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장수 자동차 제조사 기아차…무리한 투자가 부메랑 돼 좌초

도쿄모터쇼에 선보인 기아자동차의 4륜 구동차 스포티지.//1991.12(마쿠하리=연합뉴스)//

<저작권자 ⓒ 2005 연 합 뉴 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도쿄모터쇼에 선보인 기아자동차의 4륜 구동차 스포티지.//1991.12(마쿠하리=연합뉴스)// <저작권자 ⓒ 2005 연 합 뉴 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이것이 기아차의 진짜 시작입니다.”

1991년 도쿄 모터쇼. 김선홍 기아자동차 회장이 눈시울을 붉히며 이렇게 말했다. 당시 기아차는 독자 개발한 자동차 3개 모델(스포티지·세피아·세피아 컨버터블)을 모터쇼에서 공개했다. 그중 압도적인 관심을 받았던 것은 바로 스포티지였다. 이 모델은 세계 최초의 도시형 콤팩트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이다. 승용차의 역할까지 아우르는 새로운 세그먼트를 정의하는 차량의 등장에 모터쇼 전시장이 술렁였다. 이름도 생소한 한국의 한 제조사가 만든 차를 보려고 일본을 비롯한 내로라하는 업체의 연구원들이 몰리는 진풍경이 연출되기도 했다. 스포티지는 이후 1995년까지 4년 연속으로 도쿄 모터쇼로부터 출품 요청을 받았다. 그리고 몇 년 뒤 도요타는 스포티지를 벤치마킹 한 라브4(RAV4, 1994년)를, 혼다는 CR-V(1995년)를 각각 내놓았다.


콤팩트 SUV 시장을 창출한 스포티지
스포티지 개발 배경에는 홀로서기를 위해 고군분투한 기아차의 피와 땀이 서려 있다. 기아차는 1986년 차종별 통폐합(16회 참조) 폐지 이후 일본 마쓰다와 손잡고 프라이드를 출시해 성공을 거뒀다. 당시 마쓰다와 파트너십을 맺고 있던 포드(1978년 마쓰다 지분 25% 매수)는 소형차를 개발해 미국에 판매(판매명 포드 페스티바)하고 싶었지만 일본의 인건비가 부담이었다. 또 마쓰다가 공장을 새로 건설할 여력도 없었다. 포드가 마쓰다와 협력 관계를 맺고 있던 기아차를 눈여겨보게 된 계기다. 이후 포드는 질 높은 생산 기지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던 기아차에 소형 SUV 공동 개발 및 생산을 제안했다. 이른바 UW-52 프로젝트다. 당시 기아차의 생산 규모는 연간 20만 대를 밑돌았다. 이런 기아차에 UW-52는 한 차종의 생산량이 15만 대에 달하는 대규모 프로젝트였다.

하지만 이 프로젝트는 시작 단계부터 마찰음을 냈다. 포드가 기아차에 “지분 50%를 넘기라”는 무리한 요구를 했기 때문이다. 김선홍 회장을 비롯한 경영진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반발했다. 이에 포드가 한 발 물러섰지만 “건립을 추진 중인 화성 공장(당시 아산만 공장, 추후 현대차 아산 공장과 이름이 비슷해 개칭)을 별도 법인으로 만들고 그 법인의 50% 지분을 달라”고 요구했다. 김 회장은 이 제안도 뿌리쳤다. 이를 악물고 자체적으로 프로젝트를 발전시켜 독자 모델을 개발했다. 그 차가 바로 스포티지다.

1세대 스포티지는 세계 자동차 산업사에 한 획을 그었지만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도시를 지향했지만 정통 오프로드 차량이나 화물차에 쓰이는 프레임 보디를 이용(이후 2세대부터 승용차용 모노코크 보디로 제작)해 승차감이 떨어졌다. 무엇보다 일본 업체들보다 미국 시장 공략이 늦었기 때문이다.

스포티지는 기아차의 위상을 높였지만 동시에 기아차의 몰락을 자초한 모델이기도 하다. 이 회사가 “더 이상 해외 메이커에 의존하지 않겠다”며 ‘독자 모델 전략’을 택한 것은 분명 의미가 있었지만 이를 위해 쏟아부은 천문학적인 자금은 회사를 경영난에 몰아넣었다.

기아차는 1944년 김철호 회장이 설립한 자전거 부품 제조공장 ‘경성정공’이 모태다. 김 회장은 16세에 일본에 건너가 자전거 기술을 배우고 일본 현지에서 자전거 볼트와 너트 제조 기술 업체로 명성이 자자했던 삼화제작소를 이끌며 500만 엔을 모은 뒤 한국에 돌아와 회사를 차렸다.

