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한 용서는 스스로의 ‘에고(ego)’를 철저하게 죽일 때 가능해

[문화심리학으로 풀어보는 삼국지] 과오는 인간의 것, 용서는 신의 것
내게 상처 준 사람을 용서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우리는 경험으로 잘 안다. 중국 선종의 창시자인 달마대사는 이런 말을 했다. “사람의 마음은 참으로 알 수 없구나. 너그러울 땐 온 천하를 품을 듯하더니 옹졸해지니 바늘 하나 꽂을 자리가 없구나!”

베르디의 오페라 ‘아이다’는 조국과 사랑 사이에서 방황하는 연인들의 비극을 다룬 작품이다. 이집트에 전쟁 포로로 잡혀 와 있는 에티오피아 공주 아이다. 그녀가 이집트 장군 라마데스와 사랑에 빠지면서 비극은 시작된다. 에티오피아 정벌에 나서는 라마데스의 승전을 기원할 것인가, 연인의 죽음을 뜻하는 에티오피아의 승리를 기원할 것인가. 사랑 때문에 나라를 배신하려는 두 사람을 그들 각자의 조국은 절대로 용서하지 않는다.

하지만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넬슨 만델라 전 대통령처럼 피부색이 다르다고 사람을 차별하고 그런 사실을 따진다는 이유로 자신을 평생 감옥에서 썩게 만든 사람을 용서한 사람도 있다.


잘못 알면서도 용서해야 완전한 용서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데모폰은 그리스의 용사다. 그는 트로이 전쟁을 승리로 이끈 주인공이다. 데모폰은 트라키아성에 체류하던 중 현지의 필리스 공주와 사랑에 빠진다. 공주와 결혼을 약속한 데모폰은 아테네에 가서 일을 보고 한 달 후 돌아오겠다고 약속하고 떠난다. 그러나 해가 바뀌어도 돌아오지 않는 데모폰을 기다리다 지친 필리스는 자살하고 만다. 이를 가엾게 여긴 여신들이 필리스를 아몬드나무로 변화시킨다. 하지만 상심한 공주의 나무에는 잎도 나지 않고 꽃도 피지 않는다. 뒤늦게 달려온 데모폰이 나무를 껴안고 회한의 눈물을 흘리며 대성통곡하자 잎이 나고 꽃이 피었다. 아몬드나무는 연인의 사랑을 확인한 필리스 공주의 용서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알다시피 기독교는 용서와 사랑의 종교다. 남의 잘못을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며 무조건적인 용서와 사랑을 역설했던 예수 그리스도. 그는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가면서도 하나님께 자신을 박해하는 자를 용서해 달라는 기도를 올린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소서. 저들은 자기들이 무얼 하고 있는지조차 모릅니다.”
자신에게 해를 주고 상처를 준 사람을 용서하려면 자신의 에고(ego)를 철저히 죽이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과오는 인간의 것, 용서는 하나님의 것’이라는 말도 그래서 나왔을 것이다. ‘완전한 용서’의 저자 R.T. 켄달은 완전한 용서를 이렇게 말한다.

▷잘못을 알면서도 용서하는 것 ▷처벌을 받지 않도록 하는 것 ▷잘못을 여기저기 말하지 않는 것 ▷마음속에 원한이 없고 복수를 바라지 않는 것 등이다. 켄달이 말하는 완전한 용서는 타인을 전적으로 용서하고 이런 상황을 만든 하늘(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자기 자신까지 완전히 용서하는 것을 말하는 것 같다.

오나라 손책은 병상에서 죽음을 앞두고 손권에게 유언한다. “안의 일은 장소에게 묻고 밖의 일은 주유에게 물어라.”

그러나 젊은 주유가 군사를 통솔하는 도독의 자리에 오르자 내심 승복하지 않은 이들이 있었다. 적벽대전을 앞두고 주유가 병사들을 지휘하기 위해 나왔다. 백전노장 정보가 병을 핑계로 연병장에 나오지 않았다.

“주유 같은 애송이가 어찌 군통수권을 가진단 말인가. 네가 대신 나가 보아라!”
정보는 자신의 아들을 대신 내보냈다. 그러나 주유가 군사들을 훈련하는 걸 여러 차례 지켜본 정보는 주유에게 잘못했다고 사과한다. 주유 역시 사정을 이해하고 정보를 군령에 따라 처벌하지 않고 용서해 줬다.

