샐러리맨의 ‘생존전쟁’이 본격화됐다. 이는 과거 양상과 사뭇 다르다. 돈 한 푼 더 불리려는 ‘플러스알파’적인 생존전략은 사실상 ‘그림의 떡’이다. 이제는 하루하루 호구지책을 염려하는 당장의 일자리가 급해졌다. 사표와 퇴직이 급속도로 증가 추세다.

물론 특유의 고용 안정은 한국에 비할 바가 아니다. 일본은 한때 고용 천국이었다. 탄탄한 가족주의 덕분에 종신 고용과 연공서열이 진리처럼 수용됐다. 직원 해고는 최고경영자(CEO)의 머릿속에 없는 단어였다. 공동체의 상생 추구만이 최고의 추구 가치였다. 소프트파워 1순위에 꼽히는 장인 정신과 교토(京都)식 기업 모델이 대표 성과다.
[일본] 해고 벼랑에 선 중년 ‘권고 퇴직’ 러시…생존전쟁 본격화
‘(주)일본’의 신화는 이렇게 써졌다. 하지만 버블 붕괴 후 일본 모델은 적잖이 방황했다. 이때 흡수된 게 신자유주의다. 완전경쟁·적자생존 등 능력 지향의 일본 사회 확산이다. 이로써 고용 안전판이 약화됐다. 유연성의 확대다. 필요하면 썼다가 여차하면 자른다. 비정규직을 필두로 한 노동의 상시적 용도 폐기다.

그래도 65%의 정규직은 해고 파고에서 비켜 선 수혜 집단이다. 힘들다고 하더라도 스스로 나가지 않는 한 지속 고용이 보장됐다. 그런데 요즘은 좀 달라졌다. 이들 ‘회사 인간’의 퇴사 러시가 심상치 않다. 평생직장의 붕괴다. 물론 표면상은 희망퇴직이다. 원해서 나가는 형태다. 요즘 일본 직장 사회의 핫이슈는 ‘권고 퇴직’이다. 포인트는 감춰진 집요함이다.

상상 초월의 비인간적인 사퇴 압력이 횡행해서다. 정리 해고 형태의 강력한 권고 퇴직이지만 밖엔 자발적인 희망퇴직으로 포장돼 의외로 문제의 심각성이 가려져 있다. 동양경제가 소개한 사례를 보자. 원래 권고 퇴직 면담 횟수는 2~3회가 보통이다.

그런데 이제는 10번을 웃돌기도 한다. 출근만 하면 사표를 강권하니 스트레스는 불문가지다. 퇴직 권유를 받은 NEC그룹의 40대는 인터뷰에서 ‘사표=죽음’까지 떠올렸다고 했다. 방법도 의외였다. 처음 2~3회 면담은 그래도 잘 아는 직속 상사였다.

그다음부터는 때때로 2시간 이상의 퇴직 권유가 반복되면서 상대도 이사 혹은 인사 담당자로 바뀌었다. 심리적 불안·부담이 극대화될 수밖에 없다. 외부 도움을 부탁했더니 냉혹한 매도와 따돌림이 한층 심해졌다. 능력 부족의 질타는 보통이고 나중엔 인신공격까지 자행됐다. 이 사례는 현재 소송 중이다. NEC그룹은 2012년 희망퇴직자를 2400명으로 잡았다.
[일본] 해고 벼랑에 선 중년 ‘권고 퇴직’ 러시…생존전쟁 본격화
희망·조기 퇴직 모집 규모, 예년의 2배

도쿄상공리서치에 따르면 2012년 10월 현재 상장기업 희망·조기퇴직 모집 규모는 1만6000명을 웃돈다. 예년의 2배 수준이고 금융 위기 직후인 2009년보다 많다. 실제로는 빙산의 일각이라는 지적도 있다. 최대 모집은 반도체 메이커인 ‘르네사스일렉트로닉스’다.

뒤이어 전기 메이커인 NEC와 샤프 등도 많다. 산업 연관성이 넓은 전기 업계가 퇴직 진원지라는 점에서 거래처의 악영향까지 우려된다. 원청 업체가 자르는 판에 잉여 인력을 들고 갈 하청 업체가 없기 때문이다. 르네사스는 업적 악화로 국내 공장의 절반을 폐쇄·매각 중이다. 대상 공장 9곳의 거래처는 2차 거래처까지 합해 모두 3500개에 이른다.

지역 경제에 해고 여파가 본격화되지 않을 수 없는 규모다. 잘려도 재취업되면 문제는 없다. 그런데 이게 쉽지 않다. 권고 퇴직의 주요 대상은 4050세대에 집중된다. 입사 이후 대략 20~30년을 일한 회사의 기둥 집단이다. 다만 인원이 너무 많다. 버블 경기가 한창일 때 대량 입사해 어떤 산업·기업이든 두터운 인력 풀로 남았다. 동일 업종을 고집하면 재취업은 물 건너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중년은 가계 지출이 최고조다.

