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 화주 해운사 인수 허용…현대글로비스·포스코 등 진출 가능성

‘세계 5위’를 자랑하던 해운 강국의 위상이 침몰하고 있다. 최근 4~5년간 180여 개 해운 업체 중 70여 개가 문을 닫았고 12개사는 법정 관리를 신청했다. 1, 2위 업체인 한진해운과 현대상선은 나란히 유동성 위기로 알토란같은 자산을 내다 팔고 있고 3위인 팬오션은 법정 관리에 들어갔다. 정부가 내놓은 ‘M&A 활성화 방안’으로 대형 화주가 해운사를 인수하면 좀 나아질까 싶었지만 올 8월부터 운항에 나설 글로벌 빅 3와의 버거운 싸움이 기다리고 있어 안심할 겨를이 없다. 늪에 빠진 해운업의 위기를 진단해 본다.
[SPECIAL REPORT] 표류하는 해운업, M&A 활성화로 부활하나
글로벌 해운 경기를 감지하는 벌크선 운임지수(BDI)는 점차 회복세를 타고 있다. 이에 발맞춰 세계 1~3위 해운 업체인 머스크(덴마크)와 MSC(스위스), CMA-CGM(프랑스) 등은 지난해부터 적극적으로 신조선 발주에 나서며 업황 개선을 대비하고 있다. 이 훈풍은 한국만 비켜 간 모양이다. 국내 해운사들은 몇 년간 이어져 온 불황에 돈줄이 말라 선박을 처분하고 있다. 이뿐인가. 컨테이너는 물론 터미널 지분 매각에도 나서고 있다. 해운 얼라이언스(동맹) 강화에 운임도 인상하며 불황을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다. 사정이 이러니 신규 투자는 말할 것도 없다. 한진해운과 현대상선은 지난해에 이어 올 들어서도 단 한 척의 신조 컨테이너선을 발주하지 못하고 있다.


일본 선사에 2조 원 퍼준 한국전력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답은 2004년부터 약 10년간 이뤄진 ‘한국전력과 일본 선사의 장기 운송 계약’에서 찾을 수 있다.

2조 원. 한국전력과 일본 선사가 맺은 장기 운송 계약으로 일본으로 넘어간 부의 수치다. 업계 관계자들은 “2조 원에 달하는 계약이 국내 선사와 체결됐더라면 지금의 재정난은 덜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한국전력-일본 선사 간 장기 운송 계약건은 이렇다. 한국전력의 산하 5개 발전사(중부·남부·남동·동서·서부발전)는 2004년부터 2012년까지 약 10년간 일본 선사인 NYK벌크십코리아를 입찰에 참여시켜 총 18척의 장기 운송 계약을 체결했다. NYK벌크십코리아는 일본의 3대 선사인 일본유센(NYK)·K-LINE·미쓰이상선(MOL)이 국내에 설립한 일본계 해운사다. 이 계약으로 5개 발전사는 연간 수입 물량의 25%인 1653만 톤을 일본 해운사에 넘겼다. 이를 통해 일본 해운사는 연매출 약 1933억 원(1억8000만 달러), 계약 기간 총매출 약 2조1445억 원(20억607만 달러)의 수익을 거뒀다.

한국선주협회는 관계자는 “국내 공기업이 단기 실적에 급급해 일본 해운 선사에 장기 수송권을 개방하는 것은 해운 산업의 기반을 뒤흔든 무책임한 처사”라고 비판했다. 5개 발전사들의 입장은 이렇다. 국내 입찰 참가 자격이 ‘국내 외항 운송 면허’ 보유 선사인 만큼 그 기준을 충족시키는 선사들을 입찰에서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공기업이더라도 적자가 심해지고 있는 만큼 단가를 낮추기 위해 가격을 낮게 내는 선사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는 게 그들의 항변이었다. 일본 해운사가 한국 선사보다 입찰 가격을 낮게 책정할 수 있었던 데는 정부의 도움이 컸다. 초저금리와 빠른 선가 상환 등으로 쉽게 비용 부담을 덜었기 때문이다.

이장균 현대경제연구원 해운물류연구센터장·수석연구원은 “당시 한국 선사들은 신규 발주한 선박 투자 대금 지급도, 다른 해운사에 비싼 돈을 주고 빌려온 대선료도 제대로 치르지 못할 지경이었다”며 “그런 와중에 줄줄이 이어지는 한전과 일본사와의 계약은 엎친 데 덮친 격이고 이는 고스란히 한국 해운 업계를 위기에 빠뜨리게 했다”고 지적했다.


