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불은 켜져 있으나 사람은 없는 순간’. 엘렌 랭어 하버드대 심리학과 교수는 자기 자신과 주변 환경을 제대로 돌아볼 수 없는 이러한 마음의 상태를 ‘마음 놓침(mindlessness)’이라고 했다. 벌써 12월, 제야의 종소리가 공허함으로 ‘나’를 휘감기 전에 마음의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Big story] 참을 수 없는 공허함, 나를 채우는 법
제운 밤 촛불이 찌르르 녹아 버린다
못 견디게 무거운 어느 별이 떨어지는가
어둑한 골목골목에 수심은 떳다 갈앉았다
제운 맘 이 한밤이 모질기도 하온가
희부얀 종이 등불 수줍은 걸음걸이
샘물 정히 떠붓는 안쓰러운 마음결
한 해라 그리운 정을 몸고 쌓어 흰 그릇에
그대는 이 밤이라 맑으라 비사이다

1930년 발표된 시인 김영랑의 시 ‘제야(除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한 해를 보내는 마음엔 설렘보다 수심이 더 크게 어리었던 듯하다. 더욱이 우울증, 소진증후군 등 심리적 병리현상이 대한민국을 뼈아프게 관통하는 이즈음, 켜켜이 쌓여 있는 한 해의 근심을 털어내지 못한다면 마음속 공허함이 더 큰 파열음을 낼 수 있는 시기다.

지난해 연말 한 취업포털이 10대에서 50대 이상까지 남녀 2119명에게 물었더니, 매년 12월이 되면 감정의 기복과 스트레스가 잦아지는 이른바 “연말 증후군을 겪고 있다”는 응답자가 55%나 됐다. 특히 40대는 10명 중 7명(71.2%) 이상이 연말 증후군을 호소했고, 50대는 10명 중 6명(59.4%)이 연말이면 슬럼프에 빠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연초에 계획했던 것을 실천하지 못한 자책감’(25.2%), ‘새해에 무언가를 잘 해야겠다는 중압감’(18.9%), ‘많은 사람과 있어도 괜히 외롭고 쓸쓸함’(17.7%) 등이 주요 통증이다. 김진세 고려제일신경정신과 원장은 “최근 경기 침체와 맞물려 실적 압박감과 새해에 대한 걱정 등으로 불안과 불면증을 호소하는 중장년층이 더욱 늘고 있는 추세다”라고 말했다.
[Big story] 참을 수 없는 공허함, 나를 채우는 법
가면놀이의 아픔, 행복은 소득 순이 아냐
‘45달러→2만8000달러’ 1945년 해방 당시 국민소득(1인당) 45달러에서 지난해 2만8000달러로 70년 만에 600배가 넘는 비약적 성장을 이룬 대한민국. 그야말로 상전벽해(桑田碧海)를 이뤘다. 하지만 삶의 만족도를 보면 아직도 전쟁 중이다. 글로벌 여론조사기관 갤럽이 공개한 ‘2014 세계 웰빙 지수’에 따르면 한국인의 웰빙 지수(117위)는 오랜 내전을 겪은 이라크(102위)보다도 낮다. 왜일까? 이에 대해 황상민 연세대 심리학과 교수는 ‘한국인의 이중적 가치’에서 그 심리적 혼란의 이유를 찾았다.

오스카 와일드의 소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에는 현실의 주인공과 초상화 속 주인공의 ‘이중성’이 위태롭게 그려진다. 현실 속 도리언은 누구나 한번 돌아볼 만한 수려한 외모지만, 그의 얼룩진 욕망이 투영된 초상화(내면)는 시간이 흐를수록 추악하게 변질돼 간다. 물론 소설이라서 가능한 얘기다. 그런데 한번 되돌아보자. 혹 당신도 내면의 모습을 애써 감춘 채 남들에게 보일 때만 ‘멋지게’ 치장한 모습으로 살고 있지 않은지.

‘대통령과 루이비통’이란 책을 통해 ‘남들에게 보여주는 모습’과 ‘속으로 욕망하는 모습’의 이중성을 꼬집은 황 교수는 “한국 사회의 대다수가 소설 속 도리언 그레이처럼 겉과 속이 다른 이중적인 가치를 추구하며 살아간다”고 지적한다. 한국인에게 가치란 ‘뚜렷하게 자신의 삶을 나타내는 어떤 것’이 아니라 ‘누구의 눈에 어떻게 보일 것인가를 고려하는 것’이라는 설명이다.

“한국 사회는 그간 경제적 성취를 이루면 삶이 안정될 것이라는 잘못된 믿음을 끊임없이 세뇌했습니다. 그러나 경제가 발전하고 국민소득은 올라가는데 자살률이 높아지고 출산율은 떨어지는 현실을 들여다보세요. 현재 ‘나’를 진정으로 행복하게 만드는 가치가 무엇인가를 찾아야 마음이 제자리를 찾아갈 수 있습니다.”

실제 올해 노벨상 수상자인 앵거스 디턴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는 동료 교수인 대니얼 카너먼 교수와 함께 ‘돈과 행복’에 관한 흥미로운 결과를 내놨다. 돈이 있으면 행복해질까? 둘 다 맞을 수도, 둘 다 틀릴 수 있다. 디턴 교수에 의하면 연소득 7만5000달러(약 8600만 원) 미만에서는 소득이 많아질수록 슬픔의 강도는 약해지고 행복 지수는 올라갔다. 그러나 7만5000달러 이상일 경우 소득과 행복은 유의미한 관계를 보이지 않았다. 어느 정도 안정된 삶에 이르기까지 돈은 행복을 위한 필요조건이지만 충분조건은 아닌 셈이다.

