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ff business 제 1013호 (2015년 05월 06일)



‘국부론’, 과연 제대로 읽고 있나

기사입력 2015.04.28 오후 04:36

‘국부론’, 과연 제대로 읽고 있나

누구나 자신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그런 시각을 뒷받침해 줄 든든한 근거와 토대가 있으면 그 자체가 권력이 될 수 있다. 오늘날 대부분의 자본가나 경제학자(이른바 주류 경제학자) 치고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과 그것을 토대로 한 경제학을 거론하지 않는 이는 거의 없다. 그렇다면 과연 애덤 스미스는 어떤 의도로 이 책을 썼고 이 책이 담고 있는 진정한 의도와 의미는 무엇일까.

이 책에 대한 우리의 접근은 명료하다. ‘어떤 역사적 가치를 갖는가’와 ‘애덤 스미스가 말하고자 한 진정한 의미와 가치는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스미스가 강조한 핵심은 시장 아닌 생산 이론
‘국부론’은 “모든 국민의 연간 노동은 그 국민이 연간 소비하는 모든 생활필수품과 편의품을 근원적으로 공급하는 원천”이라고 시작된다. 그것은 경제에서 생산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분명하게 밝힌 것이다. 지금으로서야 아무렇지도 않을 만큼 당연한 말이지만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말이었다. 당시는 국가가 경제를 주도하는 중상주의 시대였다. 그러니 금이나 자산 자체가 중요하게 여겨질 때였고 국왕과 귀족들은 자신의 자산 증식에만 관심이 있을 때였다. 그런데 애덤 스미스는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매년 새로 생산되는 재화의 흐름이라고 본 것이다. ‘재화의 흐름’은 어디에서 이뤄질까. 그것이 바로 시장이다. 지금이야 시장경제가 보편적 진리이지만 당시로서는 그렇지 않았다.

우리는 흔히 ‘국부론’ 하면 곧바로 가격 이론을 떠올린다. 하지만 애덤 스미스가 강조하는 핵심은 사실 시장이 아니라 생산 이론이다. 경제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금이나 자산의 축적이 아니라 생산적 노동이 투입돼 그 가치를 높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노동생산성이 향상돼야 한다. 우리가 기억하는 유명한 사례인 핀 공장에서의 분업이 바로 여기에서 언급되는 부분이다. 노동생산성을 올리기 위한 가장 중요한 방법은 바로 분업이다. 그러면 숙련도가 향상되고 작업하는 시간도 줄어들며 단순하고 일정한 작업을 수행해 줄 기계를 만들 수 있는 가능성도 높아진다.

이런 식으로 효율이 높아지는 생산 체계가 되면 어떤 일이 생길까. 자급자족 형태의 생산방식을 뛰어넘게 된다. 그렇다면 시장은 단순히 자신에게 필요한 재화를 물물교환하는 공간이 아니라 자신이 많이 생산한 것을 팔고 필요한 것을 사는 체제의 시장으로 발달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가격은 이전처럼 국가나 영주가 개입해 결정하는 게 아니라 시장 스스로, 즉 공급과 수요의 합리적 교차점에서 결정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가격 이론은 바로 여기에서 나온다. 여기에서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을 먼저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애덤 스미스는 뜻밖에도 그 용어를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고작 한두 번 언급했을 뿐이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사실 일종의 신학적 비유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용어를 남용하면 마치 시장이 신의 섭리에 의해 조절되는 느낌을 줄 수 있다는 점을 고려했을 것이다.

윌리엄 피트 영국 총리는 1792년 영국의회에서 “‘국부론’은 무역의 역사 및 정치경제 체제와 관련된 모든 문제에 최상의 해결책을 제공했다”고 말했다. 실제로 영국은 이 책을 통해 경제학에 대한 새로운 시작을 열었고 미국은 자신의 정치경제 사상의 바탕으로 삼았다. 애덤 스미스는 분명히 정치경제를 본격적인 새로운 학문으로 정립했다. 그는 경제적 과정이 인간의 삶을 지배한다는 점을 분명히 밝혔다. 그 이전까지는 인간의 삶을 지배하는 것은 신학이나 철학 혹은 정치체제라고만 여겼다는 점에서 애덤 스미스의 의도는 매우 파격적인 것이고 근대정신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경험론의 전통을 따르는 애덤 스미스는 올바른 경제적 선택에 따른 쾌락의 증가는 당연히 도덕적 선의 증가와 동일하기 때문에 자신은 도덕철학의 이론을 정립하고 있는 것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그렇다면 애덤 스미스가 말하는 쾌락의 증가는 무엇에 의해 이뤄질까. 그리고 그것을 가로막는 것은 무엇일까. 그가 살았던 시기는 영국에서 중상주의가 극에 달했을 때였다. 중상주의는 크게 말하면 15~18세기 상업자본주의 단계에서 유럽 국가들이 채택했던 경제정책과 이를 뒷받침한 경제 이론이다. 국가의 보호로 무역, 특히 수출을 추진함으로써 나라를 부강하게 하려는 사상 및 그러한 사상에 기초한 경제정책을 의미한다. 문제는 이러한 경제정책은 철저하게 엘리트 계급의 지배적 경제사상이었고 실제로 그들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방식으로만 내달렸다는 점이다. 부의 극대화를 위해서는 어떠한 수단과 방법도 가리지 않았다.


