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페미니즘 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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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 안경을 쓰고 본 기울어진 투자 운동장’ 보고서 쓴 유보미 sopoong 심사역
[페미니즘 경제학]“스타트업 투자 심사에도 ‘젠더 관점’ 반영해야죠”
약력 : 2013년 케이팝유나이티드(크라우드펀딩 스타트업). 2016년 패스트트랙아시아(교육 스타트업). 2017년 sopoong(스타트업 액셀러레이터) 심사역(현).

[한경비즈니스=이정흔 기자]글로벌 컨설팅 업체인 보스턴컨설팅그룹(BCG)은 지난 6월 ‘왜 여성 창업가가 운영하는 스타트업에 투자하는 게 더 나은가’란 제목의 보고서를 발간했다.

요약하면 이렇다. 여성 창업가들은 남성 창업가들에 비해 투자를 유치하기가 더 힘들다. 실리콘밸리의 350개 스타트업을 분석한 결과 남성 창업가들이 평균 212만 달러의 자금을 유치할 때 여성 창업가들의 평균 유치 자금은 93만5000달러에 그쳤다. 남성 창업자들에 비해 절반에도 못 미치는 금액이다.

하지만 수익률은 여성 창업가들이 더 높다. 남성 창업가들이 평균 66만2000달러의 수익을 낼 때 여성 창업가들은 평균 73만 달러의 수익을 창출했다. 여성 창업가들이 운영하는 스타트업의 수익률이 더 높음에도 투자 유치 성공률은 더 낮은, 이른바 ‘젠더 투자 격차’가 존재하는 것이다.

소셜 벤처 임팩트 투자사인 에스오피오오엔지(sopoong 이하 소풍)는 올해부터 ‘젠더 관점의 투자’를 전면 적용했다. 여성이든 남성이든 창업가의 성별에 따른 ‘편견’을 극복하고 투자 기회가 골고루 돌아갈 수 있도록 심사 기준과 과정을 보완하기 위해서다.

소풍에서 ‘젠더 투자’를 담당하고 있는 유보미 심사역을 만났다. 지금 한창 ‘2018 하반기 소셜 벤처 정기 모집’을 진행 중이어서 1년 중 가장 바쁜 시기를 보내고 있다는 유 심사역은 점심시간을 쪼개 기자와 마주앉았다. 그가 그만큼 절실하게 들려주고 싶었던 얘기는 무엇일까.

◆실리콘밸리 여성 창업자 29%, 한국은 9%

한국스타트업생태계포럼(KSEF)이 지난 4월 발간한 ‘한국 스타트업 생태계 백서’에 따르면 서울'경기도 지역 여성 스타트업 비율은 9%다. 미국 실리콘밸리(29%), 이스라엘 텔아비브(20%), 싱가포르(19%), 영국 런던(18%)보다 크게 낮다. 이 비율은 정보기술(IT) 같은 기술 벤처 기업으로 갈수록 더 떨어진다. 벤처기업 중 여성이 대표인 기업의 비율은 8.7%로 예년에 비해 상승하는 추세지만 여전히 남성 벤처기업의 10분의 1에도 못 미친다.

왜 한국에서는 여성 창업가를 찾아보기 힘든 것일까. 유 심사역이 젠더 관점의 투자를 연구하기 시작한 것도 이런 고민이 계기가 됐다.

“2017년 여름 하반기 정기 투자를 마치면서 생각지 못한 결과가 나왔어요. 당시 투자를 지원한 팀의 20%가 여성 창업가팀이었는데 투자가 결정된 4개 팀 가운데 여성이 경영진으로 참여한 팀이 하나도 없었던 겁니다.”

에스오피오오엔지는 지난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에 맞춰 ‘젠더 안경을 쓰고 본 기울어진 투자 운동장’이라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바로 이 보고서를 담당한 유 심사역은 이후 젠더 투자와 관련한 프로세스를 구체화하는 작업에서도 중심 역할을 맡고 있다.

“이 문제를 조금 더 파고들면 사회적인 구조와도 얽혀 있는 문제죠. 지금 스타트업계에서 자본이 흘러들어가는 곳은 대부분이 IT를 기반으로 한 기술벤처인데, 일단 이 분야에 여성 창업자들이 적어요. 왜냐하면 여성의 고정된 성역할에 따라 이 분야에서 교육을 받거나 경력을 쌓아 온 여성 창업자가 적다는 겁니다. 우리가 이런 사회구조를 바꿀 수는 없겠죠. 하지만 적어도 벤처캐피털(VC)로서 더 많은 여성 창업자가 활동할 수 있는 스타트업 생태계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뭘지 고민해야죠.”

보고서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살펴본 국내 스타트업계는 통계상으로도 ‘남성 중심적인 구조’가 충분히 드러났다. 7년 미만의 창업 기업 가운데 여성이 설립한 기업은 38.4%, 이에 비해 2016년 투자를 유치한 국내 스타트업 244개 중 여성이 창업한 기업은 6.5%(16개)에 불과하다. 투자 금액도 전체 1조724억원 중 4.1%에 그쳤다.

여성 창업가도 적지만 여성 심사역도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2015년 기준으로 국내 여성 심사역은 전체 747명 중 57명(7.1%)로 나타났고 2016년 기준 한국 금융회사의 여성 경영진 비율은 4% 미만이다. 결론적으로 여성 창업가는 투자 유치 과정에서 여성 투자자나 여성 금융 전문가를 만날 가능성이 매우 낮고 이는 투자 생태계의 젠더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구조와 연결되는 것이다.

유 심사역은 ‘젠더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 우선 기존의 심사 과정을 하나하나 되짚어 보는 것에서부터 출발했다. 적어도 심사하는 과정에서 여성 창업가들에게 면접 기회 한 번이라도 더 줄 필요가 있다는 데 공감대가 모인 것이다.

