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인민은행 - 저우샤오촨 총재

올해 초 세계금융계가 술렁였다. 중국 인민은행 신임 총재 하마평이 돌던 때 저우샤오촨(周小川) 총재의 유임설이 나온 때문이다.

저우 총재는 벤 버냉키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ed) 의장을 제치고 세계 100대 사상가 4위(미국 외교 전문지 포린폴리시 2010년 조사)에 올랐던 인물이다.
[SUPER MOUTH] 3번째 연임…위안 국제화·금융 개혁 ‘적임’
저우 총재는 올해 65세로 장관급 공무원 퇴직 연령(공산당 최고 지도부는 70세)에 걸렸다. 2003년 후진타오 국가주석 체제 출범 때 발탁돼 10년간 중앙은행장을 역임해 온 인사가 시진핑 국가주석 중심의 새 지도부 출범에 맞춰 물러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인사로 비쳐졌다. 이례적인 저우 총재의 유임설은 3월 전인대(국회)에서 현실이 됐다.

저우 총재는 유임과 함께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정협: 정치 자문 기구) 부주석에도 올랐다. 인민은행 총재가 장관급에서 사실상 부총리급으로 격상된 것이라는 해석이 흘러나왔다. 금융의 주무 부처 수장이랄 수 있는 인민은행 총재에 힘을 실어줘 중국 성장 모델 전환의 핵심인 금융 개혁에 박차를 가하겠다는 의지로 읽혀졌다.

중국이 상업은행과 정책은행의 분리 등 금융 개혁을 본격화했던 1990년대 중반 당시 주룽지를 부총리 겸 인민은행 총재로 발탁한 때를 떠올리게 한다.

저우는 왕치산 정치국 상무위원 등과 함께 금융계의 ‘주룽지 사단’으로 분류된다. 주룽지는 인민은행 총재 때 중국은행 부행장이던 저우샤오촨을 눈여겨본 뒤 인민은행 총재에서 물러나던 해 저우를 인민은행 산하 국가외환관리국장으로 끌어올리는 등 금융 행정가로 키웠다.

저우 총재는 중국 각료 중에서도 개혁 성향이 강한 인물로 꼽힌다. 덩샤오핑이 개혁·개방을 시작한 1979년부터 경제 체제 개혁의 정책 영향 연구를 시작으로 정부의 경제 개혁 최일선에서 일해 왔다. 1990년대부터 금융계로 옮긴 뒤에도 그의 개혁 행보는 계속됐다. 증권감독관리위원회 주석 시절 기업공개(IPO) 제도를 엄격한 인허가제에서 심사제로 완화하고 2005년엔 인민은행 총재로 사실상의 고정환율제를 복수 바스켓 기준의 변동환율제로 바꾸기도 했다. 올 들어선 대출금리 하한선을 폐지하는 등 금리 자유화에도 속도를 내고 있다.

국제금융계에서는 그를 ‘미스터 위안(Yuan)’으로 부른다. 위안화 환율 및 국제화 개혁을 주도하며 글로벌 통화 체제 개혁의 전도사로 나서고 있어서다.

미국발 금융 위기를 진정시키기 위한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를 앞둔 2009년 초 그는 인민은행 웹사이트에 ‘국제통화 개혁에 대한 생각’이란 글을 올렸다. “국제통화기금(IMF)의 특별인출권(SDR) 역할을 확대해 달러를 대체하는 슈퍼 기축통화로 활용하자”는 제안이었다. 그간 달러가 세상을 지배해 온 팍스 달러리움에 종언을 고하는 ‘선전포고’였다. 이처럼 저우 총재의 개혁은 실물경제 지원이라는 금융 본연의 기능을 살리고 중국을 금융 대국으로 이끄는 데 방점이 찍혀 있다.

저우 총재는 학자 스타일이다. 국제회의나 기자회견 때 학술적인 시각을 자주 보인다. 학부는 이공계를 전공했지만 일하면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중국의 11번째 인민은행장으로, 첫 박사 출신 인민은행 총재다. 칭화대의 박사생 지도 교수를 겸직하고 있기도 하다. 국내외 학술지에 100여 편의 논문을 실은 그는 인민은행 웹사이트에 장문의 글을 올리기도 한다. 저우 총재가 쓴 논문 가운데 ‘기업과 은행 관계의 재건’과 ‘사회보장: 체제 개혁과 정책 건의’는 중국 경제학계의 최고 논문상이라는 ‘쑨예팡 경제과학논문상’을 1994년과 1997년에 각각 수상했다.

혁명 원로인 저우젠난(周建南) 전 기계공업부 부장(장관)의 차남으로, 태자당(太子黨: 혁명 원로나 고위 관료의 자제)으로 분류된다.


베이징 = 오광진 한국경제 국제부 기자 kjo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