탐욕과 비정상적 통제 거부
그런 생각을 하나의 작은 영지로 국한해 보자. 빵의 가격을 결정할 때 영주와 자본가는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외부에서 싼 가격의 밀가루 반입을 금지하고 물량을 통제할 수 있다. 그런 상황에서 빵의 가격은 빵가게 주인이나 주민들이 결정하는 게 아니라 자본을 대고 세금을 징수하는 영주의 이익에 좌우될 수 있다. 엘리트인 자신들만이 합리적 사고를 할 수 있다고 정당화하면서…. 그러나 애덤 스미스에 따르면 그것은 말도 안 되는 궤변이다. 누구나 합리적으로 사고하고 판단할 수 있다. 경험론에서 모든 인식의 중심이 각 개인 자신이었다는 것을 상기해 보라. 누가 정해 주는 게 아니다.

자신들의 이익에 따라 가격을 정하면 다수의 사람들이 손해를 본다. 그것은 고통이고 쾌락이 선이라는 점에 비춰보면 비윤리적인 일이다. 그들이 간섭하지 않아도 각 개인과 시장의 합리성이 작동하면 저절로 최적의 합리적 일치점이 생길 수 있다. 그게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수요와 공급에 따른 시장의 가격 결정 기능이다. 중상주의는 이론적으로 바로 애덤 스미스에 의해 신랄하게 비판받았던 것이다. 그의 ‘국부론’은 그런 기존의 경제정책과 경제 이론들을 비판하는 것이었다.

근대의 기본 정신을 ‘자유로운 개인’이라고 하는 주제로 비춰 본다면 애덤 스미스의 이러한 정신은 경제의 주체로서의 ‘자유로운 개인’을 실현하는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그것은 근대의 문을 연 중요한 열쇠였다.

흔히 자본주의에서 자유경쟁과 자본 축적만을 강조하면서 규제의 철폐 혹은 완화를 주장하는 경향이 있는데, 적어도 그럴 때 애덤 스미스나 ‘국부론’을 마음대로 들먹이면 안 될 일이다. 그 바탕에는 자유로운 개인의 합리적 판단 능력과 그에 근거한 시장의 자율적 기능이 전제된 것이고 탐욕과 비정상적 통제를 거부한다는 중요한 선언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 핵심을 빠뜨리거나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자유경쟁과 자본 축적 그리고 규제의 축소만을 주장하는 것은 애덤 스미스를 왜곡하는 것이다.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물론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은 자본주의 체제가 가격의 기능을 통해 질서를 만들어 내고 있다는 것을 밝히고 그 바탕에 인간의 합리적 판단 능력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그것이 단순한 자유경쟁과 자본 이익 증대에만 방점이 찍힌 것이 아니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는 이미 인간의 탐욕 등 심리적 요인에 대해 매우 세밀하게 검토했고 그런 요인들이 작동되면 결국 시장의 합리적이고 자율적인 기능과 역할도 깨진다는 점을 분명하게 밝혔다.

그는 경제 상태를 세분화해 분석하고 사회 상황을 최적의 상태로 만들어 줄 수 있는 규칙을 발견하기 위해 애썼다. 그렇게 경제 법칙의 작용 방식을 연구한 것이다. 최적의 사회 상태를 만들기 위한 최상의 방법이 시장을 구성하는 다양한 힘의 자유로운 움직임에 있다는 결론을 내린 것인데, 언제나 개인을 출발점으로 삼았고(카를 마르크스는 애덤 스미스가 내세운 개인을 계급으로 대체했다) 이를 통해 마침내 자유를 옹호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는 제3자의 희생을 발판으로 삼지 않으면서도 만인을 위한 부를 실현할 수 있을 것인지를 궁극적으로 탐구한 학자였다. 이 점을 망각했을 때, 정작 그가 세운 경제학이 왜곡되게 전개돼 극단적으로 양극화되는 부와 빈곤의 악순환을 초래하는 것을 지금 우리는 현실에서 목격하고 있다. 애덤 스미스를 냉정하게 다시 읽어 볼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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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일시 : 2015-04-28 17: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