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 “한국형 싱크탱크의 장점 살려가야죠”

올해 ‘100대 싱크탱크’ 조사에서 최대 화제는 한국개발연구원(KDI)이다. 기업 연구소의 대표 주자인 삼성경제연구소를 누르고 5년 만에 경제·산업 분야 1위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1970~1980년대 한국 경제 성장 신화의 밑그림을 그렸던 화려한 명성을 생각하면 오히려 늦은 감이 있다. 하지만 KDI가 처한 현실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경제 규모의 성장과 세계화·복잡화로 정부 주도의 성장 패러다임은 이제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또 한편으론 풍부한 재원과 순발력을 앞세운 기업 연구소들과도 경쟁해야 한다.

현오석(62) KDI 원장은 “국책 연구소는 정책 정보가 풍부하고 기업 연구소들보다 독립성이 앞선다”며 “한국형 싱크탱크 모델로 계속 발전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12월 6일 동대문구 홍릉에 자리한 연구원에서 현 원장을 만났다.
[한국 100대 싱크탱크] ‘경제·산업 분야 1위’ 현오석 한국개발연구원 원장
약력:1950년 충북 청주 출생. 74년 서울대 경영학과 졸업. 84년 미 펜실베이니아대 경제학 박사. 93년 대통령 비서실 경제비서관. 98년 재정경제부 경제정책국장. 2002년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연구원 원장. 2009년 한국개발연구원 원장(현).



1위 비결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올해가 KDI 창립 41주년이에요. 하지만 역사성만 갖고는 안 되죠. 경제 패러다임이 과거와 달라졌거든요. 글로벌 경제 위기 속에서 KDI가 나름대로 정책 제안을 해 방향타 역할을 했다고 평가해요. 세금을 쓰는 기관으로서 사명감을 갖고 국민 경제에 기여하도록 항상 노력하죠. 이제는 국내의 우수한 싱크탱크에서 한 발 더 나아가 글로벌 싱크탱크를 지향해야 해요. 최근 해외 평가 기관들도 좋은 평가를 하고 있어요.

국제무역연구원 원장도 하셨는데, 국책 연구소와 민간 연구소의 가장 큰 차이는 무엇입니까.

민간 연구소는 발 빠른 정보 제공에 강합니다. 여러 가지 흐름을 따라가면서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정보를 신속하게 공급해요. 국책 연구소들이 약한 부분이죠. 국책 연구소는 항상 구체적인 정책 제안을 염두에 둘 수밖에 없어요. 속보성보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과학적 분석을 우선시하죠. 이제 국책 연구소들도 변해야 해요. 국민들에 대한 정보 제공도 중요한 역할이거든요. KDI도 ‘KDI 포커스’ 를 발행하는 등 다양하게 노력하고 있어요.

원장 부임 후 가장 역점을 둔 것은 무엇입니까.

30년 전 제가 경제기획원에 있을 때 KDI와 함께 일했죠. 민간 경제연구소가 거의 없어 선도적인 역할을 하던 시절이에요. 지금은 대학이나 민간 연구소들과 경쟁해야 하는 입장이죠. 연구원이 다루는 이슈의 성격도 달라졌어요. 똑같은 경제문제라도 그 안에 사회적인 요소, 정치적인 요소, 이해 갈등 문제가 다 들어 있어요. 단순한 경제적 관점이 아니라 학제적인 연구가 필수죠. 한국 경제가 글로벌화됐기 때문에 항상 세계경제 속에서 한국 경제를 보는 시각도 필요하고요.

경제개발협력센터(CID)는 어떤 곳입니까.

글로벌화는 선진국과의 문제만이 아니에요. 개발도상국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 게 그 못지않게 중요해요. CID는 한국의 경제 개발 경험을 개도국에 전수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동안 40개국에서 200개가 넘는 프로젝트를 진행했어요. 몽골·베트남·미얀마에서는 KDI 같은 연구 기관을 만들고 싶어 하죠.
[한국 100대 싱크탱크] ‘경제·산업 분야 1위’ 현오석 한국개발연구원 원장
국책 연구소들의 역할을 새롭게 설정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은데요.

한국 경제에 상당 기간 KDI 같은 독자적인 정책 연구 기관이 필요합니다. 선진국은 대학이나 민간이 재원을 부담하는 재단을 통해 정책 연구가 활발하죠. 한국은 아직 이런 여건이 갖춰져 있지 않아요. 대학은 정책에 관한 정보도 부족하고 교수들도 선호하지 않아요. 민간 재원으로 운영되는 연구 기관도 정답은 아니에요. 국책 연구소의 독립성처럼 돈을 대는 민간으로부터의 독립성 문제가 또 나오거든요. 이해 당사자에서 한 발 떨어져 정부의 지원으로 운영하는 현재 형태가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닌 거죠.

