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heritance & Tax]미국서 인기 있는 신탁, 한국은?
미국에서 신탁은 유언장을 대용해 상속 플랜의 한 방편으로 널리 이용되고 있다. 한국도 신탁법 전면 개정으로 유언대용신탁을 활용할 수 있게 됐지만 세법 반영 등 현실은 만만치 않아 보인다.

재산을 관리, 보호하고 증식하는 수단으로 신탁제도라는 것이 있다. 그러나 신탁이란 무엇이고, 어떤 기능을 하는 제도인지에 대해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신탁’이란 세간에 많이 알려진 차명 재산이나 명의신탁과는 또 다른 개념으로 신탁법이라는 별도의 법률 규정에 따른 것을 말한다.

신탁의 기원은 고대 로마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신분제로 인해 재산을 상속받을 수 없는 자에게 실질적인 상속이 이뤄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고안된 개념이다. 즉, 재산에 대한 형식적인 소유자와 실제 수익자가 다른 것으로 중세시대에는 개인 신분의 한계로 인한 재산의 몰수, 세금, 상납금 등 봉건적인 부담을 회피할 목적으로 신탁을 이용했다.

현대로 넘어오면서 신탁은 재산 보호라는 목적 외에 재산의 관리와 증식, 다양한 재산 승계 방법의 활용, 절세 효과, 생전에 재산을 자손들에게 이전하면서 자손들이 함부로 재산을 처분하거나 유용하지 못하게 할 목적 등 다양한 방법으로 활용됐다. 신탁 계약은 위탁자의 자유의사대로 그 계약 내용을 매우 유연하게 정할 수가 있고 계약 내용의 변경이나 취소도 가능하다는 것이 장점이다.

미국서 인기 높은 생전신탁과 생명보험신탁
미국에서 신탁은 유언장 대용 또는 상속 플랜의 한 부분으로 많이 이용된다. 가장 흔히 알려진 생전신탁(Revocable Living Trust)은 신탁자가 생전에 신탁 내용을 변경, 취소할 수 있는 신탁이다. 미국에서는 일반적으로 생전신탁을 이용하면 사망 시 신탁 재산에 대해 법원을 거쳐야 하는 유언검증절차(probate)를 회피할 수 있으므로 상속에 따른 여러 가지 비용과 시간을 크게 줄일 수 있고, 유언장만 존재하는 경우에 비해 상속인 간의 분쟁을 줄일 수 있으며, 유언장의 경우에는 고인의 재산과 부채 내역 등이 공개되는 것과는 달리 신탁 재산의 비밀을 지킬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그다음으로 많이 이용되는 신탁은 생명보험신탁(Irrevocable Life Insurance Trust, ILIT)이다. 보험증서의 소유자나 수혜자를 당초의 보험가입자나 배우자가 아닌 제3자, 즉 자녀 또는 생명보험신탁으로 하는 경우, 생명보험금은 상속 재산에서 제외된다. 특히 자녀가 미성년자이거나 또는 성년인 자녀라 하더라도 당초의 보험가입자가 구상한 상속 플랜에 반하는 행위(보험의 해약, 보험료를 담보로 한 금전 차입 등)를 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으므로, 상속 플랜이 좀 더 안정적인 효과를 낼 수 있도록 생명보험신탁을 많이 활용한다.

GRAT(Grantor Retained Annuity Trust)라고 하는 신탁은 자산가들의 상속 플랜에 자주 이용되는 것으로, 신탁자(grantor or trustor)는 신탁을 설정하고 재산을 신탁에 이전한 후 신탁으로부터 매년 일정 금액을 일정 기간 동안 받을 수 있는 권리를 보유하게 된다. 그 일정 기간이 지난 후에 신탁 재산에서 신탁자에게 지급된 가치를 차감하고 난 뒤의 나머지 신탁 재산은 자녀에게 증여되도록 한다.

신탁에서 신탁자에게 지급하는 가치는 세법에 규정된 방법을 이용하게 되는데, 이자율이 핵심이다. 이자율이 낮은 시기에 이 신탁을 이용하면 자녀는 증여세를 부담하지 않거나 부담하더라도 아주 적은 세액을 부담하면서 신탁 재산의 가치 증가분에 대한 증여를 받을 수 있게 되고 신탁자는 당초 신탁할 당시의 가치와 그에 대한 이자 정도만을 되돌려 받을 뿐이다. 이러한 GRAT라는 신탁을 이용해 놀랄 만한 금액을 증여세 부담 없이 증여한 아주 유명한 사례로는 월마트가 있다.

조세피난처 국가에 신탁 설립했더니
한국 거주자인 A씨는 과거 외국에서 사업을 영위하면서 꽤 많은 재산을 해외에 축적했으며 슬하에 아들 셋을 두었다. 그동안 모은 재산을 후손에게 물려주려고 하나 세 아들 중 장남에게만 재산을 승계하고 싶어 했다. 그래서 조세피난처 국가에 신탁을 설립하고 수백억 원의 재산을 신탁에 맡겨 외국 신탁 회사로 하여금 신탁 재산을 관리하게 하고 A씨의 사후 수익자는 장남 B씨로 지정해 두었다. A씨가 살아 있는 동안은 신탁 계약을 A씨의 의지대로 언제든지 변경, 취소할 수 있도록 해 놓았고 수익자도 A씨로 지정했으며, 그가 사망한 경우에는 사후 수익자로 지정해 둔 장남 B씨에게 신탁 재산이 모두 분배되게 해 놨다.

신탁을 설립한 지 10여 년이 지난 후에 A씨는 한국에서 사망하게 된다. 한국에 거주하던 장남 B씨는 신탁 재산을 자기가 분배받지 않고 미국에 거주하는 자신의 아들 C씨에게 바로 분배되게 하고 싶었다. 그러나 신탁 계약 내용을 꼼꼼히 읽어본 후 그렇게 할 수가 없었는데 계약서에 사후 수익자로 지정된 장남 B씨가 신탁 재산을 포기하면 그 재산은 신탁이 설립된 국가에 소재하는 자선단체에 기부하도록 돼 있었던 것이다.

물론 외국 자선단체에 기부하겠다는 의사는 없었다. 당초에 신탁 계약의 전문가를 활용하지 않아 계약 내용이 부실하게 된 사례다. 과거에 비해 재산 상속과 관련한 상속인들 간의 다툼은 증가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탁이라는 제도를 잘 활용하면 여러 분쟁을 예방할 수 있고 재산을 보호할 수 있을 것이다.

영국, 미국 등은 신탁제도가 발달돼 있고 세법에서도 신탁 관련 규정들이 잘 정비돼 있어 재산의 승계와 관련해서도 그 활용이 일반적이다. 그와 달리 우리나라는 신탁법이 전면 개정되기는 했으나 아직 신탁이 다양하게 활성화되지 못하고 있다. 특히 세법에 그러한 내용들이 반영되지 않고 있어서 여러 가지 새로운 쟁점들이 발생할 수 있는 상황이다.

신탁제도에 부응해 세법에도 그러한 내용을 반영해 좀 더 명확하고 현실성 있는 규정들이 입법돼야 할 것이다. 다만 그전까지는 현행 세법하에서 비거주자 전략과 재산의 국외 이동, 해외 신탁제도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해 재산의 보호와 증식, 절세 효과 등에 활용해야 할 것이다.

유상학 딜로이트 안진회계법인 세무자문본부 상무 / 일러스트 김호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