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텍시스템스 수천억원대 대출 사기, 수은·산은 또 연루돼
은행권에 또다시 대형 대출 사기 사건이 터졌다. 2014년 이른바 ‘모뉴엘 사태’로 금융시장이 홍역을 앓고 난 뒤 벌어진 사고여서 그 어느 때보다 긴장감이 높다.게다가 이번 사기 대출 사건 역시 ‘모뉴엘 사태’와 마찬가지로 한국형 히든챔피언이라고 불리던 업체가 연루돼 있어 ‘제2의 모뉴엘 사태’로 번질 것이라는 우려까지 나오고 있다. 최근 터치스크린 생산 업체 디지텍시스템스가 은행권으로부터 900억원대에 이르는 대출을 받는 과정에서 수억원의 로비 자금을 챙긴 금융 전문 브로커 일당과 은행 직원이 검찰에 적발됐다.
서울남부지검 금융조사2부는 지난 3월 22일 디지텍시스템스가 은행 대출을 받도록 알선해 주고 그 과정에서 10억원 정도를 챙긴 혐의로 투자 자문사 대표 최모 씨 등 브로커 3명을 구속했다고 밝혔다.
앞서 검찰은 지난 3월 18일 디지텍시스템스가 KDB산업은행(이하 산업은행)에서 250억원의 대출을 받도록 도와준 대가로 2000만원의 뇌물을 수수한 산업은행 본점 이모 팀장을 구속했다.
금융 브로커 일당에게 속아 넘어간 은행들은 2012년 말부터 2013년까지 디지텍시스템스에 약 900억원대의 돈을 빌려준 것으로 알려졌다. 은행별 대출액은 한국수출입은행(이하 수출입은행) 300억원, 산업은행 250억원, KB국민은행(이하 국민은행) 263억원, NH농협은행(이하 농협) 50억원 등이다. 무역보험공사는 50억원에 달하는 지급 보증서를 발급해 줬다.
사정 당국 관계자에 따르면 검찰의 이번 수사는 유승배 디지텍시스템스 전 회장의 뇌물 공여 혐의에 대한 첩보를 입수하면서 시작됐다. 검찰은 이번 사건이 2014년 발생했던 ‘모뉴엘 사기 대출’ 사건과 유사한 방식으로 이뤄진 것으로 보고 있다.
수출입은행과 산업은행 등 국책은행의 대출 규모가 상당하다는 것뿐만 아니라 브로커와 은행 직원까지 연루된 대출 사기 사건이기 때문이다.
검찰에 따르면 최 씨 등은 디지텍시스템스 재무이사 남모 씨로부터 은행권 대출을 대가로 10억여원을 받은 혐의를 받고 있다. 검찰 조사 결과 최 씨는 수출입은행에서 300억원, 국민은행으로부터 263억원의 대출을 알선해 주면서 4억5000여만원을 챙겼다.
또 다른 브로커 곽모 씨는 무역보험공사의 50억원 규모 지급 보증서 발급을 알선해 주는 대가로 3억여원을 받고 이모 씨는 농협에서의 50억원 대출을 대가로 2억7000만원을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검찰은 브로커들이 받은 자금이 은행 대출 담당자들에게 흘러들어 갔을 수 있을 것으로 보고 향후 은행 관계자들을 소환 조사할 방침이다. 검찰 수사 진행에 따라 향후 피해 규모는 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히든챔피언, 또 도마 위에 올라
이번 사건으로 세계시장을 지배하면서 적극적으로 해외시장을 개척해 나가는 중소·중견기업을 육성하는 ‘한국형 히든챔피언 사업’이 또다시 도마 위에 오르고 있다. 모뉴엘과 디지텍시스템스 모두 수출입은행의 히든챔피언 육성 사업 지원을 받다가 사고가 터진 업체들이기 때문이다. 모뉴엘은 컴퓨터를 비롯해 로봇 청소기 등 가전제품을 제작, 판매해 온 정보기술(IT) 기반의 종합 가전 회사였다.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가 2007년 세계 최대 가전전시회(CES) 기조연설에서 모뉴엘을 주목할 만한 회사로 지목할 정도로 명성이 자자했다. 수출입은행 또한 이를 인정해 2012년 모뉴엘을 히든챔피언 인증 기업으로 선정했다.
