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킨게임’승자된 한국…미세 공정 한계 우려도

반도체가 다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다. 적기에 등판한 구원투수 격이다. 3년 동안 이어진 공포의 치킨게임이 끝났다. 이번에도 승자의 과실은 한국 업체들의 몫이다. 메모리 시장은 3~4개 플레이어만 남은 과점 체제로 재편됐다. 새판에 맞는 새로운 게임의 법칙이 필요한 시점이다. 시장에서는 ‘제2의 장기 호황’을 전망한다. 하지만 정반대의 예측도 있다. 한계에 도달한 미세 공정도 새로운 고민거리다.
[SPECIAL REPORT] ‘깜짝 실적’반도체 산업 위기인가 기회인가
‘엘피다(ELPIDA)’. 희망을 뜻하는 그리스어 ‘엘피스(Elpis)’에서 따온 이름이다. 한때 세계시장을 주름 잡은 일본 반도체 업계의 마지막 희망이던 이 업체가 미국 D램 업체에 합병되는 운명을 맞았다. 7월 31일 마이크론은 엘피다 지분 100%를 사들이는 인수 작업을 완료했다고 공식 선언했다. 일본 히로시마에 주력 공장을 둔 엘피다는 이제 마이크론의 일부로만 존재한다.

엘피다는 1999년 일본에 남은 마지막 D램 업체로 기대속에 출범했다. 과거 세계 반도체 시장 1위였던 NEC와 미세 가공 기술 선도를 자랑하던 히타치의 D램 사업부가 합친 것이다. 한국에 넘겨준 주도권 탈환을 목표로 삼았지만 출발부터 순탄하지 않았다. 양사 엔지니어들의 내부 갈등과 적극적인 투자 미흡으로 결국 14년 만에 미국 회사가 되고 말았다.

업계 3위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추격하던 엘피다의 몰락은 2010년 시작된 반도체 업계의 ‘2차 치킨게임’이 끝났음을 알리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본래 치킨게임은 서로 마주보고 달리다 먼저 핸들을 꺾는 사람이 패하는 자동차 충돌 게임이다. 반도체 업계에서는 가격이 폭락해 원가 이하로 팔면서도 누군가 먼저 손을 들고 나가기를 기다리면서 버티는 상황을 가리킨다. 이번에는 목숨을 건 버티기에서 엘피다가 먼저 나가떨어졌다.


무너진 엘피다…부활하는 SK하이닉스
반면 한국 업체들은 축제 분위기다. 치킨게임에서 승자가 챙기는 과실은 엄청나다. 주요 업체 한두 곳만 쓰러져도 금방 공급 부족으로 가격이 폭등해 그간 쌓인 손해를 순식간에 만회할 수 있는 게 이 업계의 특성이다. 엘피다의 역사가 종지부를 찍기 불과 한 주 전인 7월 26일 삼성전자는 사상 최대 분기 실적을 내놓았다. 반도체의 약진이 스마트폰 부진을 만회했다. 삼성전자는 2분기 반도체에서 매출 8조6800억 원, 영업이익 1조7600억 원을 기록했다. 작년 같은 기간에 견줘 매출은 1% 늘어나는데 그쳤지만 영업이익은 무려 64% 증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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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급 부족으로 인한 반도체 값 급등이 주요인이다. 작년 말 0.83달러였던 D램(DDR3 2Gb 1333Mhz) 가격이 7월 들어 1.58달러대까지 치솟았다. 반도체 가격은 보통 2년이 지나면 반 토막으로 떨어진다. 기술 발전으로 원가는 떨어지고 생산량은 늘기 때문이다. 이런 D램 가격이 7개월간 두 배 가까이 뛴 것이다. 요즘 세계시장에서는 D램 품귀 현상이 빚어지고 있다. 스마트폰과 태블릿 PC에 들어가는 모바일 D램은 없어서 못 판다는 말이 나온다. 스마트폰 시장이 급성장하는 중국에서 모바일 D램을 빨아들이고 있다. 중국은 일반 PC용 D램 가격도 끌어올린다. 저가 태블릿 PC를 만드는 중국 업체들이 고가의 모바일 D램 대신 싼 PC용 D램을 쓰기 때문이다.