“돈 되는 건 다 판다”…위기 이후 대안은?
이후 국내 해운 업계는 국적 선사 보호를 위한 법적인 조치를 원하는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정부는 뒤늦게 ‘대량 화물 운송권의 해외 유출 문제에 관해 법령 개정’을 마련, 2013년 3월 19일부터 시행 중이다. 법률안은 그간 해외 선사에 넘어갔던 한국 대량 화물의 장기 운송권 입찰 시 한국 국적의 선사만 참가할 수 있다는 것이 골자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불황의 골은 점점 깊어져 갔다. 유동성 위기를 맞은 해운사들은 특단의 조치로 자산을 매각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여기서 또 지적된다. 급전이 필요해 높은 마진이 보장된 것부터 팔다 보니 해운사의 핵심 사업부를 매물로 내놓은 것이다.

한진해운이 벌크선(원자재·곡물운반선) 전용선을 매각한 게 대표적이다. 한진해운은 지난해 말 벌크선 전용 사업부를 매각하기로 결정하고 우선협상대상자로 사모 펀드인 한앤컴퍼니를 선정했다. 이를 위해 한국벌크해운이라는 자회사를 설립하고 벌크 전용선 부문(전용선 29척, LNG선 7척)을 양도할 계획이다. 한진해운은 이 거래로 1조4000억 원의 선박금융 및 금융 부채를 이관하고 3000억 원의 현금 유동성을 마련했다. 급한 불은 껐지만 향후 한진해운의 수익 기반의 안정은 ‘글쎄’다. 한진해운이 떼어놓은 벌크선 전용선은 장기 계약으로 꾸준히 이익이 발생하는 안정적인 사업이다. BDI가 점차 회복되고 있는 와중에 이 사업을 떼어냈다는 것은 ‘수익 기반의 침식’을 자초했다고 볼 수 있다. 현대상선이 사모 펀드인 IMM인베스트에 장기 계약으로 꾸준히 이익을 내던 액화천연가스(LNG) 운송 사업 부문을 1조1000억 원에 팔기로 한 것 역시 마찬가지다.
[SPECIAL REPORT] 표류하는 해운업, M&A 활성화로 부활하나
해운 업계 고위 관계자는 “팔고 싶어 팔았을 리 없지만 본업의 경쟁력을 훼손할 수 있는 자산 매각은 재고할 필요가 있다”며 “이제 수익 구조가 컨테이너선에만 집중돼 오히려 리스크가 커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어 “업황이 되살아난다고 해도 2류 업체로 전락할 가능성이 높다”는 말도 남겼다. 해운사가 통째 매물로 나온 곳도 수두룩하다. 2005년 이후 해운·조선업 호황기를 타고 우후죽순 생겨났던 중소해운사들이 불황과 함께 매각을 피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정부는 최근 이들 해운사의 새 주인을 찾아주는 일에 앞장섰다. 지난 3월 6일 ‘원유·제철원료·액화가스·발전용 석탄 등 대량 화물 화주가 구조조정 중인 해운사를 인수할 수 있도록 한다’는 내용을 담은 ‘M&A 활성화 방안’을 발표했다. 선주와 화주의 상생 협력 등을 고려해 자기 화물 운송을 30% 이내로 제한하는 조건을 달긴 했지만 사실상 화주의 해운업 진출에 물꼬를 터주고 구조조정 중인 해운사의 정상화를 위한 결정이다. 이 같은 정부의 방침에 따라 그간 해운업에 관심을 보여 온 포스코·현대제철·GS칼텍스·SK에너지·S-Oil 등의 대기업 화주는 물론 한국전력 계열 발전사와 한국가스공사 등의 해운업 진출 여부에 관심이 쏟아지고 있다.