국내 자동차 회사 중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만큼 ‘국내 최초’라는 수식어를 가진 제품들이 많다. 경성정공은 1952년 기아산업으로 상호를 변경하고 부산에서 국내 첫 국산 자전거인 ‘삼천리호’를 출시했다. 1961년 자전거에 원동기를 붙여 오토바이를 생산하다가 1962년 일본 혼다와 기술제휴해 국내 최초 모터사이클인 ‘C100’을 내놓았다. 그리고 같은 해 동양공업(마쓰다의 전신)과 기술제휴로 ‘삼륜차’, ‘딸딸이’라는 별명이 붙은 3륜 화물차 ‘K-360(배기량 356cc)’을 출시하며 자동차 산업에 뛰어들었다. 이 모델은 1963년엔 배기량과 차체를 키워 ‘T-1500(배기량 1484cc)’으로 등장했다. 이 ‘딸딸이’는 당시 장사를 하는 이들에게 필수품과도 같았다.


자전거 제작서 출발해 오토바이·자동차로
삼륜차의 판매 호조에 힘입어 기아산업은 1973년 6월 주식시장에 상장했고 같은 해 8월 국내 처음으로 일관 공정 시스템을 갖춘 종합 자동차 공장인 소하리 공장(연산 2만5000대)을 완공했다. 현대차 울산 1공장이 1975년 완공됐으니 이보다 2년 빠른 셈이다.
기아 김선홍 회장이 21일 미 자동차 기술협회 주관 92 컨버전스 회의에서 연설하고 있다.//1992.10.21(데어본=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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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아 김선홍 회장이 21일 미 자동차 기술협회 주관 92 컨버전스 회의에서 연설하고 있다.//1992.10.21(데어본=연합뉴스)// <저작권자 ⓒ 2005 연 합 뉴 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하지만 공장을 완공하고도 승용차 생산 허가를 받지 못해 가동 첫해에는 트럭만 생산했다. 당시 생산된 차종이 승용차에 가까운 소형 트럭인 ‘브리사 픽업’이었다. 이듬해인 1974년 식목일, 박정희 대통령이 예고 없이 공장을 방문해 둘러봤다. 그리고 다음날 승용차 브리사(배기량 985cc)에 대한 제작 승인이 나왔다. 마쓰다 파밀리아 3세대 모델을 기본으로 만든 브리사는 초기 국산화율이 80%에 달했다. 파밀리아는 현대차의 포니와도 인연이 있는데 두 차량 모두 조르제토 주지아로가 디자인을 맡았다. 카리브해에 부는 북동무역풍을 뜻하는 브리사는 프런트 그릴과 테일 램프를 독자적으로 만들어 파밀리아와 차별화했다. 기아산업은 브리사를 기반으로 포니가 등장하기 전인 1975년 승용차 시장점유율을 55%까지 끌어 올렸다. 배기량이 작아 연료 소비량이 적은 만큼 영업용 택시로 인기가 높았다. 브리사는 1983년까지 3만1017대가 판매되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1975년 9월 기아는 브리사 픽업 10대를 카타르에 수출했는데 이것이 국내 최초의 완성차 수출이었다.

1973년 창업주 김철호 회장이 타계하고 장남 김상문 회장이 2세 경영인으로 등장했다. 이후 기아차는 인수와 분사, 설립 등 변화의 시기를 맞았다. 먼저 1976년 기아산업은 현재 광주 공장의 전신인 아시아자동차를 인수했다. 아시아차는 1965년에 호남에서 비료를 팔아 큰돈을 번 기업가 이문환이 이탈리아 피아트, 프랑스 심카(SIMCA, 당시 피아트 프랑스 법인, 1979년 PSA에 매각), 시아베(SIAVE) 은행과 차관 협정을 체결하며 설립된 회사다. 이문환은 영부인 옷 디자인으로 유명한 이광희 디자이너의 큰아버지다. 1969년 동국제강에 인수된 아시아차는 1970년 피아트와 합작하며 피아트 124를 출시했다. 이 차는 특유의 각진 외관 디자인으로 중·상류층에게 인기를 끌었지만 피아트와 계약 연장을 하지 않아 3년 만에 단종됐다.
연재기사(산업전략군단사.181회) - 오원철 1993.12.28게제80년대초 침몰직전의 기아를 회생시킨 봉고차(완성라인). 82-84년사이에 11만대가 팔려나가 봉고신화를 만들어 냈다. <81년도 봉고차완성라인>
연재기사(산업전략군단사.181회) - 오원철 1993.12.28게제80년대초 침몰직전의 기아를 회생시킨 봉고차(완성라인). 82-84년사이에 11만대가 팔려나가 봉고신화를 만들어 냈다. <81년도 봉고차완성라인>
아시아차는 기아와 브랜드를 분리해 운영했다. 버스와 트럭 등 상용차에 특화했으며 특장차와 군수 차량 등을 납품하는 방위산업체이기도 했다. 아시아차는 주로 상용차 생산에 주력했지만 수요가 내수에 한정됐기 때문에 다품종 소량생산에 따른 비용 절감을 위해 1978년 일본의 히노와 기술제휴했다.

