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하겠다’고 결심한 순간 모든 자존심과 집착을 내려놓아야

[문화심리학으로 풀어보는 삼국지]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청계천 평화시장의 노동자 전태일이 자신의 몸에 불을 지른 것은 그의 나이 스물두 살 때였다(1970년). 세상에 자살을 찬양하는 문화가 있다면 그 문화는 정상이 아닐 것이다. 청년 전태일의 죽음 자체를 찬양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어떤 이념에 입각한 추상적인 구호를 외치지 않았다.

전태일은 오로지 “정부는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며 죽어갔다. ‘일하는 인간’으로서의 보편적인 인권을 확보하기 위해 그가 요구한 것은 준법(遵法)이었다. 초법적·탈법적 요구가 아니었다. 제발 기존의 법을 제대로 지켜달라는 것뿐이었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의 죽음이 고귀한 이유다.

사회학자 에밀 뒤르켕은 자살의 유형을 이기적 자살, 이타적 자살, 아노미적 자살, 숙명론적 자살 등 몇 가지 유형으로 나눈다. 전태일 열사처럼 이타적인 자살도 없지 않지만 자살은 대개 감당하기 어려운 현실 앞에서 좌절하고 그것을 회피하기 위한 도피성 자살이 대부분이다.
자살의 대부분은 현실 도피형

그리스 신화에서 테베의 왕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취한다”는 비극적 신탁의 주인공이 되어버린 현실에 절망한다. 그는 아무것도 모른 채 아버지 라이오스를 죽이고 어머니 이오카스테를 아내를 맞이했던 것이다. 뒤늦게 사실을 알게 된 이오카스테는 자살한다. 오이디푸스도 스스로 눈을 찔러 장님이 된다. 눈을 뜨고 세상을 바라볼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라오다메이아는 신혼의 단꿈이 깨기도 전에 전쟁터에 나간 남편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녀는 제우스에게 가서 애원했다.

“트로이 전쟁에서 죽은 제 남편을 제발 딱 3시간만 살려주세요!” 약속받은 시간이 끝나가자 살아난 남편의 품속에서 자신의 가슴을 칼로 찌른다. 사랑하는 남편을 따라간 것이다.

항우의 군대는 유방의 군대에 쫓기다가 해하에서 포위되는 사면초가(四面楚歌)의 상황을 맞는다. 고향으로 돌아가 후일을 도모하자는 군사들을 귀향시키고 항우는 자신이 꽂아 놓은 창에 뛰어든다.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한 것이지 내가 싸움을 잘못한 것은 아니다!”
항우 같은 명장은 아니지만 사울의 최후는 항우와 비슷하다. 블레셋 군대가 포위해 오자 이스라엘 초대 왕 사울은 “이방인에게 잡혀 죽는 모욕은 싫다”면서 자신의 칼에 엎어진다. 로마와의 전쟁에 지고 쫓겨 다니다가 몸에 지닌 독으로 자살한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이나 이자성의 농민군이 북경을 점령하자 자금성 뒷산인 경산에서 목을 맨 명나라 마지막 황제 숭정제의 죽음도 이와 유사하다. 히틀러의 죽음은 말할 것도 없다.

‘삼국지’에서 일어난 자살 사건은 권력투쟁이나 전쟁에 진 왕과 장수의 죽음이 대부분이다. 특이한 케이스도 있다. 유비의 참모였던 서서(徐庶)의 어머니 이야기다. 서서가 워낙 총명해 두려움을 느낀 조조는 위나라 영토권 안에 있던 서서의 어머니를 감금한다. 그리고 그녀의 글씨를 흉내 낸 거짓 편지를 써서 서서를 불러들인다.

인재난에 허덕이는 유비의 사정을 잘 아는 서서는 유비에게 제갈량을 강력하게 추천하고 어머니가 있는 위나라로 향한다.

“유황숙을 모시고 한나라를 부흥시키라고 했더니 편지에 속아 이렇게 생각 없이 행동하는가?”
서서의 모친은 아들을 크게 꾸짖고 자살해 버린다.

