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에는 역사책이 제격…역사의 향기 품은 대하소설의 백미

“사회든 정치든 어떤 방면이든 거기에 대해 불만이 있을 때, 속에서 무언가 부글부글 끓을 때, 이런 때는 독서를 하십시오. ‘역경’이나 ‘사서오경’을 읽어 보십시오. 마음이 고요히 가라앉을 것입니다. 부드러운 날에는 역사를 읽어 보십시오. 무료하거나 침울할 때, 또는 졸릴 때는 역사를 읽는 것이 좋습니다. 투지와 용기를 불러일으킵니다.”

중국의 ‘마지막 현자’로 불린 남회근은 ‘주역계사강의’에서 “강한 날에는 경서를 읽고 부드러운 날에는 사서를 읽는다”고 했다. 하루하루 느끼는 기분은 누구나 다를 것이다. 즉 강한 날이 있는가 하면 부드러운 날이 있다. 남회근에 따르면 이런 날에는 각기 읽는 책을 달리하면 독서의 효과를 배가할 수 있다고 한다. 삶에 위안과 투지를 주고 다시 살아갈 용기와 희망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장조가 쓴 ‘유몽영(내가 사랑하는 삶이라는 제목으로 번역)’에는 “경서를 읽기는 겨울이 좋다. 그 정신이 전일한 까닭이다. 역사서는 여름에 읽는 게 좋다. 그날이 길기 때문이다. 제자백가는 가을에 읽는 게 좋다. 그 운치가 남다른 까닭이다. 문집은 봄에 읽는 게 좋다. 그 기운이 화창하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눈길을 끄는 것은 모두가 여름에 역사책 읽을 것을 조언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역사서는 좀처럼 읽기가 쉽지 않다. 이럴 때는 ‘역사의 향기’가 담긴 소설이 제격이다. 그것도 수권 혹은 수십 권의 대하소설을 읽는 것을 권하고 싶다. 이문열의 ‘삼국지’나 조정래의 ‘태백산맥’과 ‘아리랑’, 박경리의 ‘토지’ 그리고 최명희의 ‘혼불’ 같은 작품들은 수많은 독서의 기억 중 가장 가슴이 벅찬 순간들이었다.



홍루몽
[책으로 만나는 여름] 대하소설, 그 강물 같은 독서 여행
조설근·고악 지음┃최용철·고민희 옮김┃나남

중국의 조설근이 1740년에 쓴 소설 ‘홍루몽(전 6권)’은 중국식 정원을 상징하는 대관원을 중심으로 가보옥과 임대옥, 설보차를 둘러싼 비극적인 사랑을 한 축으로 하고 가 씨 가문의 ‘가부(賈府)’를 중심으로 가문의 흥망성쇠가 핵심 줄거리로 펼쳐진다. 일찍이 ‘홍루몽’을 다섯 번이나 읽은 마오쩌둥은 “‘홍루몽’을 읽지 않으면 중국의 봉건사회를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사실 초반부에는 술술 읽히지 않아 자칫 책을 손에서 놓기 쉽다. 그러다가 전체 120회 중에서 23회에 이르러 임대옥이 흩날리는 꽃잎을 쓸어 모아 ‘장화총’, 즉 ‘꽃무덤’을 만드는 장면에 이르면 자신도 모르게 울컥하는 심정이 되고 점점 소설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작품에서 짧은 청춘의 쓸쓸함과 허무함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게 바로 장화총이다. 고종 사촌동생이지만 마음속 깊이 임대옥을 사랑하는 가보옥. 어느 날 그는 사랑하는 임대옥이 봄바람에 꽃비가 내리자 그 꽃잎을 쓸어 꽃무덤을 만드는 것을 본다. 임대옥은 가보옥과의 이룰 수 없는 사랑에 점점 사위어 가고 그의 말이나 행동, 또 그가 쓴 시어들에 그런 모습이 그대로 녹아 있다. 그 절정의 표현이 바로 ‘장화혼’이 아닐까. 임대옥은 “싸늘한 달빛 아래 꽃의 넋을 묻는구나”라는 시를 짓는다.

어느 봄날 가보옥은 산등성이 너머에서 아스라이 들려오는 노래를 듣는다. 그 노래를 듣다가 처음에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고 감탄만 하고 있었는데, 뒤에 나오는 이 구절을 듣고는 속에서 무언가 울컥 올라옴을 느낀다.

“꽃잎 묻는 나를 보고 남들이 비웃지만/ 훗날 내가 죽고 나면 묻어줄 이 누구인가?/ 하루아침 봄은 지고 홍안청춘 늙어 가면/ 꽃잎지고 사람 가니 둘 다 서로 알길 없네.”(제28회)

듣기만 해도 애절하기 그지없는 이 구절은 연인 임대옥이 노래한 것이다. 보옥은 그만 목을 놓아 통곡하고 만다.

