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테크 제 1013호 (2015년 05월 06일)



‘저비용 사회’의 지혜

기사입력 2015.04.28 오후 04:31

저속 성장 시대, 국민 누구나 사용하는 생활 인프라를 갖춰 생활비 부담을 더는 지혜가 절실하다. 최고급 민간 서비스의 시설과 운영 체계를 공유하면 더 효과적이다.

‘저비용 사회’의 지혜

박찬희 중앙대 경영학부 교수

1964년생. 서울대 경영학과 졸업. 서울대 경영학 석사. 하버드대 경영학 박사. 대우그룹. 대통령녹색성장위원회. 2002년 중앙대 경영학부 교수(현).



고속 성장의 신화, 분명 자랑스러운 기억이다. 그러나 자랑스러운 기억이 환상이 되고 정치적 선동이 되면 현실은 엉망이 된다. 성숙 단계에 들어선 세계 12위권의 경제가 1970년대와 같은 고속 주행이 가능할 수는 없다. 세계경제가 거품이 빠지는 상황에서는 더욱 어렵다. 저출산·고령화사회에서 몇 명이 벌어 나눠 먹고 살지를 생각하면 연 4% 성장도 만만한 일이 아니다. 대형 유전이 터지거나 삼성전자가 1년에 하나씩 생기면 몰라도 말이다.

우리는 자동차를 바꿀 때 대부분이 더 크고 좋은 차로 바꾼다. 어떻게든 살림이 나아지던 고속 성장 시대의 습관이다. 빚내서 공부시키고 시집 장가보내면 집값이라도 올라 해결하던 시대의 얘기인데, 세상이 달라졌다. ‘이 정도는 나아지겠지’ 하는 기대가 자꾸 무너지니 ‘경제 살려내라’고 다그치고 표가 아쉬운 이들은 은행 돈을 풀어 상황을 모면한다. 국민들 빚만 늘리는 마약 처방에 불과하다.

경제의 현실을 솔직하게 설명하고 기대를 낮출 수밖에 없지만 매우 괴로운 일이다. 그래서 국민들의 생활의 기본 조건을 받쳐주는 노력도 필요하다. 경조사비나 의료비 지출, 문화생활과 레저에 들어가는 돈만 줄여도 경제적 부담은 크게 줄어든다. 자녀 교육이나 육아·보육도 마찬가지다. 국가가 관련 시설과 운영 체계를 갖추어 주면 국민의 부담은 크게 줄어든다. ‘저비용 사회’를 만드는 지혜다.

고속도로를 만들고 다리를 놓는 토목 인프라가 절실한 시절이 있었다면 이제는 생활 인프라도 중요한 세상이 됐다. 등짐 지고 걸어가 농사짓던 시절과 달리 제때 운동 하고 쉬지 못하면 고혈압·관절염으로 의료비 폭탄이 날아온다. 건강보험에만 기대기엔 아프고 쑤신 곳이 너무 많다. 옛날 신문을 찾아볼 할아버지, 숙제 자료를 찾아볼 손자에게 도서관은 너무 부족하다.

형편이 어려운 이들을 돕는 복지 시설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국민 누구나 사용하는 생활 인프라를 갖춰 생활비 부담을 더는 지혜를 발휘하자는 얘기다. 매우 어려운 처지의 부모와 아이들은 나라가 돌봐야 하지만, 중산층 가정을 위한 보육 시설도 믿을 만해야 마음 편히 일하고 경제가 돌아간다. 국가가 시설과 운영 체계를 개발하면 규모의 경제가 작동해 돈도 덜 든다.

형편이 좋은 이들을 위한 고급의 서비스가 속속 나오고 있다. ‘그들만의 리그’가 눈꼴 시릴 수도 있지만 저비용 사회를 위한 생활 인프라에 활용할 수도 있다. 최고급 스포츠센터의 시설을 돌려쓰고 여기서 훈련된 전문 인력이 국가 시설을 맡아 운영하면 생활 인프라의 질이 훨씬 높아진다. 보육·의료 시설도 마찬가지다. 대기업에 세제 지원해 봐야 투자할 실력도 없어 현금만 쌓아 두는 판에 차라리 이런 고급 시설물의 양도나 기부에 세제 지원하는 편이 낫다.

저비용 사회를 위한 생활 인프라, 걱정스러운 점도 많다. 쓸데없는 공사를 벌여 나랏돈 나눠 쓰던 짓이 여기서도 반복될 수 있다. 뗏목에 수질 검사기 달면 될 일을 거액의 로봇 물고기를 만들 듯이 황당한 시설과 프로그램이 등장할 수도 있다. 뭉칫돈 들어가는 일이 아니고 언뜻 그럴듯한 이론도 많으니 감시 감독도 쉽지 않다. 지방자차단체 현장에선 이미 그런 싹이 보이고 있다. 새마을 운동으로 마을회관 짓던 시절보다 훨씬 공부를 많이 해야 생활 인프라도 제대로 만들고 운영할 수 있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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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일시 : 2015-04-29 09: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