“해운업 신규 진출 경쟁력 없다” 회의론도
특히 국내 1위의 벌크선사인 팬오션 인수전에 대형 화주들이 대거 뛰어들 것이라는 예상이 많이 나온다. 팬오션은 여전히 벌크선을 중심으로 대형 화주들과 장기 운송 계약을 다수 맺고 있어 경기가 회복되고 물동량이 늘어나면 언제든지 수익을 낼 수 있는 기업으로 꼽히고 있기 때문이다. 그간 대형 화주의 해운업 진출에 반대 입장을 보이던 해양수산부가 찬성 쪽으로 입장을 선회한 것도 팬오션의 매각을 염두에 둔 것이란 관측도 있다. 팬오션 매각 금액은 최소 6000억~7000억 원으로, 대기업이 인수하지 않으면 해외로 넘어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해수부 관계자는 “팬오션 등 우수한 영업력을 가진 세계적 벌크선사가 해외로 팔려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불가피하게 대형 화주의 해운사 인수 길을 터주게 됐다”고 설명했다.

2자물류 회사지만 벌크선 분야를 강화하고 있는 현대글로비스와 팬오션의 짝짓기 구도를 예상하는 시각도 있다. 현대글로비스는 최근 들어 비(非)자동차 물류와 상사 업무를 강화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팬오션을 비롯한 STX그룹 인력을 대거 영입하고 선박을 사들인 배경이 M&A 가능성을 예상케 한다. 포스코는 대우로지스틱스를 통해 해운업에 진출할 가능성이 점쳐진다. 대우로지스틱스는 1999년 옛 대우그룹 물류팀이 분사해 설립된 회사로, 포스코 관련 물량을 주로 운송하고 있다. 대우로지틱스가 포스코와 일하게 된 계기는 포스코 계열사인 대우인터내셔널이 2011년 사모 펀드에 출자하고 이를 통해 대우로지스틱스 지분 20%를 인수하면서부터다. 결국 포스코 역시 대우로지스틱스의 지분을 갖고 있는 셈이다.

대형 화주들은 일단 신중한 반응이다. 포스코 관계자는 “이번 건에 대해 아직 어떠한 의견도 오고간 것은 없다”며 “운송비 절감 차원에서 해운사를 인수하는 큰 투자는 없을 것 같다”며 “새로운 리더(권오준 포스코 회장)의 계획에 맞게 제철 쪽을 더 강화할 예정”이라고 했다. 정유 업계 한 관계자는 “상황을 더 지켜봐야 할 것 같다”며 “정부의 방향이 실효성이 있을지는 의문”이라고 했다. 대형 화주가 아무리 해운 업계에 진입한다고 하더라도 미숙한 업무 역량의 한계로 경쟁력을 갖추지 못할 것이라는 입장도 있다. 해운 업체의 한 고위 임원은 “대형 화주가 해운업에 진출하더라도 첫째, 글로벌 경쟁력이 없고 둘째, 해운업에 대한 노하우도 없는 데다 셋째, 노선 관리 얼라이언스(동맹)에 이런 경쟁력 없는 뉴 페이스는 끼워주지도 않을 뿐더러 넷째, 모기업의 물량만 갖고는 시장에서 경쟁이 어렵기 때문에 걱정은 없다”고 말했다. 이어 “기업이 다양성을 확보하는 것만이 답은 아니다. 중심이 되는 사업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최근 경기선행지수로 통하는 BDI는 지난 3월 7일 전주 대비 285포인트(22.66%) 상승한 1543을 기록했다. 한 달 전인 2월 7일과 비교해 41.43%(452포인트) 상승했다. 반가운 소식이다. 한국선주협회 관계자는 “벌크선을 통해 투입된 원자재가 제품으로 생산되면 컨테이너로 실어 나르게 된다”며 “벌크 시황이 회복되고 있는 만큼 얼마간 시차를 두고 컨테이너 부문도 살아날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시장점유율 40%에 육박하는 글로벌 빅 3 해운사(머스크·MSC·CMA-CGM)가 오는 2분기 중 공동 운항을 시작하기로 해 국내 해운 업계는 초비상이다. 하나씩 상대해도 버거운 마당에 빅 3의 동맹에 대항할 길이 마땅치 않아 보인다. 더욱 더 경쟁이 심화될 글로벌 해운 업계에서 국내 기업의 경쟁력을 강화시키는 게 관건이다.

해운 산업은 국가 경제의 혈관과도 같다. 이에 따라 해운 산업에 문제가 발생하면 국가 경제 전반에 위기가 확산될 것은 자명하다. 중국·덴마크·프랑스 등 세계 여러 나라가 경영난을 겪고 있는 자국 해운 산업 지원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보다 실효성 있는 정부의 정책이 시급한 때다.