올 2분기 반도체 어닝 쇼크의 진짜 주인공은 SK하이닉스다. 삼성전자는 반도체 사업의 40%를 차지하는 시스템 LSI의 부진으로 김이 빠졌지만 메모리만 생산하는 SK하이닉스는 승자의 혜택을 고스란히 누렸다. SK하이닉스는 2분기에 회사가 생긴 이후 가장 많은 1조1140억 원을 영업이익으로 벌어들였다. 전 분기(3170억 원)에 견줘 251%, 작년 같은 기간(50억 원)에 견줘 2만1123% 불어난 수치다. 더 놀라운 것은 영업이익률이다. SK하이닉스는 이익률 28.3%로 업계 1위인 삼성전자(20.3%)를 앞지르는 기염을 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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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업체는 경쟁사들이 주목하지 못한 PC용 D램 가격이 크게 올라 특수를 누렸다. 최근 D램 시장의 주인공은 스마트폰이나 태블릿 PC에 들어가는 모바일 D램이다. 기존 PC용 D램보다 작고 가벼운 데다 전력을 적게 소모하는 게 특징이다. PC에서 모바일로의 이동은 정보기술(IT) 업계의 메가트렌드다. D램 업체들도 이에 발맞춰 PC용 D램 생산 라인을 모바일 D램용으로 공격적으로 전환했다.

이들이 모바일 D램으로 한꺼번에 쏠리면서 PC용 D램에서 공급 부족이 발생한 것이다. ‘전략적으로’ PC용 D램 부문을 유지해 온 SK하이닉스가 뜻밖의 횡재를 한 셈이다. 시장조사 업체인 아이서플라이에 따르면 지난 1분기 기준으로 전체 D램 중 모바일 D램 비중은 삼성전자가 42%, 엘피다가 35%, SK하이닉스가 24%를 기록했다. 업계는 SK하이닉스가 골칫거리였던 PC용 D램 재고를 높은 가격에 처분했을 것으로 분석한다.

천문학적 적자에 신음하던 SK하이닉스에 2분기의 대반전은 짜릿할 수밖에 없다. 1999년 ‘빅딜’ 소용돌이 속에 현대전자와 LG반도체가 합쳐 탄생한 SK하이닉스의 역사는 가시밭길의 연속이었다. 특히 반도체 업계에서 ‘1차 치킨게임’이 불붙은 2007년 연말은 냉혹했다. 세계 반도체 시장은 수요 위축과 가격 급락으로 가파른 하강 곡선을 그렸고 SK하이닉스는 그해 연말 임원 30%를 감원하고 근속 10년 이상 직원을 대상으로 희망퇴직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지난해 11년 만에 새 주인을 찾아 SK그룹에 편입된데 이어 반도체 시장까지 살아나면서 상황이 역전됐다.
<YONHAP PHOTO-1523> NEW YORK, NY - MARCH 14: People interact with the Samsung Galaxy S IV, March 14, 2013 in New York City. Samsung, the world's largest handset maker, revealed their successor to the Galaxy S III. The Galaxy S IV features a five-inch 1080p screen, a 1.9GHz quad-core processor, a 13-megapixel rear camera and ships with the latest Android version, Jelly Bean.   Allison Joyce/Getty Images/AFP== FOR NEWSPAPERS, INTERNET, TELCOS & TELEVISION USE ONLY ==../2013-03-15 09:3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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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 YORK, NY - MARCH 14: People interact with the Samsung Galaxy S IV, March 14, 2013 in New York City. Samsung, the world's largest handset maker, revealed their successor to the Galaxy S III. The Galaxy S IV features a five-inch 1080p screen, a 1.9GHz quad-core processor, a 13-megapixel rear camera and ships with the latest Android version, Jelly Bean. Allison Joyce/Getty Images/AFP== FOR NEWSPAPERS, INTERNET, TELCOS & TELEVISION USE ONLY ==../2013-03-15 09:35:22/
2분기 실적 발표 이후 반도체에 대한 관심이 폭발하고 있다. ‘제2의 반도체 호황이 시작됐다’는 헤드라인이 언론을 장식하고 있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최근 4~5년 동안 요즘처럼 반도체 기사가 많이 쏟아진 적이 없다”고 말했다. 시장 분석가들은 반도체 시장의 ‘호황’이 적어도 2~3년 계속 이어질 것이라는 데 대체로 동의한다. 두 차례 치킨게임을 거치면서 시장이 과점 체제로 재편됐기 때문에 업체들이 무리한 출혈경쟁보다 이익을 적정 수준으로 관리하는 쪽을 선택할 것이라는 분석이다. 현재 D램은 3개 업체(삼성전자·SK하이닉스·마이크론), 낸드플래시 메모리는 사실상 4개 업체(삼성전자·도시바·SK하이닉스·마이크론)만 남았다.
<YONHAP PHOTO-0272> Elpida Memory Inc. President Yukio Sakamoto bows at the start of a news conference at the Tokyo Stock Exchange, in this file photo taken February 27, 2012. Once-dominant Japanese firms have been battered by rising costs and the investment clout of Samsung and Chang's Taiwan Semiconductor Manufacturing (TSMC). The Japanese have the technology, but the likes of Elpida Memory, a maker of DRAM memory chips for computers, and Renesas Electronics Corp, the world's leading maker of microcontroller chips for automobiles, just don't have the money to plough into the constant plant and technology upgrades. The world's top foundries are Taiwanese: TSMC and United Microelectronics (UMC). TSMC had revenue last year of $14.5 billion and a 49 percent market share, about four times the size of UMC, according to industry researcher Gartner. Then come GlobalFoundries, the former manufacturing arm of Advanced Micro Devices (AMD), which is backed by the Abu Dhabi sovereign fund and had revenue last year of $3.58 billion, China's SMIC and Israel's Towerjazz.    REUTERS/Issei Kato/Files (JAPAN - Tags: SCIENCE TECHNOLOGY BUSINESS)/2012-06-04 07:3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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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램은 호황과 불황의 사이클이 뚜렷한 대표적인 산업이다. 한때 30개에 달하던 D램 업체들이 이 과정을 거치면서 하나둘 떨어져 나갔다. 2004~2006년은 D램 업체들이 그리워하는 장기 호황기였다. 글로벌 금융 위기가 터진 2007~2009년 D램 가격이 곤두박질치며 피 말리는 힘겨루기가 시작됐다. 이 1차 치킨게임은 독일 키몬다 파산과 D램 업계의 전면적인 감산으로 마무리됐다. 두 번째 악몽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2010년 말부터 D램 가격이 또 한 번 폭락세로 돌변했기 때문이다. 애플 아이폰발 모바일 혁명에 밀려 PC 시장이 침체에 빠지면서 D램 수요가 급감했다. 2010년 9월 4.34달러였던 2기가바이트(2GB) 제품이 2011년 말 0.88달러까지 떨어졌다. 5분의 1로 주저앉은 셈이다. 2차 치킨 게임의 희생자는 마이크론에 인수된 엘피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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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은 2차 치킨게임 이후의 구도다. 상당수의 전문가들이 2004~2005년에 버금가는 ‘제2의 장기 호황’을 예고한다. 하지만 2010년 초처럼 ‘반짝 호황’으로 끝날 것이라는 시각도 없지 않다.


