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와 문화의 주체로 ‘우뚝’

요즘의 중년은 우리 아버지 세대의 중년과는 너무나 다르다. 가수 조용필의 팬들 사이에서 40대 팬은 ‘청년’으로 통할 정도로 이제 중년은 더 이상 노년으로 가는 길목이 아닌 청년기보다 더 여유롭고 적극적으로 삶을 즐기는 세대로 그 의미가 바뀌었다. 고학력 세대이자 소비의 주체, 문화의 주체로 떠오른 이 시대의 중년들. 이 때문에 현재 그들이 열광하는 것들을 보면 시대의 트렌드가 보인다.
[Special ReportⅡ] 대한민국 중년들이 열광하는 것들
일반적으로 이르면 30대 후반, 넓게는 50대까지를 지칭하는 ‘중년’. 사전적 정의도 다르지 않다. ‘마흔 살 안팎의 나이, 청년과 노년의 중간을 이르며, 때로 50대까지 포함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인간의 수명이 길어진 지금 ‘청년과 노년의 중간’을 ‘중년’이라는 한 세대로만 통칭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일례로 과거에는 60세를 노년으로 분류하는데 주저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중년에 대한 이미지나 인식도 현실적으로 상당히 바뀌었다. ‘아저씨’와 ‘아줌마’로 대변되는, 삶의 무게와 책임감은 크고 의욕과 열정은 덜하며 자신보다 가족(그중에서도 자녀)을 위해 희생하는 이미지가 강했다면 지금은 경제·사회적으로 안정된 기반을 구축하고 있고 삶에 여유가 있으며 자기 인생을 누릴 줄 알고 적극적으로 디자인하는 세대쯤으로 인식된다.

노년에 가까워지는 중년이 아닌 청년기를 갓 지난 중년인 셈이다. 이처럼 달라진 분위기를 반영하듯 중년은 문화와 소비에서도 적극적인 주체로 떠오르고 있다. 중년들의 지갑을 타깃으로 한 사업의 성공 가능성이 더욱 점쳐지는 것도 그런 이유다.

SK마케팅앤컴퍼니 최지원 랩장은 “요즘의 중년들은 1960년대 이후 출생자들로 대한민국의 산업화가 급속히 진행되던 1970년대와 1980년대 성장기를 보낸 사람들”이라며 “이러한 환경적 경험은 소비 DNA를 갖게 했고, 이들이 (20~30대와 다르게) 소비할 능력 또한 갖고 있다는 필요충분조건이 충족된 것”이라고 설명한다.

‘쎄시봉’부터 ‘써니’까지 복고가 대세

지난 5월 초 개봉한 영화 ‘써니’는 관객 수 730만 명을 동원하며 올해 상반기 최고 흥행작에 등극했다. 액션·스릴러 같은 장르물이 아닌 가족 영화로는 이례적으로 미국에서도 개봉돼 호응을 얻고 있다.

탄탄한 스토리와 배우들의 연기력도 성공 요인이겠지만 ‘써니’의 흥행에는 중년 관객의 힘이 숨어 있다. 영화 속 주요 배경인 1980년대의 복고 문화가 그 시절에 대한 추억을 가진 중년 관객들을 극장으로 불러 모은 것.

영화사 관계자는 “온라인 티켓 예매만 봐도 중년층 예매율이 다른 영화에 비해 높았다”면서 “중년들은 자녀들이 대신 예매하는 경우도 많고 현장 구매도 많기 때문에 실제 중년 관객은 예매율보다 훨씬 높은 편”이라고 말했다. 아닌 게 아니라 영화가 상영될 당시 객석에서는 영화를 보며 “맞아 맞아”를 외치는 중년 관객들의 목소리가 심심치 않게 들릴 정도였다.

요즘 화제의 방송인 MBC ‘일밤-나는 가수다(이하 나가수)’ 역시 복고 열풍의 중심에 서 있다. 적어도 ‘나가수’의 본 방송만큼은 중년층이 주 시청 층인 것만 봐도 이 프로그램이 주는 의미를 알 수 있다. ‘나가수’에서 선보이는 지나간 옛 노래들이 중년들의 가슴에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것.

그래서인지 프로그램 홈페이지 청중 평가단 신청 게시판에는 “40대 광팬입니다”, “50대 부부에게 청춘을 돌려주세요” 등 30대 이상 중년 시청자들의 ‘절절한’ 글이 끊이지 않고 올라오고 있다.

올해 초부터 시작된 ‘쎄시봉 열풍’은 단순히 대중가요가 추억을 불러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세대 간 벽을 허무는 역할까지 하고 있다. ‘쎄시봉’ 세대를 전혀 모르는 10대, 20대들까지 쎄시봉에 열광하면서 부모 세대와 같은 문화를 향유하게 된 것이다.

