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산적 퓨전은 상품과 국가의 운명을 가른다
너도나도 융합을 외친다. 이전처럼 어떤 하나 뛰어난 것을 갖고 성공하던 시대는 지났다. 물론 지금도 월등한 제품이라면 상당 기간 독점적 지위를 누릴 수 있다. 하지만 이제는 그것을 따라잡는 시간이 갈수록 좁아지고 있다.문제는 각각의 가치를 서로 최적화된 방식으로 조합해 각각을 더하는 게 아니라 각각을 곱하는 방식으로 엄청난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것이다.
애플은 생각보다 기술적 독점성을 갖고 있지 않다. 그런데도 그들은 세계시장을 장악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경쟁 회사보다 훨씬 높은 수익성을 갖고 있다.
삼성전자가 전체 매출액은 많지만 수익에서는 애플과 경쟁이 되지 못하는 걸 보면 단적으로 알 수 있다. 21세기에 스티브 잡스가 재기해 애플을 완벽하게 성공시킨 것은 바로 융합의 힘 덕택이었다.
![[김경집의 인문학 속으로] 어설픈 '융합'은 '혼란'만 부추긴다](http://magazine.hankyung.com//magazinedata/images/raw/201604/6ccb271cbc52ad46aacd82aafd6b89c3.jpg)
본디 융합이라는 말은 물리학 용어다. 사전적 의미로는 ‘다른 종류의 것이 녹아 서로 구별이 없게 하나로 합해지거나 그렇게 만듦, 또는 그런 일’을 지칭한다. 영어로 퓨전(fusion)이다. 퓨전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아마 음식일 것이다. 지금도 퓨전 음식이 각광 받고 있다. 하지만 어설픈 퓨전은 속된 말로 ‘내 맛도 네 맛도 아닌’ 얼치기이기 쉽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필자는 블로그 등을 통한 맛집 정보를 그다지 믿지 않는다. 그들의 평가를 믿지 않는다는 게 아니라 맛에 대한 성향이 다르기 때문이다. 블로그는 대부분이 젊은이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그리고 음식에 대한 정보의 욕구는 그들 세대가 강해, 어디에 가서 맛난 것을 먹으면 꼭 개인적 감상을 올린다. 그런데 그들의 입맛에는 달착지근한 게 당기는 모양이다. 그래서 주로 그런 음식들이 많다.
이른바 퓨전 음식에 대해서도 그렇다. 사진으로 찍어도 훨씬 그럴 듯해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 등을 통해 부지런히 올린다. 하지만 그저 달착지근한 음식은 처음에는 입에 당길지 모르지만 금방 싫증난다. 깊은 맛이 없다.
대부분의 퓨전 음식들은 달착지근하다. 적어도 필자가 먹어본 맛의 범위 내에서는 그렇다. 음식이건 뭐건 퓨전을 하려면 그 대상과 주체에 대한 완전한 이해와 마스터가 필요하다. 그게 없이 그저 대강 섞기만 하면 그건 퓨전이 아니다. 그건 바로 다름 아닌 컨퓨전(confusion)이다.
요즘은 다른 즐길 것들이 많아 그런지 예전만큼 오디오에 대한 애착이 그리 강하지 않은 것 같다. 예전에는 세운상가나 충무로의 음향기기 전문점에 들러 눈과 귀 요기하는 것도 별미였다.
물론 늘 호주머니의 빈약함 때문에 뒷걸음질할 때가 많았지만 오디오에는 브리티시 사운드와 아메리칸 사운드라는 게 있다. 요즘에야 그 명확한 구분이 모호해지고 있지만 여전히 그 차이가 존재한다. 최근에는 덴마크를 중심으로 한 이른바 북구 사운드라는 것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전자기기의 선두 주자라고 자신하는 일본은 그런 다양한 소리를 모두 소화할 수 있는 방식을 추구했다. 그걸 깨려고 일본은 두 음색을 섞었다. 하지만 결국은 자기 음색의 정체성만 상실하고 말았다. 일본의 음향 기기가 소형 기기에서는 대중적이지만 하이엔드에서는 맥을 못 추는 까닭은 바로 그런 어설픈 통합 때문이었다.
◆정체성과 융합의 문제
명확하게 정체성을 정립하지 않은 용융(熔融 : fuse)은 어설픈 겉절이와 같다. 그것은 결국 정체성의 상실을 초래했다. 럭셔리에는 반드시 정체성이 있다.
융합은 바로 그 정체성을 잃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정체성을 창조하거나 각각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완벽한 조화를 이끌어 내는 것이다. 퓨전 푸드에서도 드물게 성공한 케이스는 바로 그러한 점을 정확하게 포착한 것들이다.
이러한 문제는 비단 상품에서만 나타나는 게 아니다. 역사에서도 국가나 사회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하지만 성공하기 위해서는 면밀한 성찰과 시대정신과 미래 의제가 조화돼야 한다. 19세기 후반 동아시아 삼국을 보자. 중체서용(中體西用), 동도서기(東道西器), 화혼양재(和魂洋才)는 모두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면서 서양의 물질문명을 수용하자는 움직임이었다.
중체서용은 청나라 때 태평천국의 난 이후 일어난 양무(洋務)운동의 기본 사상으로, 외국 열강의 침입에 대한 대응책으로 증국번·이홍장 등이 주도했던 사상이다. 그것은 중국의 전통적 유교정신을 중심으로 서양의 과학기술과 문명을 도입해 강화하자는 운동이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실패했다. 동도서기는 1880년대 초 조선의 정치가이며 학자인 김윤식이 주장한 것으로, 우리의 전통적인 제도와 사상을 지키면서 근대 서양의 과학기술을 받아들이자는 이론이었다. 하지만 역시 실패했다.
화혼양재는 일본의 개화론자들이 내세운 주장으로, 화(和 : 일본)의 정신 위에 서양의 유용한 것들만 가져와 사용하자는 움직임이었다. 결과적으로 일본의 이러한 운동은 성공적이었다.
그렇다면 왜 청과 조선의 움직임은 실패했을까. 기존의 교조주의적 태도를 버리지 못하고 여전히 기존 질서의 계속적 유지를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기존 사회 체계의 개혁을 꾀하지 않으면서 새로운 기술만 도입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정신문화와 물질문화는 분리될 수 없다. 그 점을 간과했기 때문에 실패했다.
일본도 기존 사회 체계를 완전히 개혁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들은 유신(메이지유신)을 통한 새로운 변화를 권력의 핵심이 받아들였기 때문에 새로운 문화와 문명을 나름대로 흡수할 수 있었다.
그들은 체계적으로 서양의 학문을 수용했고 과감하게 학자들을 서양에 보냈다. 그에 비해 조선과 청은 어설픈 퓨전만 추구했다. 그건 퓨전이 아니라 컨퓨전으로 끝났다. 한 세기가 훨씬 지나 다시 퓨전을 외치고 있다. 생산적 퓨전이 되기 위해서는 과거의 실패를 거울삼아야 한다.
김경집 인문학자(전 가톨릭대 인간학교육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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