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코인 A to Z]
‘통제에서 벗어난 개인’을 현실로 만들어 내는 비트코인의 힘
하이에크와 프리드먼이 꿈꾼 미래
[오태민 크립토비트코인 연구소장, '스마트 콘트랙 : 신뢰혁명' 저자] 20세기 들어 금본위제가 퇴조하자 화폐 인쇄기와 은행의 신용 창출 제도를 거머쥔 정부는 인플레이션을 활용해 국민들의 저축에 세금을 징수해 왔다. 문제는 정부를 제어할 고삐가 없어졌다는 사실이다.

돈에 대한 사람들의 관념이 금에 고착돼 있는 동안에는 정부 발행 화폐가 금과 연결돼 있다고 믿도록 해야 했다. 하지만 대공황과 1차·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화폐에 대한 막강한 권력을 장악한 정부는 실낱같이 남아 있던 금과의 연결고리 자체를 노골적으로 부정하기에 이른다.

이런 조건에서라면 금본위제도를 부활시킨다고 해봐야 정부의 통제로부터 자유롭기 어렵다는 것을 깨달은 경제적 자유주의자들은 새로운 화폐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금처럼 정부가 통제하거나 빼앗을 수 없는 신물질이어야만 했다. 금은 순도에 대한 진위 판별과 보관이 어렵다. 이 때문에 신뢰받는 제삼자가 개입해 장부상으로만 거래하는 신뢰 기반의 시스템이었다. 하지만 정부는 금을 보관하는 신뢰 기구를 장악함으로써 금본위제를 통제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정부는 국민들의 재산권 행사를 제약할 수 있게 됐다.

노벨경제학자 수상자이자 경제적 자유주의의 거목인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는 폭력으로는 정부를 능가할 수 없기 때문에 뭔가 우회적이면서 지능적인 방법을 찾아야만 국가로부터 자유로운 화폐를 만들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하이에크가 이런 말은 한 해는 1984년이었고 그는 1992년 사망했다. 그는 인터넷조차 경험하지 못했다. 하지만 책 ‘비트코인 스탠더드’의 저자들은 하이에크의 통찰력이 비트코인의 존재 의의를 그 누구보다 잘 설명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역시 노벨상 수상자이자 자유시장의 옹호자인 밀턴 프리드먼은 말년에 인터넷의 성장을 목격했다. 그는 인터넷에 의해 분산 시스템이 부상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인터넷 때문에 정부가 개입할 수 없는 화폐가 등장할 것을 예상했다. 그는 사실상 비트코인의 작동 원리를 묘사하는 발언도 했다. 서로 전혀 알지 못하는 두 거래 상대가 인터넷을 이용해 자금을 이전하면서 거래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또 프리드먼은 미국 중앙은행(Fed)의 화폐 통제권을 회수해 화폐 발행 스케줄을 자동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프리드먼의 이 생각을 알고 있었을 게 분명한 비트코인의 창시자는 외부의 개입 없이 정확한 일정에 따라 비트코인 발행량이 조절되도록 디자인했다.

정부를 따돌리는 데 금보다 강력한 비트코인의 속성을 실험하는 장이 바로 베네수엘라다. 베네수엘라는 전국적으로 생필품이 부족하다. 한술 더 떠 정부는 생필품을 친정부적인 지역에 우선적으로 공급하며 정치적 무기로 삼고 있다. 그래서 베네수엘라에선 달러와 비트코인이 통용되는 암시장이 커지고 있다. 하지만 정부는 전기를 많이 사용하는 집에 들이닥쳐 채굴업자를 체포하거나 암호화폐 마이닝과 관련한 컴퓨터 기기의 수입을 금지했다. 또 암호화폐 온라인 거래소도 폐쇄했다.

-암호화폐로 베네수엘라 국민 돕는 사람들

정부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베네수엘라의 암호화폐 생태계는 성장하고 있다. 가장 큰 원인은 인플레이션 때문이다. 베네수엘라 통화인 볼리바르는 2011년 이후 지금까지 99.99%의 가치를 하늘로 날렸다. 지난해 12월 비트코인을 구입한 베네수엘라 주민이라면 비트코인 가격이 2만 달러에서 6000달러로 하락했어도 볼리바르 기준으로는 이익이었다.