‘3분기가 정점’외국계 보고서 파장
지난 7월 29일 미국계 증권사 모건스탠리에서 나오는 반도체 보고서가 대표적인 경우다. 숀 김 모건스탠리 반도체담당 애널리스트는 “메모리 칩 가격이 조만간 고점에 달해 향후 이익이 줄어들 것”이라며 삼성전자에 대한 투자 의견을 ‘비중 확대’에서 ‘보유’로, SK하이닉스는 ‘비중 확대’에서 ‘비중 축소’로 하향 조정했다. 앞서 모건스탠리는 도시바와 마이크론도 ‘보유’ 의견을 제시한 바 있다. 한마디로 메모리 반도체 업계의 전망이 비관적이라는 뜻이다.

숀 김 애널리스트는 D램의 매출 성장률과 평균 판매 단가(ASP), 운영 이익이 3분기에 정점을 찍을 것이라고 예상하다. 그 뒤 기다리는 것은 하락 사이클이다. 그는 “2014년 D램 가격은 6%, 낸드 플래시는 9% 하락할 것”이라며 반도체 업체들의 수익성 위기를 우려한다.

흥미로운 것은 그 이유다. 숀 김 애널리스트는 반도체 업체들이 상당 기간 증설 경쟁보다 ‘평화 공존’을 선택할 것이라는 주류 시장 분석가들의 가정에 의문을 제기한다. 공급 부족으로 몇몇 기업들이 엄청난 초과 수익을 쓸어 담고 있는 상황에서 나머지 업체들이 언제까지나 손을 놓고 있지는 않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그는 “2010년과 유사한 상황”이라며 “역사적으로 이러한 업계 환경은 이듬해 더 많은 투자를 가져온다”고 지적했다. 이번만을 예외라고 볼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이미 업계에서는 새로운 설비투자 계획이 발표되거나 투자 일정이 앞당겨지고 있다. 삼성전자는 2분기 실적을 공개하며 13조 원 규모의 반도체 투자 계획을 함께 내놓았다. 숀 김 애널리스트는 삼성전자가 시스템 반도체 라인을 D램 라인으로 전환했다며 이를 통해 6.7%(월 2만5000장)의 증설 효과가 나온다고 지적했다. 이 회사가 중국 시안에 짓고 있는 낸드플래시 공장도 2014년 양산을 시작한다. SK하이닉스도 청주 M12 낸드플래시 라인을 확장 중이다.