그런데 2013년 10월 20일 모뉴엘이 법정 관리 신청을 하면서 상황이 급격히 달라졌다. 관세청 조사 결과에 따르면 수출입은행이 적극적으로 홍보해 줬던 모뉴엘의 매출 1조원 달성과 해외 수출 실적은 모두 분식회계로 조작한 가짜 매출이었다. 모뉴엘이 이런 사기 행각으로 국책은행과 시중은행에서 빌린 돈이 무려 3조2000억원에 달했다.
디지텍시스템스는 수출입은행이 2013년 히든챔피언 육성대상자로 선정해 적극적 지원에 나선 곳이었다. 디지텍시스템스는 스마트폰용 터치스크린 패널을 생산하는 삼성전자의 협력사였다. 디지텍시스템스는 2012년 국내에서 스마트폰용 터치스크린 패널 생산 1위를 기록한 기업이기도 하다.
하지만 2012년 한 투자 전문 회사에 인수되면서 회사는 급격히 몰락의 길을 걷다가 2년이 채 안 돼 부도를 맞게 된다. 디지텍시스템스는 극심한 자금난과 대출금 연체로 2014년부터 법정 관리를 받다가 2015년 1월 상장폐지됐다.
디지텍시스템스의 매출은 2011년 1386억원에서 2012년 2130억원, 2013년에는 2319억원까지 증가했다. 영업이익은 2011년 73억원에서 2012년 153억원으로 증가했지만 2013년에는 221억원의 영업손실을 기록했다.
부채비율은 2011년 61%였고 2013년 3분기까지 100%를 넘기지 않았지만 2013년 4분기엔 544%로 급등했다. 이처럼 갑작스레 대규모 적자가 발생한 것은 그동안 디지텍시스템스가 분식회계를 통해 기업의 이익을 부풀리다가 더 이상 손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디지텍시스템스는 2012년 회계장부와 증빙 서류 등을 조작해 매출과 매출 채권을 허위 계상했고 사지도 않은 기계를 구입한 것처럼 꾸며 유형자산도 허위로 계상했다. 이 때문에 디지텍시스템스는 증권선물위원회로부터 구매 계약 매출 서류 허위 작성 등의 사유로 2014년 3억5900만원의 과징금을 부과 받았다.
◆대출 사기 왜 반복되나
그런데도 은행권으로부터 수백억원대에 이르는 대출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은행들의 그동안 서류 중심으로 여신 심사를 해 왔기 때문이다. 업체가 기계 구입 등을 허위로 계산해 매출에 반영하는지 여부는 은행이 현장 심사를 나가면 바로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이를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채 수백억원대의 대출을 내줬다는 것은 은행권의 여신 심사 체계의 구멍이 여전히 크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한 업계 관계자는 “은행들이 대출 심사를 할 때 현장 확인을 하지 않는 것은 심각한 문제”라며 “사실 국책은행들은 그동안 안일한 측면이 있었다”고 지적했다.
이 관계자는 "모뉴엘 사태 때 우리은행·신한은행 두 은행만 유일하게 피해를 보지 않았는데 사실 두 곳 모두 원래는 대출을 해 줬었다. 한 곳은 모뉴엘의 홍콩 공장을 직접 실사한 뒤, 또 한 곳은 기업 재무제표를 면밀히 검토한 뒤 이상한 점을 파악해 일찍 발을 뺀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수출입은행 등 국책은행들은 ‘히든챔피언 육성 사업’의 일환으로 중소·중견기업에 대한 대출에 대해 시중은행에 비해 관대한 편이었다. 그러다 보니 모뉴엘 사태와 같이 히든챔피언 육성 사업에 선정돼 지원을 받은 기업들이 대규모 배임·횡령 등 범죄에 연루되는 사고가 종종 발생했다.
계속되는 대출 비리에 은행의 건전성 또한 악화 일로를 걷고 있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은행의 부실 채권액은 30조원으로 전체 은행권 여신 1664조3000억원의 1.80%를 차지했다. 2014년보다 5조8000억원, 0.25% 포인트 증가한 수치다.
