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신인맥⑩ 두산그룹]
{1896년 종로4가 박승직상점이 모태…형제 경영 이어 사촌 경영으로}

[한경비즈니스=차완용 기자] “점원 없이는 상점이 상점이 될 수 없으며 좋은 점원은 곧 그 상점의 보배올시다.”

1929년 ‘매일신보’에 담긴 담화문에서 두산의 박승직 창업자는 이같이 말했다. 박승직 창업자의 인재 중심 경영은 두산그룹의 120년을 관통한다. 국내 최장수 기업, 국내 첫 4대 계승 기업인 두산의 슬로건 ‘사람이 미래다’도 이러한 맥락에서 탄생했다.
‘한 말 한 말 쌓은 태산’ 120년 이어진 “두산 웨이”
◆전문 경영인 제도 국내 최초 도입

두산의 역사는 1896년 서울 종로4가 배오개 인근의 포목점 ‘박승직상점’에서 시작됐다. ‘배오개 거상’으로 불린 박승직 창업자는 앞서 부보상단을 따라다니며 장사 수완을 길렀다.

전국 각지에서 수요가 있는 제품을 고르는 안목을 키웠고 그 결과 박승직상점의 대표 상품 ‘박가분’을 탄생시켰다. 서양에서 들여오는 비싼 화장용 분가루를 저렴한 가격에 질 좋은 제품으로 제조한 박가분은 단숨에 박승직 창업자를 거부로 만들었다.

박승직상점은 1925년 근대적인 기업 ‘주식회사 박승직상점’으로 재편된다. 박승직 창업자는 달력과 신문 광고로 기업을 알렸고 판매 상품도 다양화하며 시대 분위기에 발맞췄다. 급변하는 환경 속에 박승직 창업자는 또 한 번 변화를 선택한다. 소화기린맥주의 주주로 참여한 것. 소화기린맥주는 두산 초창기 대표 사업인 OB맥주의 시초다.

박승직 생가는 1920년 서울 종로구 연지동에 지어졌다가 1991년 두산이 그룹사옥인 연강빌딩을 신축하면서 이천공장으로 옮겨졌다. 이후 1998년 두산이 이천공장과 OB맥주 경영권을 인터브루에 매각할 때 생가 소유권도 함께 넘어갔다. 두산그룹은 경기도 이천 OB맥주 공장안에 보존해온 창업주 생가를 단돈 1원에 되사들여 광주시 탄벌리 문중 선산으로 옮겼다.

두산그룹의 실질적인 창업자로 불리는 박승직 창업자의 장남 박두병 초대 회장은 광복 후 박승직 상점을 두산상회로 바꾸고 무역업과 음료 산업에 집중한다. 소화기린맥주를 인수해 동양맥주로 키웠고 두산산업·동산토건(현 두산건설) 등을 설립해 두산그룹의 기초를 닦았다.

박두병 회장은 1966년 합동통신사를 인수해 언론의 민주화에 공헌했고 3년 뒤 한국 경제 사상 최초로 ‘전문 경영인 체제’를 도입하는 파격을 단행했다. 박두병 회장이 이끄는 시기의 두산은 13개의 회사를 설립·인수했고 349배의 매출 성장을 기록했다.

‘한 말 한 말 쌓아 태산같이 이룬다’는 사명처럼 박두병 회장은 정도 경영과 내실 경영으로 두산을 만들었다.

전문 경영인 시기가 지나고 1981년 ‘공동 소유, 공동 경영’의 형제 경영 시대가 시작됐다. 두산은 박용곤 명예회장 취임 후 맥주·건설·기계·무역·전자 부문에서 수출에 날개를 달았지만 1991년 ‘낙동강 페놀 사건(두산전자의 페놀 원액 유출)’이 터졌다.

큰 홍역을 치른 두산그룹은 1996년 100주년 행사를 가졌다. 박용곤 명예회장은 이 자리에서 박용오 회장에게 총수 직위를 물려줬고 두산의 형제 경영은 물 흐르듯 이어졌다. 박용오 회장은 현장 중심 경영으로 두산을 이끌었다.

취임 직후 100일간 100개 사업장 순방, 109건의 애로 사항 개선, 2년간 150개 사업장 2회 이상 방문 등 수치로도 나타난 박용오 회장의 경영 철학은 신노사 문화를 창출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박용오 회장이 단행한 획기적인 구조조정 역시 두산의 기업 가치를 제고했다. 가치를 창출해 내지 못하는 자산·사업은 과감하게 매각했고 국내 최초 캐시플로 경영을 정착시켰다. 박용오 회장의 파격 행보는 16개 주력 계열사를 단 5개로 통합한 데에서도 엿보인다.

“‘두산 웨이’를 통한 두산 고유의 경영 방식 정립 등 실천 목표를 달성해 고객과 사회로부터 신뢰와 존경을 받는 기업, 100년 철학 속에서 끊임없이 변혁을 추구하는 기업, 세계 속에 우뚝 선 기업으로 성장하는 데 우리 모두 최선을 다하자”고 당부하며 현장을 진두지휘했다.
‘한 말 한 말 쌓은 태산’ 120년 이어진 “두산 웨이”
◆글로벌 중공업 그룹으로 대변신

하지만 박용오 회장 체제 10년 만에 두산그룹에 ‘형제의 난’이 터졌다. 가족회의의 뜻에 따라 2005년 박용성 회장이 회장직을 넘겨받았지만 박용오 회장이 검찰에 그룹 경영 현황을 비방하는 투서를 제출하면서 이른바 ‘형제의 난’이 벌어졌다.

이 사건으로 두산그룹은 검찰 조사와 법원의 징벌은 물론 박용오 회장의 가문 퇴출, 자살이라는 비극을 맛봤다. 이후 두산은 이후 전문 경영인 체제로 바뀌어 유병택 부회장이 경영을 맡게 된다.

이 시기 그룹 회장직은 공석이었지만 실질적으로 박용만 회장이 중추적 역할을 했다. 당시 박용만 회장은 대규모 인수·합병(M&A)을 추진하면서 두산그룹을 글로벌 중공업 기업으로 전환시켰다.

한국중공업·고려산업개발·대우종합기계와 건설 장비 업체 밥캣 등 10여 건의 굵직한 M&A가 진행됐고 박용만 회장은 ‘미스터 M&A’로 불리며 그룹의 주력 사업을 소비재에서 중공업으로 탈바꿈시켰다. 1996년 4조원대에 불과했던 두산그룹 매출은 2008년 23조원대로 10여년 만에 5배나 불어났다.

이후 2009년에는 넷째인 박용현 회장이 두산그룹을 이끌게 된다. 박용현 회장은 2012년까지 두산그룹 회장직을 수행했다. 하지만 중공업을 중심으로 한 경기 불황이 지속되자 결국 구조조정이라는 칼을 꺼내며 조직 재정비에 나섰다.

구조조정을 통한 재무구조 개선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한 올해 초 박용만 회장은 결단을 내렸다. 그룹 회장 자리를 박정원 (주)두산 지주부문 회장에게 넘겨준 것이다.

이에 따라 두산의 새로운 역사는 박정원 회장이 써 나가게 됐다. 120년의 역사와 함께한 두산가의 상인 정신과 장수 기업 요인들이 박정원 회장의 지휘 아래 어떻게 변하게 될지 주목된다.

cw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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