윤대현 서울대학교병원 강남센터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자본주의 가치에 따라 열심히 일한 만큼 얻는 성과를 통해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는다는 생각이 심리적 허기를 초래할 수 있다”고 말했다. 성공, 승진, 경쟁 같은 이성적 성취보다 소박한 감성적 목표가 건강한 자존감을 높이는 데 효과적이라고 설파한다.

‘방전된 심신’ 모니터링, 마음의 근육 만들기

살다 보면 ‘뚜뚜뚜~’ 마음속에서 ‘통증’, ‘단절’ 등의 신호를 보낼 때가 있다. 사소한 신호라도 그 마음을 인지하고, 들여다보는 것이 치유의 첫걸음이다.

1. 중견기업 간부인 40대 후반의 A씨는 얼마 전 당혹스런 경험을 했다. 매사 꼼꼼하기로 소문난 그가 거래처 약속을 기억하지 못하고 펑크를 낸 것이다. 결재 서류에 오기(誤記)하는 실수도 잇달았다. 누구보다 책임감이 강하고 완벽주의인 그는 “조기 치매의 전조 증상은 아닌지 걱정이다”라고 우려했다.

2.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50대 B씨는 최근 가족들과 기분 전환을 위해 쇼핑에 나섰다가 체면을 구겼다. 직접 가족들을 뒷좌석에 태우고 운전하고 가다가 옆 차량과 시비가 붙은 것. 평소 점잖은 가장의 모습을 보여주려 노력해 왔건만 ‘욱’ 하는 마음에 순간 욕설을 뱉고 후회했다.
[Big story] 참을 수 없는 공허함, 나를 채우는 법
경인지방통계청의 ‘2014년 수도권(서울, 경기, 인천) 건강부문 사회지표’를 살펴보면 13세 이상 수도권 지역민의 10명 중 7명(69.8%)이 일상생활에서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연령대별로 보면 20대(54.7%)와 30대(50.75%)는 상대적으로 낮은 편인 반면 40대 이상은 연령대가 높을수록 스트레스 비율도 올라갔다. 40대는 57.9%이고 50대는 66.5%, 60대 이상은 71%까지 치솟는다.

그렇다면 지치고 상처 입은 현대인의 마음을 위한 특효 처방전은 무엇일까. 이화여대 교수이자 정신과 전문의로 50년간 환자를 돌보고 학생들을 가르쳐 온 이근후 명예교수는 그의 저서 ‘나는 죽을 때까지 재미있게 살고 싶다’에서 고단한 사람들의 삶을 ‘개’에 빗대어 훈계한다.
“개들에게 가장 먼저 가르치는 것은 ‘앉아’, ‘가만히 있어’라고 한다. 개들도 배우는 이것을 어떤 사람들은 평생 배우지 못한다. 그들은 ‘바빠’, ‘급해’를 입에 달고 정신없이 달려간다. 가끔 앉아서 가만히 있는 것은 삶에서 아주 중요한 일이다.”

삶의 속도를 줄여야 마음을 돌아볼 수 있고, 자신의 마음 상태를 온전하게 인지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김진세 원장은 ① 먼저 스트레스를 인지하고 ② 스트레스를 평가하고 ③ 스트레스 해소 방법을 실행하라고 조언한다. 휴식이든 운동이든 친구와의 수다든, 스트레스의 성격에 따라 건전하고 현실에서 적용 가능한 방법을 찾으라는 설명이다.

분노를 다스리고 싶다면 분노(스트레스) 일기를 쓰는 것이 효과적이다. 자신의 감정을 관찰하는 훈련으로 내가 지금 어디에 있고, 어디를 향해 가는지 감정을 객관화해 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

우리의 마음 근육은 훈련할수록 단단해진다. 긍정심리학의 창시자로 불리는 미국 마틴 셀리그만 펜실베이니아대 심리학 교수는 ‘암세포와 긍정심리’의 상관관계를 밝혀내 주목 받았다. 그는 쥐를 A, B, C 세 그룹으로 나눠 암세포를 주입했다. A그룹은 약간의 전기 충격으로 스트레스를 주고, 다른 방으로 도망가도 계속 전기 충격을 줘서 무력감을 심었다. B그룹은 전기 충격으로 스트레스를 줬지만 다른 방으로 도망가면 스트레스 환경을 피할 수 있도록 했다. C그룹은 암세포만 주입하고 스트레스 없는 편안한 환경에 뒀다.

3개월이 지난 후 결과는? 암 발병률이 가장 높은 그룹은 예상대로 A그룹(73%)이었다. 반전은 B그룹과 C그룹에서 나타났다. 편안한 환경에 있던 C그룹(50%)보다 스트레스가 있어도 피할 수 있는 길을 열어둔 B그룹(31%)의 발병률이 낮았다. 스트레스 자체보다 이를 어떻게 인식하는지가 중요함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여류 심리학자 수잔 코바사도 사업에 성공한 최고경영자(CEO)의 특성을 연구한 결과, 이들은 스트레스가 심한 직장에서도 질병에 걸리지 않고 결근도 잘 하지 않는다는 연구 결과를 냈다. 이들에게서 발견된 ‘슈퍼 면역력’은 통제감(contorl), 도전감(challenge), 몰입감(commitment)이란 ‘3C’였다.

정재승 한국과학기술원(KAIST) 바이오 및 뇌공학과 교수는 최근 한 특강에서 “행복과 만족감은 뇌가 통제할 수 있다고 느낄 때 오는 것이다”라며 “하고 싶은 일을 할 때 행복감이 크고 몰입감도 커져 좋은 성과를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새해 ‘당신의 웃는 뇌’를 위해 마음의 소리에 귀를 열어보자.

배현정 기자 grace@hankyung.com
[Big story] 참을 수 없는 공허함, 나를 채우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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