‘세시봉, 서태지와 트로트를 부르다’의 저자 이영미 씨는 쎄시봉 열풍이 상징하는 것은 청장년이 향유하는 대중문화 시대의 본격적인 도래 조짐이라고 예견하면서 “중년들도 항상 대중문화를 향유해 왔지만 과거엔 여론 주도 능력이 떨어졌을 뿐”이라고 말한다.

즉 지금의 중년들은 고학력자가 많아 적극적으로 자기 취향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현재 TV 방송 역시 10대, 20대보다 중년을 타깃으로 한 프로그램이 더 많다는 사실도 지적하며 “10~20대는 TV 앞에 앉아 방송을 보지 않는다. 공중파 텔레비전을 장악한 세대는 현실적으로 중년층”이라는 해석도 덧붙인다.

복고 바람이 불면서 마케팅 역시 향수를 자극하는 ‘레트로(Retro) 마케팅’이 확산되는 추세다. 가장 대표적인 예는 트렌드에 가장 민감한 광고계다. SK텔레콤은 ‘현실을 넘다’라는 슬로건 아래 아이유와 김광석이 한 무대에서 기타를 들고 ‘서른 즈음에’를 노래하는 합성 화면을 광고로 선보여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다.

조용필 그리고 삼촌부대

음악이 시작되자마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선다. 분명 좌석제인데 어느샌가 스탠딩 콘서트가 돼 버렸다. 손에는 다들 야광 봉을 하나씩 들고 있으며 여기저기 ‘오빠’와 ‘형님’이라고 쓴 플래카드도 보인다.

‘아악’하는 함성은 기본, 노래를 따라 부르고 때론 격하게 몸을 흔들며 즉석 ‘댄스’도 선보인다. 심지어 한쪽에선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관객도 있다. 열광의 도가니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현장은 다름 아닌 조용필 콘서트 ‘바람의 노래’다.

이 시대 중년을 논하면서 ‘조용필 콘서트’를 빼놓을 수 없다. 중년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가보고 싶어 하는 무대가 바로 조용필 콘서트인 것. 보통 1만 석 이상의 대규모 공연을 하는데도 전회 매진 기록을 세울 정도로 인기가 뜨겁다.

더욱 특이한 것은 중년을 대상으로 한 다른 가수의 콘서트와 비교해 봐도 남자 관객의 수가 현저히 많다는 사실이다. 인터파크 예매 기준으로 여성 관객과 남성 관객의 비율은 61.2% 대 38.2%. 공식 홈페이지인 ‘조용필 닷컴’에서도 열혈 남성 팬들의 활동이 두드러진다.

팬클럽에서 활동하는 세대는 대부분 40~50대의 중년으로, 가수 조용필의 팬들 사이에서 40대 팬은 ‘청년’으로 통한다. 콘서트를 주관하는 인사이트 엔터테인먼트 관계자는 “조용필 씨의 콘서트 현장에서는 관객도 가수도 나이를 잊는다”면서 “객석을 보고 있으면 중년의 팬들이 이렇게까지 열정적일 수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라고 말했다.
[Special ReportⅡ] 대한민국 중년들이 열광하는 것들
비슷하지만 다른 식으로 열광하는 중년들도 있다. 소녀시대, 아이유 등에 열광하는 ‘삼촌부대’가 그렇다. ‘삼촌부대’의 원조는 소녀시대 인터넷 팬클럽인 ‘소시당(소녀시대당의 준말)’이다.

‘소시당’은 회원의 대부분이 30~40대 이상 남성으로 지난해 ‘소녀시대 경영’을 내건 KTB투자증권 주원 대표가 실제로 가입해 화제를 낳았으며, KBS ‘남자의 자격-남자, 열광하라’ 편에서는 이경규·김국진·이윤석·김태원 등이 ‘소시당’에 가입한 뒤 콘서트 현장을 즐기는 모습이 방송을 타기도 했다.

소녀시대 측은 “소녀시대가 ‘삼촌 팬’들이 많기는 하지만 그 외에도 팬 층이 워낙 다양하다”며 “특히 엄마·아빠·자녀 등 가족 단위로 오는 경우도 많아 콘서트 때는 따로 패밀리 좌석을 마련하고 있다”고 말했다.

모 여가수의 매니저는 “삼촌 팬들은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기 때문에 선물의 수준도 다를 뿐만 아니라 음반 구입이나 콘서트 예매 등에도 적극적이어서 시장 자체에도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나를 가꾸고 표현하는데 아낌없이

스마트폰 구매에서도 중년들의 비중이 갈수록 두드러지고 있다. 스마트폰 신규 가입자 4명 중 1명이 40대 중년층으로 20~30대를 추월한 것. 지난 7월 25일 KT경제경영연구소와 연세대 산학협력단이 공동으로 발표한 ‘스마트폰 시대의 모바일 디바이드’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5월 11.6%였던 40대 사용자 비중이 그해 11월에는 24.7%로 급증하는 양상을 보였다. 심지어 디지털 기기 사용에서 거의 소외됐던 50대 이상도 1.8%에서 11.9%로 급증했다.