대만 이노테라도 올해 설비투자 금액을 1682억 원에서 2990억 원으로 올려 잡았다. 엘피다는 히로시마 공장에서 월 12만 장 규모의 모바일 D램 증설을 계획 중이다. 도시바는 300억 엔을 투입해 요카이치 공장에 신규 낸드 플래시 라인을 지을 계획이다. 이 공장 5동 2단계 공사도 8월에 착공한다. 마이크론 역시 싱가포르 공장의 6만 장 규모의 D램 라인을 낸드플래시 라인으로 전환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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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건스탠리 보고서는 반도체 대호황을 기대하던 주식시장에 찬물을 끼얹었다. 즉각 반대 의견을 가진 애널리스트들의 반박이 쏟아졌다. 김성인 키움증권 상무는 “설비 경쟁이 시작됐다고 하는데 동의할 수 없다”고 말했다. 메모리 반도체 라인을 새로 짓는데 6조~7조 원 정도가 들어간다. 공장 건물과 반도체 장비를 모두 포함한 금액이다. 반도체는 대표적 장치산업 중 하나다. 상상을 초월하는 고가 장비들을 들여놓아야 한다. 김 상무는 “현재 신규 설비투자에 나설 수 있는 업체는 삼성전자 외에는 없다”고 말했다. 도시바의 300억 엔 투자는 공정 미세화를 위한 보완 투자 수준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는 삼성전자가 내놓은 13조 원 투자 계획도 ‘립서비스’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구체적인 투자 시기나 D램과 낸드플래시 투자 비중, 중국 시안 투자 포함 여부 등 모호한 내용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김 상무는 “더이상 치킨게임은 없다”며 “삼성전자를 제외한 업체들에는 보완 투자를 통한 생산성 제고가 훨씬 현실적”이라고 말했다.

또 하나의 중요한 쟁점은 미세 공정의 한계를 둘러싼 논쟁이다. 숀 김 애널리스트는 반도체 미세 공정의 한계 등으로 이번에는 과거와 같은 무리한 증설과 가격 하락이 없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이는 착각이라고 지적한다.


무너진 ‘무어의 법칙’… 새판 짜일 수도
지난 40여 년간 반도체 산업은 1년 6개월마다 칩의 집적도가 두 배로 증가한다는 ‘무어의 법칙’이 지배해 왔다. 삼성전자 등 선두 업체들은 무어의 법칙을 충족시키며 강력한 원가 경쟁력으로 경쟁사들을 따돌렸다. 집적도가 올라가면 같은 크기의 반도체 웨이퍼에서 더 많은 칩을 생산할 수 있게 된다. 매년 시장 가격의 급격히 하락 속에서도 선두 업체들이 막대한 수익을 올릴 수 있었던 비밀이 여기에 있다.

그런데 반도체 미세 공정이 한계에 도달했다는 신호가 갈수록 뚜렷해지고 있다. 김성인 상무는 “2012년 20나노미터(nm)에 진입하면서부터 40년 동안 유지된 무어의 법칙이 깨졌다”고 말했다. 반도체 회로 선폭이 20nm대에 도달하면서부터 기술 진전 속도가 확연히 떨어졌다. 학계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2012년께 공정 미세화가 물리적 한계에 봉착할 것이라고 예측해 왔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위기론을 설파하며 신수종 사업 발굴에 골몰한 것도 이를 염두에 둔 것이라는 해석이 적지 않다.

반도체 집적 기술의 핵심은 ‘리소그래피’라고 불리는 전자회로를 실리콘 웨이퍼에 그리는 공정이다. 빛을 이용해 보다 얇은 두께의 전자회로를 그리지 못하면 반도체 집적은 시작도 할 수 없다. 그동안 이 공정에 쓰는 반도체 노광 장비의 빛 파장은 발전을 거듭해 왔다. 현재 10~30nm대 반도체 제조 공정에서 사용되는 노광 장비는 193nm 레이저 파장의 불화아르곤(ArF)에서 발전한 이머전 ArF다. 이머전 ArF는 렌즈에 물을 넣어 빛 굴절률을 높이고 파장을 줄인 방식이다. 하지만 이 장비로 그려 넣을 수 있는 물리적 회로 선폭의 한계치는 38nm에 그친다. 반도체 업체들은 이머전 ArF로 회로 패턴을 두 번에 나눠 형성시키는 더블 패터닝 기술을 통해 30nm와 20nm대 선폭을 구현하고 있다. 문제는 공정 수가 늘어나면서 원가 측면에서 부정적이라는 점이다.

유력한 대안 기술은 파장이 13.5nm인 극자외선(EUV)이다. 네덜란드의 반도체 장비 업체인 ASML에서 이를 개발하고 있다. 그런데 업계의 기대를 모으고 있는 이 업체의 EUV 노광 장비의 양산 배치가 계속 지연되고 있다. 일부에서는 향후 2년 내에 상용화되기 어려울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도 나온다.

어쨌든 세계 반도체 업계가 미증유의 변곡점을 맞고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변화는 항상 희생자를 남긴다.


장승규 기자 skj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