“젠더 관점의 투자라고 해서 ‘여성 창업가에게 무조건 투자한다’는 게 아니에요. 다만 현재의 상황에서는 아무래도 남성 창업가에게보다 여성 창업가에게 덧씌워진 ‘편견’이 많은 게 사실이고 더군다나 이와 같은 편견들을 잘 눈치 채지 못하는 경우도 많죠. 이에 따라 그동안 우리가 놓쳤을 수많은 여성 창업가들을 더 이상 놓치지 말자는 의미가 더 컸습니다. 의식적으로라도 이런 편견을 벗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더구나 이미 실리콘밸리에서는 여성 창업가들의 수익률이 더 높다는 보고서도 다수 나와 있기 때문에 VC로서는 당연한 결정이었다고도 보고 있고요.”

◆숨은 편견 벗겨냈더니, 투자 선발된 여성 창업가팀 33%로 증가

에스오피오오엔지는 먼저 서류 선발 시 여성 창업가가 있는 팀의 비율이 지원 비율 이상이 될 수 있도록 심사 원칙을 적용했다. 대표적으로 소풍은 서류 평가 단계에서 2인 이상 여성 창업이고 사회적 가치가 있다면 무조건 서류 심사를 통과하도록 했다.

실사 과정에서도 성 차별적인 관점이 개입하지 못하도록 다양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했다. 기존의 세 가지 항목 외에 ‘다양성과 젠더 렌즈 항목’을 추가해 평가에 반영한 것이다. 내부적인 가이드라인을 통해 창업가뿐만 아니라 투자심사역의 젠더 감수성을 점검한다든지, 사전 액셀러레이팅(대면 면접) 과정에서 ‘젠더 관찰자’를 도입한 것이 대표적이다. 이와 함께 최종 투자 결정 시 최소 1개 이상의 여성 창업 기업이 포함되도록 해 과정상의 보완뿐만 아니라 실제 결과로 나타나게 했다.

“투자 심사 과정에서 의식하지 못한 채 여성 창업가에게 던지는 질문이 적지 않아요. 예를 들어 이제 막 애기를 낳은 창업가라고 하면 남성에게는 육아와 관련한 어려움을 굳이 질문하지 않죠. 하지만 여성에게는 ‘육아와 사업을 같이 할 수 있겠어요’라는 질문이 주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 여성이 IT 기업을 운영한다고 하면 ‘전문성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기술과 관련한 질문이 많아지는 경향도 나타나고요.”

유 심사역은 이와 관련해 대표적으로 5가지 편견을 제시했다. 첫째, 기혼 여성은 사업에 집중하기 힘들 것이다. 둘째, 여성은 남성보다 체력이 좋지 못하다. 셋째, 여성은 기술 기반의 전문성이 없다. 넷째, 여성은 기술 개발자 등의 팀 빌딩에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다섯째, 여성은 성과를 빠르게 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젠더 불평등을 해소하는 데 가장 효과를 본 것은 ‘젠더 관찰자’ 제도예요. 젠더 관찰자는 투자 심사 결정에 직접 관여하지는 않아요. 하지만 심사 과정에 직접 참여해 창업자에게 젠더 감수성과 관련한 가이드를 한다거나 질문을 던지는 역할을 하죠. 아주 간단한 예로, 여성 창업자가 육아 문제를 다루면서 ‘육아를 다루는 엄마’라는 표현을 지속적으로 쓴다고 해요. 그때 젠더 관찰자는 ‘왜 육아를 하는 사람이 엄마라고 생각하죠’와 같은 질문을 통해 관점을 바꿀 수 있도록 힌트를 주는 겁니다.”

올해 상반기 ‘젠더 관점의 투자’를 적용한 결과 실제 정기투자에 선발된 여성 창업가 팀의 비율은 33%까지 늘었다. 유 심사역은 ‘하반기 정기 투자 심사 과정’에서도 이를 조금 더 보완해 확대 적용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지난 상반기에 적용해 보니 어떤 부분을 보완해야 할지 조금 더 눈에 보이는 것 같아요. 예를 들어 개발자 중 여성이 몇 명이고 남성이 몇 명인지 이런 식으로 숫자로 보이는 성평등을 초기 스타트업들에 요구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더라고요.”

향후에는 스타트업들이 어떻게 젠더 감수성을 키우는 것이 왜 중요한지, 어떻게 그런 조직 문화를 만들어 나갈 수 있을지 등의 가이드라인을 마련하는 데 조금 더 중점을 둘 계획이다. 이와 함께 여성 창업가 외에 여성을 위한 제품이나 서비스를 개발하는 업체에도 젠더 투자의 대상을 점차 확대해 나갈 계획이다.

지금은 젠더 투자가 여성 창업자의 자본 접근성을 높이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지만 궁극적으로 ‘젠더 투자’는 여성이든 남성이든 고정된 성 역할에 갇히지 말고 보다 다양한 창업가에게 기회를 주기 위한 것이다. 여성이든 남성이든 그 대상이 될 수 있어야 진정한 의미의 ‘젠더 투자’가 가능해질 것이라는 판단이다.

“최근 들어 글로벌 스타트업계에서도 ‘젠더 투자 갭’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지만 구체적으로 투자 심사 과정에서 ‘젠더 투자’를 적용하기 위한 프로세스를 연구하고 도입한 시도는 아마 우리가 거의 세계 최초일 거예요. 그러다 보니 최근에는 국내뿐만 아니라 글로벌 스타트업 포럼 등에도 초대를 받아 우리 사례를 발표할 때도 많고요. 앞으로는 국내외에서 이와 같은 시도가 점차 늘어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vivaj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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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183호(2018.07.30 ~ 2018.08.05)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