상품화해 소비하도록 함으로써 이윤의 확대재생산을 꾀하는 것이다.

따라서 공간의 소비 과정에서는 상품의 기능을 강조하는 ‘필요’의 원칙보다 상품 판매 공간의 미학적 세련미를 강조하는 ‘욕망’의 원칙이 지배하게 된다. 우리들은 너나없이 필요의 원칙에 의해서보다 재테크의 욕망의 원칙에 따라 투자한다.

아파트든 상가이든 땅이든 빌딩이든 마찬가지다. 르페브르가 현대의 계급투쟁은 공간 투쟁의 형태로 진행된다고 하는 이유를 우리 사회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5층→20층→60층, 그 다음엔?

대한민국 어디를 가나 아파트가 우후죽순처럼 솟아나고 있다. 그 공간을 차지하기 위해 평생을 투쟁하며 살고 있다. 하지만 이제 전 국토를 잠식하는 아파트에 대한 반성적 성찰이 필요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아파트는 이제 우리에게 ‘아파트 재앙’을 가져다줄지 모르기 때문이다. 아파트가 노후화되고 낡으면 재건축하면 되지만 거듭 재건축을 할 수는 없다. 그럴 때 관리하기가 힘들고 가격 또한 하락이 불가피할 것이다.

즉 아파트는 재건축을 한 번 정도 하면 그 이후에는 재건축이 불가능해지는 단계로 접어든다. 이 단계가 되면 아파트는 그냥 던져버리고 폐기돼야 할 고물덩어리가 될 수밖에 없다. 국가 차원에서 ‘아파트 리스크’를 관리하지 않는다면 우리 사회는 ‘아파트 대재난’을 맞을 수도 있다.

“주택이 유행 상품처럼 취급되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별로 깊이 생각하지 않는 문제이지만, 결론적으로 말해 대단지 아파트는 서울을 오래 지속될 수 없는 하루살이 도시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아파트 공화국’을 쓴 프랑스 사회학자의 이 경고를 간과한다면 ‘아파트 재앙’은 일본의 쓰나미 재앙처럼 현실화될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이는 미국에서 확인할 수 있다. 1972년 미국의 신도시인 세인트루이스의 ‘프루이트-이고’ 주거단지를 폭파, 철거한 적이 있다. 도시 사회학자들은 프루이트-이고 주거단지의 폭파는 노동을 창출하기 위한 주거 기계로 전락한 모더니즘적 건축물의 상징적 죽음으로 받아들였다.

다행히 최근 우리 사회에서 아파트의 패러다임에 변화가 보이기도 한다. 대형 아파트가 죽을 쑤고 있는 것이 그 하나다. 이제 한국은 ‘아파트 공간’을 자본주의 체제 유지를 위해 ‘상품’처럼 생산해 내기에 대한 반성적 성찰을 본격 시작해야 할 시기가 아닐까. “사람은 평생 열심히 살면 세 채의 집을 짓는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이제는 66㎡(구 20평)에서 99㎡(30평), 132㎡(40평), 165㎡(50평)로 이어지는 아파트를 구입하는 것과 같은 ‘세 채 집짓기’는 지양해야 하다. 이제는 도시에서 한 채의 집만 짓고 그 아파트를 팔아 시골에서 살기 좋은 곳을 골라가며 황상의 일속산방과 같은 집을 짓는 게 더 행복한 집짓기가 아닐까. 그렇지 않으면 자본가와 국가자본주의가 부추기는 ‘공간 투쟁’을 하다가 삶을 마감할 수 있을 것이다.

최효찬 자녀경영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