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국의 심리학 카페]
사랑도 일도 본인이 원해야 한다
인정받고 싶은 본능적 욕구의 향연
(사진) 다미엔 차젤레 감독의 뮤지컬 영화 ‘라라랜드’의 한 장면.

[한경비즈니스=김진국 문화평론가·융합심리학연구소장] “남자는 자신을 알아주는 이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 여자는 자신을 좋아하는 이를 위해 화장을 한다.”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나오는 말이다. 이 말은 사마천이 살던 시절보다 훨씬 이전부터 21세기인 지금까지도 유효하다. 적어도 심리학적으로는….

◆꿈꾸는 바보들을 위한 헌사

침팬지는 어떨까. 침팬지들은 전형적인 마키아벨리스트다. 침팬지 사회에서 권력을 잡으려면 인간 사회 뺨치는 치열한 합종연횡과 목숨을 건 투쟁이 필요하다. 그들의 지배성은 ‘폭력에서 나오는 두려움’에 기반을 두고 있다.

집권한 우두머리 수컷은 먹잇감에서부터 암컷과의 짝짓기 순서까지 거의 모든 것에 대한 독점적 우위를 갖는다. 침팬지는 인정받고 싶은 욕구, 대접받고 싶은 욕구를 권력을 잡는 것으로 일거에 해결한다.

같은 영장류라고 사람들이 침팬지와 같을 수는 없을 것이다. ‘사기’에 나온 말처럼 사람들도 누구나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본능적인 욕구가 있다. 그 옛날 인류의 조상들이 사바나 초원에 살던 시절부터 이런 욕구는 있었을 것이다. 수렵시대에는 사냥에 최적화된 체격과 체력을 가진 남성이 가장 인정받았을 것이고 그에 합당한 대우가 따랐을 것이다.

농경시대가 되고 사회 생산력이 발전함에 따라 남아도는 식량을 바탕으로 다른 집단의 사람을 끌고와 노예로 부리는 등 다양한 계층이 존재하게 됐다. 이 말은 이제 전쟁이나 사냥에 능한 전사나 사냥꾼들만 인정받는 사회가 아니라 각자 다양한 영역에서 자신의 능력에 따라 사회적인 명성을 얻을 수 있게 됐다는 것을 뜻한다.

“명성 서열은 영역 특정적 경향이 있다. 어떤 사람은 더 뛰어난 사냥 기술을 가진 사람에게 복종하겠지만 어떤 사람은 더 뛰어난 의술을 가진 치유사에게 복종할 수 있다.” 진화심리학자 데이비드 버스에 따라면 두려움에 근거한 지배성과 달리 ‘명성’은 ‘자발적으로 바친 존중’이다.

사냥 영웅, 전쟁 영웅의 시대를 지나 이제 장르별로 등장하는 수많은 유형의 체육 영웅, 문화 영웅들까지 일별하다 보면 사람들이 인정받고 싶은 욕구를 해소하는 방법도 참 다양하게 발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음악 영화 ‘위플래쉬’를 만든 다미엔 차젤레 감독이 연출한 뮤지컬 영화 ‘라라랜드’. 외형상 ‘라라랜드’는 예술에 대한 열정과 남녀의 사랑을 다루는 영화이지만 실제로는 사람들의 인정받고 싶은 욕구를 정면으로 다룬다.

할리우드가 자리한 로스앤젤레스에 예술가로서의 성공을 꿈꾸는 배우 지망생 미아(엠마 스톤 분)와 재즈 피아니스트 세바스찬(라이언 고슬링 분)이 있다. 그들은 지금 각자의 장르에서 자신만의 개성을 바탕으로 사람들의 인정을 받고 싶어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녹록하지 않다.

학교를 몇 년째 휴학하고 배우가 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하지만 오디션에서 번번이 떨어지는 미아는 낙망해 낙향해 버린다. 세바스찬이 그녀의 꿈과 열정을 상기시키며 위로한다. 천신만고 끝에 마침내 유명 배우로 우뚝 선 미아. 한편 이미 한물간 재즈에 대한 사랑만으로는 사회적인 인정은커녕 당장의 생계 해결부터 힘든 세바스찬.

경제적인 부와 사회적인 명성이 보장된 보컬 그룹에서 활동을 시작한 그에게 미아가 묻는다. “이게 진정 네 꿈이야?” 세바스찬은 그룹을 나와 자신의 힘으로 재즈클럽을 만들어 성공한다.

정신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정신 건강에 필요한 두 가지 조건으로 일과 사랑을 꼽는다. 융 심리학자 제임스 홀리스는 이를 받아 이렇게 말한다. “사랑이 간절한 사랑이어야 하듯이 일도 본인이 원하는 일이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일이 우리의 영혼을 뒷받침하지 않는다면 영혼은 엉뚱한 곳에서 청구서를 제시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경제적인 문제, 부모나 사회의 압력에 굴복해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직업을 택해 결국 영혼으로부터 청구서를 받을 것인가, 아니면 제임스 홀리스의 표현처럼 영혼이 원하는 직업, 즉 천직을 택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인정받고 싶은 본능적 욕구를 가진 인류가 대를 이어 직면하는 영원한 과제일 것이다.

‘라라랜드’는 이 질문에 하나의 모범 답안을 제시하고 있다. ‘라라랜드’는 영화 속의 가사처럼 ‘꿈꾸는 바보들을 위하여, 마음 아픈 가슴들을 위하여, 망한 삶들을 위하여’ 그들에게 바치는 헌사이며 추위에 떠는 그들을 위로하는 따뜻한 한잔의 커피와 같은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