‘홍루몽’의 주인공들은 차츰 나이가 들고 인생의 곡절을 겪으면서 하나둘씩 불행으로 떨어진다. 이렇듯 작자는 대관원의 여인들에게 끝없는 연민과 동정을 보내면서 꿈같은 세월,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청춘의 그 아련한 세월에 대한 참회를 그리고 있다. 누구에게나 봄은 오지만 또 누구에게나 봄은 짧다. 그게 또한 우리네 인생이다. 영원히 살 것처럼 돈을 모으고 미래를 대비하지만 그러다 돌연 삶이 끝나기도 한다. 그런 삶에 대한 생각을 ‘홍루몽’은 처절하게 들려준다. 시리즈를 읽고 나면 읽기 전과 읽은 후의 ‘달라진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혼불
[책으로 만나는 여름] 대하소설, 그 강물 같은 독서 여행
최명희 지음┃매안


최명희의 대하소설 ‘혼불(전 10권)’은 청암부인을 중심으로 한 종가의 삶과 이를 둘러싼 이웃과 하층민들의 치열한 삶을 그리고 있다. ‘홍루몽’과 또 다른 분위기를 주는 소설로, 꿈틀대는 인간의 욕망을 만나게 된다.

“절 한 자리 하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은 물론이고 친정, 외가, 진외가까지 다 보인다.” ‘혼불’에 나오는 이 말처럼 소설 속에는 이제는 우리에게 낯설어진 문화들이 자주 나온다. 급격한 문화의 소멸은 이제 우리 사회의 전반적인 현상이 됐지만 전통의 삶만큼 급격하게 사라지고 있는 것도 없을 것이다. 소설 속 이야기처럼 예전에는 절만 잘못해도 혼쭐이 나곤 했다.

요즘에는 한두 명의 자녀들이 대부분이어서 집 안이 다들 조용하다. 하지만 사람이 북적거려야 사는 분위기가 난다. 식구들이 적으면 왠지 서글퍼지기까지 한다. 소설 ‘혼불’에서는 식구들이 불어나는 장면을 인상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온 방안이 가득 다 내 식구로구나. 내 이제는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다. 나는 복이 많은 사람이다.”

한편 노비 신분인 춘복이의 스토리도 눈물겹다. 반가의 여성인 강실이를 흠모하는 춘복이는 마침내 강실이를 범하고 만다. 이는 신분 질서에 대한 춘복이의 ‘강간’이라고 할 수 있는데, 조정래의 ‘태백산맥’에서 부잣집 딸인 윤옥자를 강간하는 염상구의 또 다른 자화상일 것이다. 그러나 마음의 양식은 불타는 욕망으로, 재물로는 채울 수 없다. “내 가슴이 내 양식이라. 내 마음이 나의 시량(柴糧)인즉.”

무덥고 습기 찬 여름날, 대하소설을 읽으면서 더위를 잊고 세파에 지친 마음의 양식을 보충해 보자. 그러면 다시 살아갈 힘을, 소생하는 삶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대하소설 읽기는 처음에는 부담스럽지만 읽기를 마칠 때면 무한한 충만감을 준다. 그 어떤 것으로도 살 수 없는 감동이다.



또 다른 ‘강추’ 리스트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책으로 만나는 여름] 대하소설, 그 강물 같은 독서 여행
박경리 지음┃마로니에북스

박경리의 유고 시집. ‘사람의 됨됨이’라는 시에서 선생은 “베풀지 않는 삶이란 한낱 굴러다니는 돌멩이와 다를 바 없다”고 강조한다. 이제는 볼 수 없는 선생의 진솔한 마음을 만날 수 있다.



어머니는 죽지 않는다

[책으로 만나는 여름] 대하소설, 그 강물 같은 독서 여행
최인호 지음┃여백

최인호는 어머니가 죽어서야 비로소 어머니의 손을 보고 놀란다. 150cm의 작은 키에 어울리지 않는 두툼한 손은 여자의 손이 아니라 거인의 손이었다. 두툼한 빵과 같은 그 손이 바로 평생을 자식을 위해 노동한 노동자의 손이었던 것이다.



불안
[책으로 만나는 여름] 대하소설, 그 강물 같은 독서 여행
알랭 드 보통 지음┃은행나무

현대인들이 겪는 끝없는 불안의 징후는 사회적 지위의 추구로 인해 야기된다고 설명한다. 높은 지위를 구하려는 동기는 돈·명성·영향력에 대한 갈망 때문이라는 것이다.



오셀로
[책으로 만나는 여름] 대하소설, 그 강물 같은 독서 여행
셰익스피어 지음

흑인 장군 오셀로가 부하 이아고의 간계에 빠져 아름다운 아내의 정절을 의심하다가 결국 아내를 목 졸라 살해한다는 이야기다. 이아고는 자신이 바라던 오셀로 장군의 부관 지위를 카시오에게 빼앗기자 오셀로를 파멸시킨다.


최효찬 자녀경영연구소장·비교문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