은행 부실채권을 급증시킨 장본인은 바로 산업은행과 수출입은행 등 국책은행이었다. 산업은행의 부실채권은 2014년 3조1000억원에서 지난해 말에는 7조3000억원으로 1년 동안 배 이상으로 늘어났다. 수출입은행도 1조4000억원이었던 부실채권 규모가 4조원으로 증가했다.
그나마 산업은행은 지난해 조선과 해운 등 기업 구조조정을 전담하면서 기업 부실을 떠안게 됐다는 특수 상황에 놓여 있었다. 이에 비춰 보면 수출입은행의 건전성 지표는 위험한 측면이 있다는 지적이다.
◆“은행들 과도한 실적 압박 벗어나야 한다”
정부와 은행도 이제 더 이상 손 놓고 지켜보기만 할 상황이 아니다. 모뉴엘 사태로 은행권에 대혼란이 벌어진 이후 ‘제2의 모뉴엘 사태’를 막기 위한 대책들을 쏟아냈다.
중소기업청·수출입은행·무역보험공사·한국거래소 등 11개 관련 부처는 지난해 3월 ‘한국형 히든챔피언 육성 실무협의회’를 개최하고 히든챔피언 기업 기준과 선정 후 사후관리 및 검증 절차를 강화하는 방안을 마련했다.
이에 따라 수출입은행·한국거래소·무역보험공사 등 공공 기관들은 지난해부터 히든챔피언 기업 선정, 평가 시 경영자의 도덕성 및 평판 지표를 신설하고 경영자 인터뷰를 도입하는 등의 조치를 취하기로 했다.
특히 수출입은행은 히든챔피언 제도 전면 재정비에 나섰다. 모뉴엘 사태가 터진 이후 수출입은행은 지난해 4월부터 3개월간 히든챔피언 사업 성과 중간 점검을 위해 삼정회계법인 컨설팅을 거쳐 평가 지표 재정비와 다면 평가 도입, 부실 징후 기업 모니터링 강화 등 제도 개선 방안을 마련해 지난해 8월 발표했다.
수출입은행은 히든챔피언에 대한 검증을 강화하기 위해 외부 전문위원을 위촉하고 연간 2회 현장 방문 및 사후 관리를 강화하는 한편 다면 평가제를 도입하기로 했다.
하지만 이 역시 표면적인 대책에 그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전문가들은 은행들이 ‘대출 사기꾼’에게 휘둘리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과도한 실적 압박에서 벗어나는 게 급선무라고 말한다.
전성인 홍익대 경제학부 교수는 “모뉴엘 사태는 금융권에 만연한 ‘외형 확장’, 현장 확인을 하지 않는 부실한 ‘대출 심사 관행’, 당국의 섣부른 ‘수출 진흥책’이라는 3가지 요인이 맞물려 빚어진 비극이었다”며 “이런 문제는 아직까지도 이어지고 있고 특히 수출입은행은 대부분이 연관돼 있기 때문에 수출입은행에 기반한 수출 산업 정책이 잘되고 있는지 주도면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전 교수는 또 “제2의 모뉴엘 사태를 막기 위해서는 국책은행들의 안일한 대출 심사 관행을 전면적으로 정비하고 은행들의 무모한 외연 확장으로 생긴 문제는 강력하게 문책하는 식의 방안 마련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용어 설명] 한국형 히든챔피언
그동안 독일의 경영학자 헤르만 지몬이 제시한 ‘히든챔피언’ 개념이 지나치게 단순해 객관적 측정이 곤란하다는 지적이 제기돼 왔다(헤르만 지몬은 세계시장 점유율 1~3위, 매출액 50억 유로 이하, 낮은 대중 인지도 등을 히든챔피언 주요 개념으로 제시함).
한국 정부는 이를 변형해 ‘한국형 히든챔피언’ 개념과 기준안을 발표했다. 이에 따르면 ‘한국형 히든챔피언’은 ▷세계시장 지배(세계시장 점유율 1~3위) ▷집중적 연구·개발(매출 대비 R&D 비율이 3년 평균 2% 이상) ▷적극적 해외시장 개척(매출 대비 수출 비율이 3년 평균 20% 이상) ▷중간 규모 기업군(매출 100억원 이상의 중소·중견기업) ▷독자적 성공 기반(국내 특정 대기업 납품 비율 50% 미만)을 갖춘 중소·중견기업을 뜻한다.
한경비즈니스=조현주 기자 cho@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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