돋보기 | 일본 해운 업체에 배운다
장기 계약+원가 경쟁력…성장에 날개 달아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로 초래된 해운 경기의 극심한 불황 지속으로 지금 많은 글로벌 해운 업체들이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유센(NYK)과 미쓰이상선(MOL) 등 일본 해운 업체는 구조조정을 할 만한 심각한 상황이 아니다. 이들 일본 업체는 아직 영업 적자 수준이 미미하고 부채비율에 큰 변동이 없는 실적을 보이고 있다. 왜 그럴까.

이장균 현대경제연구원 해운물류연구센터장·수석연구위원은 “그 배경에는 정책적 뒷받침으로 형성된 석탄·철광석·원유와 같은 전략물자인 대량 화물을 대상으로 한 안정적 이익을 가져다주는 ‘장기 계약 운송 사업’이 있다”고 말한다.

이 연구위원은 지난 3월 3일 ‘일본 해운업체의 안정적 성장 비결’ 보고서를 내며 일본 해운업체를 면밀히 분석했다. 그는 일본 업체의 장기 계약 운송업에서 몇 가지 특징을 발견했다.

“첫째, 장기 운송 선박의 보유 비중이 높습니다. NYK는 2011년 3월 기준으로 3년 이상 장기 수송 계약선 비중이 초대형 원유 운반선(VLCC) 85%, 케이프사이즈선 80%, 파나막스선이 55%에 달합니다. 둘째, 자국 무역 화물을 자국 선사가 운송한 비율인 적취율(積取率)이 높습니다. 지난 20여 년간 일본의 해상 수출입 물동량에서 자국 선사가 수송하는 적취율은 55~65% 수준에 이르죠. 더욱이 전략물자 중 물동량이 많으면서 수입 의존도가 높은 3대 화물 중 철광석과 석탄은 일본 선사의 적취율이 90%, 원유는 80% 수준에 달합니다. 셋째, 안정적인 수입 기반입니다. 일본 선사의 총운임 수입 중에서 자국 화물 운송 비중을 살펴보면, 전략물자 수송을 담당하는 부정기선과 유조선의 경우 부정기선은 2012년 운임 수입의 63%, 유조선은 78%를 자국 화물 운송으로 확보하고 있습니다. 반면 컨테이너선은 23% 수준입니다.”
[SPECIAL REPORT] 표류하는 해운업, M&A 활성화로 부활하나
즉, 일본 해운 업체의 장기 계약 운송 사업은 ‘재무 안정’과 ‘성장’이 주요 원천이다. 우선 화주와 선사를 비롯해 정부 및 조선소 등 자국 관련 기관 간에 공생적 생태계가 형성되면서 선사는 적은 리스크 부담으로 선박을 확충할 수 있다. 그리고 화주가 자사에 등록된 선사들에만 입찰 참여 기회를 주는 지명 입찰 계약 방식을 채택함으로써 일본 선사는 계약 종료 후에도 사업을 지속할 수 있다. 반면 외국 선사의 시장 진입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일본 업체는 현재 경영 계획상에 장기 계약 운송업과 기타 안정된 이익을 갖다주는 사업을 기반으로 이익 목표를 설정, 관리하고 있어요. 그리고 장기 계약 수송업을 통해 획득한 원가 경쟁력을 무기 삼아 외국 해상운송 시장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입니다.”

일본의 해상 수출입 물동량은 2000년부터 2012년 동안 연평균 0% 성장에 그쳤지만 이 기간에 일본 선사의 삼국 간 수송량은 8%의 높은 성장을 보였다.

이 연구위원은 “일본 사례를 교훈 삼아 한국 역시 국내 대량 화물의 장기 계약 수송업을 기반으로 한 해운업 발전 전략을 모색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현재 한국 정부는 대량 화물 화주가 구조조정 해운사 인수를 조건부로 허용하는 방안을 마련했지만 이것은 하나의 대량 화물 시장을 여럿의 대량 화물 화주 시장으로 나누는 시장 단편화(market fragmentation) 현상을 초래해 결국 해운업 발전을 가로막는 결과를 가져올 것으로 보입니다. 정부를 중심으로 화주·선사·정책금융회사와 기타 유관 업체를 포함해 호혜적인 생태계를 형성하는 방안을 강구해야 합니다.”


김보람 기자 boram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