하이퍼 인플레이션으로 고통 받는 베네수엘라 주민들을 위해 암호화폐를 공급하는 국제적인 캠페인이 진행되고 있다. 베네수엘라 시민들에게 비트코인 캐시를 보내 무상으로 음식을 제공하는 이트비시에이치(https://twitter.com/eatbch)라는 트위터 캠페인이 주목받고 있다. 수수료가 비싼 비트코인보다 비트코인 캐시가 저개발국가 시민들에게 더 유용한 전자화폐가 될 것이라는 주장을 입증하려는 비트코인 캐시 커뮤니티의 열정 덕분에 이 캠페인은 현재 아프리카의 수단까지 확장됐다.

또 페일블루재단(Pale Blue Foundation)은 골드만삭스에 근무하던 조너선 휠러가 시작했다. 베네수엘라 주민들에게 비트코인을 공중투하해 주민들의 고통을 경감하고 정부의 인플레이션 의지를 꺾겠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정부의 간섭을 따돌리기 위해 구체적인 계획을 언론에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베네수엘라 주민들의 딱한 사정에 공감하는 지구촌 시민들로부터 기부 받은 비트코인을 베네수엘라 주민들에게 송금한다.

다양한 경로를 통해 암호화폐가 베네수엘라 경제에 투입된다면 외견상 인플레이션은 더 악화될 수 있다. 화폐 선택권이 늘어나면 볼리바르를 모으려는 유인이 더 줄어들어 볼리바르는 더 빨리 가치를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볼리바르가 사실상 휴지 조각이 된다고 해도 암호화폐가 통용되는 암시장의 규모가 커지면 사회 붕괴는 피할 수 있다. 궁지에 몰린 주민들이 자신의 재산과 노동의 가치를 지킬 수 있는 수단을 지니게 되므로 민간 차원의 생활 터전을 유지한 상태에서 정치적 격변을 견뎌낼 것이다. 하이에크와 같은 자유주의자들은 국가와 사회를 혼동하는 사고 습관을 경계한다. 그래서 어찌 보면 암호화폐를 통해 베네수엘라가 국가와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사회의 실체와 그 저력을 확인해 줄지 모른다.

한편 궁지에 몰린 베네수엘라 정부는 석유와 연동된 페트로라는 암호화폐를 정부 주도로 만들었다. 국가가 주도한 최초의 암호화폐 실험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페트로의 성공 여부는 블록체인이라는 기술이 본질인지 아니면 정부의 통제를 차단하는 능력이 본질인지 알려줄 것이다

[돋보기] 스마트 콘트랙트로 연결된 인간 네트워크 ‘아브라’
베네수엘라에 송금하거나 베네수엘라인들이 자산을 해외로 이전할 때 비트코인을 이용한다면 가장 큰 문제는 역시 가격의 빠른 변화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당장 이용할 수 있는 서비스가 아브라다.

아브라는 스마트 콘트랙트를 이용해 비트코인과 달러의 가격을 고정할 수 있는 지갑이다. 원래는 비트코인과 달러의 교환 서비스만 제공했는데 2018년부터 암호화폐 20개와 50여 종의 국가 화폐를 목록에 추가했다. 이 회사는 2017년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벤처 등으로부터 총 4000만 달러 규모의 투자를 받을 만큼 기존 금융권과도 가깝지만 금융의 우버라고 불리는 텔러(Teller) 시스템 같은 ‘파괴적인 모델’도 개발하고 있다.

텔러는 인간 현금자동입출금기(ATM)라고 할 수 있다. 은행이 없거나 은행의 암호화폐 취급을 금지한 지역의 주민들은 수수료 수익을 얻을 수 있는 텔러로 자유롭게 자원한다. 서비스 이용자는 텔러에게 현찰을 주고 암호화폐를 송금하거나 송금 받은 암호화폐 대신 현찰을 인출할 수 있다. 텔러는 아브라의 정교한 회계 시스템의 도움을 받기 때문에 가격의 변화에 따른 위험을 부담하지 않는다. 텔러 시스템은 지구적 네트워크와 연결된 통신 수단과 암호화폐를 적당히 배합하면 한 개인이 작은 은행을 대체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걸어다니는 무허가 은행들을 정부가 통제하는 것은 쉽지 않다는 점까지 고려하면 텔러의 잠재적 의미는 단순한 인간 ATM이라는 의미보다 훨씬 크고 근본적이다.

[본 기사는 한경 비즈니스 제 1182호(2018.07.23 ~ 2018.07.29)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