소열황후로 불리는 감부인은 유비의 정실이고 미부인은 측실이다. 나중에 유비가 촉한을 세워 황제가 됐을 때 그의 뒤를 이어 제2대 황제가 된 아들이 유선이다. 유선의 생모가 바로 미부인이다. 당양파 싸움에서 포로 신세에다 중상을 입은 미부인이 조자룡에게 말했다.

“장군 제 아들 아두(유선)를 부탁해요!” 미부인은 말릴 틈도 없이 우물에 뛰어들어 목숨을 끊었다.

촉나라 장수 마막의 이야기도 특이하다. 위나라 장수 등애의 군대가 진격해오자 마막은 지레 겁을 먹고 항복할 생각만 한다. 아내 이 씨가 말했다.

“여보! 당신도 남자요? 촉나라의 녹을 받아먹는 신하가 어찌 이리 의리도 없소?”
이미 전의를 상실한 마막에게 아내의 말이 귀에 들어올 턱이 있나. 낙심한 이 씨는 의리 없는 남편을 남겨두고 목을 매 자살한다.


인격을 새롭게 하는 계기 만들어야
자살은 아무래도 승자보다 패자 쪽에 많다. 삼국의 혼란을 수습하고 천하의 패권을 장악한 위나라보다 오나라에, 특히 비운의 촉나라에 자살 관련한 이야기가 많다. 물론 위나라에 자살 이야기가 없다는 소리는 아니다. 조조의 특급 참모로 공이 많았던 순욱은 조조가 위왕이 되는 것을 반대했다. 괘씸죄에 걸린 순욱은 어느 날 조조에게서 빈 도시락을 하사 받는다.

“도시락이 비어 있다는 것은 밥을 먹지 말고 죽으라는 이야기가 아닌가!”
주군의 의도를 파악한 순욱은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오나라 초대 황제 손권의 삼남인 손량은 아버지 손권을 이어 제2대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 그러나 그의 권력 기반은 그리 튼튼하지 못했다. 리더십 또한 뛰어난 편이 아니었다. 손량은 같은 집안인 권신 손침 일파에게 밀려 폐위 당한다. 3대 황제에 오른 이는 손량의 형인 손휴였다. 황제였던 손량은 회계왕으로 강등됐다가 다시 후관후로 격하된다. 이 과정에서 울분을 참지 못한 손량은 자살하고 만다.

조자룡이 목숨 걸고 구해내고 제갈량이 목숨 걸고 보필했던 유선은 애초부터 황제로서 함량 미달이었다. 유선이 위나라에 항복하겠다고 하자 유선의 일곱 아들 중 유달리 똑똑했던 오남 유심이 반발했다.

“할아버지가 어찌 세운 나라인데 이러십니까?”

설득에 실패한 유심은 유비의 위패가 모셔진 사당에서 대성통곡한 뒤 자결한다. 제갈량의 적자이자 유선의 사위로 촉나라 대장이었던 제갈첨도 위나라와 전투 중에 요청한 구원병이 오지 않자 자결한 바 있다. 제갈량의 후계자였던 강유 역시 유선이 위나라에 항복하고 난 뒤에 반란을 일으키려다가 실패하자 자결한다.

사족. 융 심리학에 따르면 자살은 ‘삶의 모든 의미를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정신적인 재생을 갈구하는 무의식적인 소원’이다. 오죽하면 죽음을 택하랴마는 또 한편 죽을 결심으로 못할 게 뭐가 있겠는가. 브루노 클로퍼는 말한다.

“자살을 직접 실행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되돌아 볼 ‘상징적인 죽음’을 통해 자신의 인격을 완전히 새롭게 변화시킬 계기를 만드는 게 중요하다.”

자살을 꿈꾸는 사람들은 끝끝내 세상의 것에 집착한다. 브루노의 말처럼 죽겠다는 그 용기로 세상 속의 모든 자존심과 집착을 내려놓고 자기 파괴적인 죽음의 충동을 이겨 냈으면 좋겠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자살률 최고라는 엄중한 현실 앞에서 이런 궁색한 말밖에 할 수 없는 마음을 헤아려 주었으면 좋겠다.


김진국 칼럼니스트, ‘재벌총수는 왜 폐암에 잘 걸릴까?’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