반면 회사의 인원 정리 스케줄은 순조롭다. 모집 정원까지 거의 채운다. 여기엔 꼼수가 있다는 게 시민사회의 판단이다. 일본의 노동 규제는 비교적 센 편이다. 정규직이면 잘릴 일이 거의 없다. 노동계약법에도 객관적·합리적이며 회사 통념상 인정되지 않는 해고는 무효다.
[일본] 해고 벼랑에 선 중년 ‘권고 퇴직’ 러시…생존전쟁 본격화
‘해고권 남용’을 막기 위해서다. 그래서 필요성, 회피 노력 의무, 인선 합리성, 절차 합리성 등 정리 해고의 4요건을 충족시켜야 한다. 이 때문에 기업은 파탄 직전까지 몰리지 않는 한 해고가 불가능하다고 반발해 왔다. 그래서 기업은 수면 아래에서 비책(?)을 찾는다.

권고 퇴직과 배치 전환의 악용이다. 해고는 힘들어도 권고 퇴직과 배치 전환은 제한이 약하다. 권고 퇴직은 그 자체로 문제는 없다. 단 집요한 반복이나 협박 등의 강요는 위법이다. 2008년 재판에서도 ‘퇴직을 거부하더라도 권고를 중단할 필요는 없으며 재검토를 재촉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밝혀 기업에 숨통을 열어줬다.

배치 전환도 직원에겐 만만치 않다. 기업의 광범위한 재량 발휘가 가능해 원하지 않는 곳에 배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엉뚱한 자회사에 보내거나(出向) 실적 하락을 이유로 강등 인사도 낼 수 있다. 화이트칼라의 개발자에게 창고 정리를 시켜 놓고 능력 부족을 대며 닦달하는 식이다. 직장에서 따돌리는 수법(Lock-out)도 다양화됐다.

가령 통신사인 블룸버그 도쿄지국의 중년 기자는 어느 날 연간 1건의 베스트 기사면 충분했던 것을 월 1건으로 쓰라는 개선 업무(노르마)를 부여받았다. 이후 그 미달성을 이유로 권고 퇴직이 시작됐다. 결국 자택 대기를 거쳐 4개월 후 능력 부족을 이유로 해고됐다. 이때 사원 카드만 반납하고 즉시 퇴사를 명령받았다. 개인 물품은 택배로 보내겠다는 설명이었다. 훗날 재판 과정에서 반박 증거를 없애기 위한 회사의 의도로 의심된다.

이처럼 ‘능력 부족+보통 해고=퇴사 압력’이 최근 유행이다. 갑자기 불러 일면식도 없는 인사 담당자가 해고 예고 통지를 읽은 후 그 시간부터 출근 금지를 통보하는 형태가 대표적이다. 감시로 짐도 못 챙기고 황망히 떠날 수밖에 없다. 이유는 모두 능력 부족으로, 구체적인 설명이 없다. 통지문에는 2일 안에 본인 사정에 따른 자발 퇴직을 결정하면 할증 퇴직금과 재취업 지원 회사의 지원을 제공한다는 조건부 항목이 포함된다. 즉 희망퇴직을 하든가 즉시 나가든가 선택하도록 강요했다.

해당 직원은 사실상 방어조차 힘들다. 동양경제는 전문가의 말을 빌려 이를 일본의 제4기 구조조정이라고 이름 붙였다. 특정 중·고령자를 노린 구조조정(제1기), 업적 악화로 전체 직원 대상의 희망퇴직(제2기), 정리 해고를 내세운 희망퇴직(제3기)에 이은 강공책 일변도의 최근 상황을 제4기로 규정했다. 요컨대 해고 자유화의 흐름이다.



친환경 보조금 없어진 자동차 업계 ‘위기’

이는 제조업·대기업에만 해당되지 않는다. 제조업의 실업자를 받아줬던 서비스업도 심각하다. 가령 신입 사원을 입사 6개월 후 점장으로 발령해 아침 7시부터 저녁 10시까지 일을 시키는 것이다. ‘관리감독자’니 잔업 수당이 없다. 즉 ‘이름만 관리직’이다. 신입 사원이라 다른 회사 사정을 몰라 묵묵히 격무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이후 쓰러지거나 우울증에 빠져 상당수가 스스로 퇴직을 결정한다. 또 뽑으면 되기 때문에 회사로선 그다지 손해가 아니는 태도다. 중소·영세기업도 마찬가지다.

구인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쪽이다. 이 때문에 중소기업에서 해고는 이미 자유화됐다. 협조 부족 등 턱없는 일방적인 해고 사유도 많다. 귀를 의심하게 하는 해고 사례는 이 밖에도 얼마든지 있다.

문제는 앞으로다. 고질적인 내수 불황에 주요 산업의 채용 감소까지 예상돼 당분간 힘들어질 전망이다. 친환경 보조금이 없어지면서 당장 자동차 업계가 힘들어졌다. 전기 업계와 함께 산업 연관성이 커 해고 여파가 우려된다. 설상가상으로 휴업 수당의 일부로 조성한 고용 조정 보조금은 경기 회복을 이유로 지급 기준을 다시 강화했다. 2009년 보조금 효과로 실업률이 최대 1.4% 억제됐다는 사실에서 해고 무게는 한층 높다. 그래서 이들에게 2013년은 ‘생존전쟁’이다.


전영수 한양대 국제학대학원 겸임교수(전 게이오대 방문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