정부의 영향력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 수 있습니까.

정부가 ‘왓 투 두(What to do)’를 말할 수는 있지만 ‘왓 투 세이(What to say)’를 요구해서는 안 됩니다. 이를 테면 가계 부채 문제에 대해 연구해 달라고 부탁하는 건 가능하지만 그 결과에 대해 어떤 식으로 말해 달라고 요구해서는 안 되죠. 정부와 국책 연구소가 서로의 역할을 잘 이해한다면 풀지 못할 문제가 없어요.

인력 확보도 중요한 과제인 데요.

1970년대 KDI 연구원은 국립대 교수 연봉의 5배를 받았어요. 게다가 운전사가 딸린 차와 아파트가 제공됐죠. 파격적인 대우로 우수 인력을 유치한 겁니다. 그 후 대학이나 민간 연구소가 발전하면서 그런 파격적인 대우의 의미가 퇴색했어요. 지금은 오히려 국책 연구소들이 불리한 처지죠. 대학 교수는 정년이 65세지만 국책 연구소 연구원은 60세로 훨씬 짧아요. 연금 혜택도 교수보다 불리하죠. 교수는 국민연금보다 혜택이 많은 교원 연금을 받거든요. 게다가 정책 연구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어려운 작업이에요.

세종시 이전 영향도 있지 않습니까.

11월 초 기공식을 했고 내년 말 이전합니다. 아이들이 조금 컸거나 부인이 서울에 직장이 있다면 사실 결정하기가 쉽지 않아요. 세종시 이전 문제가 겹치면서 지난 3년 동안 15명이 KDI를 떠나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겼어요. 연구소는 기본적으로 사람이 하는 겁니다. 새로 인력을 충원했지만 경험에서 차이가 날 수밖에 없어요.

국내 싱크탱크 활성화를 위해 무엇이 필요합니까.

한국과 선진국을 똑같이 비교하기는 어려워요. 한국은 민간 싱크탱크라고 해도 선진국과 성격이 달라요. 대다수가 대기업 싱크탱크죠. 미국은 기금을 통해 운영되면서 일종의 공공재인 ‘공공 정책’을 생산해요. 브루킹스연구소는 정부의 조세 정책이나 경기 대책, 복지 정책, 외교 문제에 대해 다양한 보고서를 내놓죠. 한국에서는 소위 민간 싱크탱크들이 이런 걸 할 수 없어요. 돈이 안 되기 때문이죠. 한국도 기금 형태로 운영되는 싱크탱크가 나와야 해요.
[한국 100대 싱크탱크] ‘경제·산업 분야 1위’ 현오석 한국개발연구원 원장
내년 차기 정부가 출범합니다. 가장 큰 과제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한국이 중·장기적 관점에서 어떤 개혁이 필요한지에 대해 어느 정도 공감대가 있어요. 우선 성장 잠재력을 끌어 올려야 해요. 지금 대선 후보들이 이 문제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있어요. 경제 규모가 커지고 고령화되면 예전처럼 대형 투자가 어렵게 되죠. 다른 나라를 봐도 성장 잠재력이 자꾸 하향화될 수밖에 없어요. 문제는 어떤 나라는 하향 추세 그대로 가고 어떤 나라는 좀 더 완만하게 간다는 거죠. 구조조정을 통해 성장 잠재력을 높이려는 노력을 하느냐 마느냐의 차이예요. 서비스 분야의 생산성을 높이고 각종 규제 철폐를 통해 시장을 좀 더 원활하게 작동하도록 해야죠. 교육 등 인적 자본에 대한 투자도 필요하고요.

또 다른 과제는 없습니까.

복지 문제도 중요해요. 앞으로 복지 수요가 많아지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에요. 중요한 건 복지 문제도 경제적인 제약 하에서 풀어가야 한다는 거죠. 그러자면 우선순위를 정해야 하고 현행 복지 전달 체계에 허점이 없나 살펴봐야죠. 경제 안정도 빼놓을 수 없어요. 경제가 성숙할수록 재정을 포함한 거시경제의 안정이 매우 중요해요. G20 멤버지만 한국은 여전히 주변국 처지예요. 선진국에서 위기가 생기면 그 영향이 바로 오거든요. 위기관리를 위해서는 재정이 탄탄해야 해요. 일시적인 경기 부양은 늘 그 코스트를 치른다는 것도 명심해야죠.


장승규 기자 skj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