‘삼국지’에는 위와 같은 소소한 잘못과 용서를 다룬 에피소드가 제법 있지만 그 사람의 도량과 인품을 짐작하게 하는 좋은 사례는 뜻밖에도 ‘난세의 간웅‘으로 불렸던 조조가 싹쓸이(?)하고 있다. ’삼국지‘ 초반부 군웅할거의 시대에 천하 대세를 가른 가장 큰 전투 중 하나가 관도대전이다. 관도대전은 80만 대군의 원소가 8만에 불과한 조조 군대에 선공을 가하면서 시작됐다. 그러나 원소는 탁월한 전략과 용인술을 가진 조조와 비교 자체가 불가능한 형편없는 리더십의 소유자였다. 10배가 넘는 병력을 가지고도 조조 군대에게 참패를당한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아들 죽인 원수까지 용서했던 조조
관도대전이 끝난 후 원소의 진영을 점령하고 조사하던 조조 군대는 한 무더기의 편지 다발을 발견한다. 전부 조조의 부하들이 원소에게 투항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내통한 자들을 색출해 엄히 다스림이 가한 줄 아뢰옵니다!” 조조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원소의 군대가 막강할 때는 나도 무척 두려웠다. 나 스스로를 지킬 자신이 없었다. 하물며 저들이야 오죽했겠느냐. 편지를 불태우고 더 이상 거론하지 말라.”

이것이 비밀 편지를 불태운 분소밀신(焚燒密信) 사건이다. 간첩죄나 역적죄로 처단할 수도 있는 자들까지 용서한 것이다. 또한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완성전투에서 조조는 큰아들 조앙과 조카 조안민 그리고 맹장 전위 등을 잃는다. 사랑하는 장자까지 죽는 뼈아픈 패배를 안긴 주인공은 원소 군대의 장소였다. 그러나 훗날 장소가 투항했을 때 조조는 장소의 죄를 묻지 않고 크게 중용했다. 용서 받은 장소가 분골쇄신, 조조의 북방 통일에 헌신한 것은 불문가지다.

역시 원소 휘하에 있던 참모 중에 진림이란 자가 있었다. 진림은 건안칠자(建安七子) 중 한 사람으로 불리던 이름난 문장가였다. 진림은 조조를 토벌하자는 내용의 격문을 쓴 주동자다. 문제는 격문을 쓰면서 조조의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환관 출신인 것을 거론하는 등 조조가 가장 민감해하는 출신 성분 콤플렉스를 건드렸다는 것이다. 원소가 망하고 포로로 잡혀 온 진림에게 조조가 물었다.

“자네는 격문을 쓰면서 굳이 내 조상들까지 들먹일 것은 뭔가? 허허허.”
조조는 진림의 과거를 용서하고 그를 최측근 비서에 임명했다. 조조가 이처럼 지난날의 허물을 용서하고 인재를 중용한다는 소문이 나자 천하의 인재들이 조조 휘하에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나관중이 묘사한 ‘난세의 간웅’과는 분명 거리가 있는 조조의 영웅적 기개와 호방함을 엿볼 수 있다.


사족. 지난번 러시아 소치에서 열린 동계 올림픽에서는 피겨 여왕 김연아와 함께 8년 만에 금메달을 획득한 러시아 국적의 빅토르안(안현수) 선수가 단연 주목 받았다. 안 선수는 한국빙상연맹의 가당찮은 독재와 전횡 그리고 한국 빙상계 파벌주의의 희생양이었다. 오죽했으면 한국 국적을 버리고 러시아로 귀화했겠는가. 그것은 귀화가 아니라 스포츠 망명이나 진배없다.

안현수 선수의 아버지는 태극기가 아니라 러시아 국기를 달고 금메달을 딴 아들을 보면서 눈물을 펑펑 쏟았다. “저는 다 잊었어요. 다 용서했어요. 우리 현수를 버린 사람 덕분에 현수가 잘됐잖아요. 이제는 오히려 그들에게 감사해요!” 안현수, 아니 빅토르안의 아버지는 켄달 박사의 ‘완전한 용서’를 몸소 실천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들을 죽인 원수를 용서했던 맹덕(조조)처럼, 실연의 상처로 자살했지만 결국에는 연인을 용서한 필리스 공주처럼 말이다.
김진국 칼럼니스트, ‘재벌총수는 왜 폐암에 잘 걸릴까?’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