아시아차를 인수한 1976년 기아산업은 기아기공을 설립했다. 기아기공은 1977년 공작기계, 1979년 자동차용 변속기 생산을 시작하며 기아의 주요 부품을 지원했으며 현대차에 인수될 때까지 기아의 주력 계열사 역할을 했다. 1996년 기아중공업으로 사명을 변경한 기아기공은 현대차에 인수되면서 현대위아로 다시 간판을 바꿔 달았다.
[역사를 바꾼 자동차 M&A 명장면] 미완으로 끝난 봉고·프라이드 신화
전문 경영인 체제 전환…‘공채 1기’ 김선홍 회장 취임
기아기공을 설립한 같은 해인 1976년 이륜차(오토바이) 부문을 분리해 기아기연을 설립했다. 이 회사가 오늘날의 대림자동차다. 기아기연은 1982년 대림산업에 모터사이클 계열사로 인수되면서 대림자동차공업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마찬가지로 기아의 모태가 됐던 자전거사업부는 1979년 3월 독립했다. 삼천리자공으로 설립된 뒤 현재의 삼천리자전거로 이어져 오고 있다. 현재 삼천리자전거 최대 주주(27.1% 보유)는 김철호 기아차 창업주의 손자인 김석환 대표다. 김석환 대표는 기아차가 현대차에 인수되기 전까지 자금부와 수출 담당 임원으로 근무하기도 했다.

오일쇼크와 승용차 생산 제한으로 경영상 어려움을 겪던 기아산업은 1980~1981년 2년 동안 500억 원의 적자를 내고 회생 불능 기업으로 전락하는 듯했다. 당시 18개에 이르던 계열사 중 기아기연 등 5개사를 매각할 정도로 몸집을 줄여야 했다. 결국 1981년 김상문 회장이 기업 부실의 책임을 지고 자신이 보유한 기아산업 주식 25%를 직원들의 복리후생을 위한 종업원지주조합에 출연했다. 37년간의 오너 기업에서 소유와 경영이 분리된 전문 경영인 기업이 되는 순간이었다. 김 회장은 기아산업을 맡을 인물로 기아산업 1기 공채 출신이자 당시 기아기공 사장이었던 김선홍 씨를 대표사원(사장)으로 선임했다.

뼈를 깎는 체질 개선의 과정을 거치면서 기아 가문을 먹여살릴 효자가 등장했다. 이른바 ‘봉고 신화’다. 기아산업은 1980년 7월 마쓰다 봉고를 들여와 1세대 모델로 1톤 트럭 출시하고 이듬해 이를 개조한 ‘봉고 코치’를 내놓았다. 이 차는 지금까지도 ‘봉고차’라고 불리며 승합차의 대명사가 될 정도로 히트를 쳤다. 이어 1983년에 출시한 농촌형 트럭 세레스 판매도 긍정적이었다. 직원들도 자진해 상여금을 반납하고 원가절감과 생산성 향상 노력을 기울여 1983년 국내 50대 기업 중 가장 높은 수익성을 기록한 회사 중 하나가 됐다.

포드와 마쓰다의 기술과 지원을 등에 업은 기아산업은 프라이드를 내놓으면서 극적으로 승용차 시장에 단단한 입지를 구축했다. 이후 기아산업은 1990년 기아자동차로 사명을 바꾸고 막대한 자금을 들여 ‘기술의 기아’라는 모토와 함께 세피아·크레도스·스포티지 등 독자 개발한 차량을 시장에 내놓았다. 또한 기아특수강(지금의 세아베스틸)을 인수하는 등 수직 계열화를 위한 대규모 투자도 단행했다. 하지만 무리한 투자는 곧 폭탄으로 둔갑해 부메랑처럼 돌아왔다. 기아차와 김선홍 회장이 꿈꿨던 원대한 꿈은 언제든지 회사를 존폐 위기로 몰아넣을 수 있는 ‘독이 든 성배’이기도 했다.


최중혁 신한금융투자 수석연구원·최진석 한국경제 산업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