이러한 현상은 그만큼 스마트폰 보급률이 빠르게 확산된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중년의 구매력에 초점이 맞춰진다. 중년층은 스마트폰 기기 구입이나 상대적으로 비싼 요금제를 감당하는데 비교적 부담이 덜하기 때문이다. 스마트폰 초창기보다 이해도와 활용도가 높아진 것도 중년들의 구매를 높인 또 다른 이유로 분석된다.

중년들의 경제적 여유는 이제 자신을 꾸미는 데도 아낌없이 투자되고 있다. 시술을 통해 살을 빼 ‘옷맵시’를 과시하고 싶어 비만 클리닉을 찾는 중년들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중년을 타깃으로 한 뷰티 시장도 확대됐다.

더욱이 뷰티에 대해 거의 관심이 없었던 중년 남성들까지 ‘꽃중년’ 열풍에 가세하면서 남성 화장품 시장은 매년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아모레퍼시픽에서 운영하는 남성 전용 뷰티 숍 맨스튜디오 측은 “피부 관리, 두피 관리 등 케어 고객은 30~40대 남성이 70% 이상이며 50대 남성들도 대다수”라고 전했다.
[Special ReportⅡ] 대한민국 중년들이 열광하는 것들
중년 남성을 타깃으로 한 고가의 명품 시계 시장도 커지고 있다. 양적인 확대는 물론 최근에는 세계적인 명품 중의 명품으로 인정받는 파텍 필립이 연말 즈음 국내에 매장을 열고 본격적으로 한국 시장 공략에 나서는 등 성장 속도도 빠르다.

예물 시계를 제외하고 명품 시계의 주 고객이 40~50대 이상이라는 점에서 볼 때 중년 남성들의 ‘시계 사랑’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다. 여성들이 어느 정도 나이가 들면 ‘샤넬 백’에 대한 로망을 갖듯 요즘 중년 남성들 사이에서는 명품 시계에 대한 열망이 자리하고 있다. 다른 건 몰라도 시계 하나만큼은 명품을 소유하고 싶은 심리가 크게 작용하는 것.

브라이틀링·해리윈스턴·태그호이어 등 명품 시계를 수입 판매하는 명보시계 측은 “명품 시계는 30~40대가 주요 고객으로 최근 들어 50대 고객의 유입이 굉장히 많아졌다”며 “중년들은 경제력이 있기 때문에 브랜드 중에서도 골드워치나 다이아 장식 등 화려하고 블링블링한 제품들을 선호한다”고 말했다.

또한 국내 명품 시계 시장에 대해서도 “지난해에도 놀랄 만큼 성장했지만 올해는 작년 대비 드라마틱한 성장을 보이고 있다”며 “스위스에 물건을 주문해 받아 판매하는 형식인데 스위스에서 물량이 달릴 정도”라고 말했다.

나만의 공간 필요, 현실적 은퇴 준비도

경제적 안정과 함께 심리적으로 안정을 추구하며 ‘자기만의 공간’을 간절히 바라는 중년들도 많아지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보통 남성들에게서 나타나는데 집의 공간 대부분이 아내와 아이들을 위한 공간이라고 생각하는 데서 비롯된다.

이러한 이유로 경제력이 뒷받침되는 남성들은 가족들 몰래 오피스텔을 마련해 ‘나만의 공간’으로 이용하기도 하고 하다못해 아무도 없는 휴일 회사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개그맨 최양락은 화장실 하나를 자기만의 공간으로 꾸며 놓고 심지어 아내도 들어오지 못하게 한다고 한다. 성균관대 건축학과 권문성 교수는 남성들에게 자기만의 공간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권 교수는 “집에는 남자들의 공간이 없다. 안방은 아내의 공간이고 아이들도 자기 방이 있는데 서재는 공동으로 사용한다”며 “남성들에게 자기만의 공간이 없다면 정서적으로 불안함을 느낄 수 있다”고 말한다.

중년들이 느끼는 또 다른 불안감은 은퇴 후 미래에 대한 것이다. 그런 이유로 중년들이 적극적으로 은퇴 준비에 나서고 있다. 최근 월 지급식 펀드의 인기는 가히 폭발적이다. 1조 원 가까운 금액이 몰린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미래에셋 은퇴교육센터 김동엽 센터장은 “과거엔 은퇴가 먼 미래의 일이었던 중년들이 40대 정도가 되면 마음이 급해진다”면서 “월 지급식 상품 가입자가 많아지고 연금복권을 사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도 연금이 바로 지금 당장의 일이 됐기 때문”라고 설명한다.

박진영 기자 bluepjy@hankyung.comom┃사진 한국경제신문, MBC·아모레퍼시픽·SM엔터테인먼트·인사이트 엔터테인먼트·명보시계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