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전략]
‘조지 부시와 시어도어 루스벨트’…두 미국 대통령이 선택한 ‘한 수’
이가 없다면 잇몸으로 협상하라
[한경비즈니스 칼럼=이태석 IGM 세계경영연구원 교수] 강한 상대와의 협상은 언제나 어렵다. 수많은 경쟁사를 제치고 대기업에 물건을 납품해야 하는 중소기업이나 주변 환경이 불리하게 돌아가는 상황에 놓인 협상가 등은 종종 어쩔 도리 없이 상대에게 끌려가곤 한다. 아무리 분석해도 협상력이 상대에 비해 초라하다면 그저 아쉬운 소리를 하면서 상대의 선처를 기다리는 방법밖에 없다.

하지만 정말 그래야만 할까. 이러한 상황을 뒤집고 협상을 유리하게 끌고 갈 수 있는 묘수는 없을까. 여기 기발한 사례를 소개한다. 자신이 가진 협상 대안이 형편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기가 막히게 상황을 반전시켰던 이야기다.

◆위기를 기회로 바꾼 시어도어 루스벨트

미국의 26대 대통령을 역임한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1912년 세 번째 임기를 위해 선거전을 벌이고 있었다. 선거전은 치열했다. 그러던 어느 날 선거본부에 예상하지 못한 문제가 발생했다.

루스벨트 대통령 후보의 포스터 300만 장을 인쇄해 배포하려는 상황에서 작은 글씨로 적힌 ‘시카고 모펫 스튜디오’가 발견됐다. 해당 사진의 사용 허가를 받지 않은 채 인쇄했던 것이다.
당시 사진 저작권은 1장에 1달러였던 만큼 총 300만 달러의 저작권료를 지불해야 했다. 이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비용이었다. 포스터를 다시 인쇄하는 것도 시간상 무리였다.

선거대책본부장은 난감했다. 칼자루는 명백히 시카고 모펫 스튜디오에 있었기 때문이다. 사진 저작권료를 깎아 달라고 사정하는 방법 외에는 다른 길이 없어 보였다. 만약 당신이 선거대책본부장이었다면 어떻게 해결했을까.

루스벨트 선거대책본부장은 이 어려운 상황을 어떻게 돌파했는지 보자. 그는 문제를 깊이 분석해 본 다음 사진작가에게 전문을 보냈다. “선거 포스터 300만 장에 사진을 실어 전국에 배포할 계획. 전국적으로 귀하를 알릴 수 있는 아주 멋진 기회. 귀하의 사진을 실어주는 대가로 얼마를 낼 용의가 있는지 즉시 답변 바람.” 이 전문을 받은 사진작가는 즉각 응답했다. “기회를 주셔서 고맙습니다만 250달러밖에 낼 수 없음.”

어떤가. 선거대책본부장의 협상 전략이 기가 막히지 않은가. 300만 달러를 지불해야 하는 위기를 오히려 250달러를 받는 상황으로 뒤집었다. 어떻게 이런 묘책을 생각했을까. 이 사례를 깊이 파고 들어가 보자.

선거대책본부장이 가진 BATNA(Best Alternative to Negotiated Agreement : 협상 대안)는 형편없었다. 시간적으로나 비용적으로나 포스터를 다시 제작하는 것도 무리였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가진 형편없는 대안을 사진작가에게 굳이 알리지 않았다. 그 대신 사진작가에게 아주 멋진 기회가 있다는 것을 알려줬을 뿐이다.

시카고 모펫 스튜디오를 운영하면서 어렵게 살던 사진작가는 250달러를 지불하고 그 기회를 잡은 것이다. 선거대책본부장이 성공한 핵심 요인은 그 자신이 더 불리했지만 사진작가가 그것을 알지 못했다는 데 있다.

이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은 선거대책본부장이 사진작가를 속인 것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다. 하지만 과연 속인 것일까. 또는 거짓을 얘기한 것일까. 아니다. 선거대책본부장은 자신의 형편없는 BATNA를 알리지 않은 것뿐이다. 만일 사진작가가 300만 장이 이미 인쇄됐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그는 자신이 유리한 것을 알았을 것이고 협상에서 더 많은 이득을 챙길 수 있었을 것이다.

협상에서 알려도 되는 정보가 있고 알려서는 안 되는 정보가 있다. 노련한 협상가는 이를 구분할 줄 안다는 점을 인식하자.

당신의 BATNA가 약하거나 아예 없다고 하더라도 실망하긴 이르다. 당신의 힘이 약하다면 당신이 아닌 제삼자의 힘을 빌리면 된다. 협상장 내부가 아닌 외부의 힘을 빌려 상대를 움직이는 것이다.

◆제삼자를 이용해 협상에 성공한 스테이플스

미국의 사무용품 체인 회사 ‘스테이플스’는 초창기에 벤처캐피털로부터 지원받은 자금으로 소기업에 사무용품을 최저가로 공급하며 사업망을 확장하고 있었다. 비즈니스 모델이 시장에 먹히면서 매출이 매년 30%씩 성장했다.

그런데 시장에 새로운 강자가 등장했다. ‘오피스디포’라는 곳이었다. 막강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사업에 나선 그들은 시장점유율을 급격히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상대적으로 매출에 타격을 입은 스테이플스에 비상이 걸렸다. 경쟁사와의 마케팅 전략에서 뒤지지 않기 위해선 사업을 확장할 자금이 절실했다.

스테이플스는 초기에 자금을 대준 벤처캐피털에 지원을 요청했다. 하지만 부정적 반응이 돌아왔다. 최근 사무용품업계의 경쟁이 치열해져 기업 가치가 낮게 평가됐기 때문에 추가 투자가 어렵다는 것이었다. 스테이플스는 난감했다. 협상 조건을 완화해 금액이나 주식 단가를 낮춰 주겠다는 제안도 별 소용이 없었다. 협상은 교착상태에 빠졌다.

기업을 회생시키기 위해 고민을 거듭하던 스테이플스는 기발한 묘수를 떠올렸다. 협상 상대를 벤처캐피털이 아닌 벤처캐피털의 주주 회사들로 변경했다. 연금펀드나 보험회사 등과 같은 자산 운용사로 상대를 바꾼 것이다. 스테이플스는 그들을 찾아가 만약 벤처캐피털을 경유하지 않고 직거래한다면 적지 않은 운용 수수료와 초과 수익 인센티브를 절약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효과는 금세 나타났다. 그들이 돈을 대겠다고 제안했던 것이다.

이 사실을 전해 들은 벤처캐피털은 자신들이 완전히 배제될까봐 초조해졌다. 바로 그때 스테이플스는 벤처캐피털을 다시 찾아가 이렇게 얘기했다. “투자금이 빠르게 채워지고 있습니다. 당신들은 참여할 겁니까, 참여하지 않을 겁니까”라고 물었다. 벤처캐피털은 결국 초기에 완강했던 자세를 버리고 허겁지겁 투자금을 들고 찾아왔다.

◆‘세계 평화’ 앞세워 이라크 응징한 부시

또 다른 사례를 살펴보자. 이번에는 협상력이 약하다고 생각했던 홍콩 정부가 제삼의 힘, 미디어를 활용한 사례다.

월트디즈니는 1998년 당시 급성장하던 중국 경제에 군침을 흘리고 있었다. 또한 중국에 인접한 홍콩의 엔터테인먼트 사업과 관련된 시장이 더욱 확대될 것으로 기대하면서 홍콩 정부와 대화를 시작했다. 홍콩엔 1997년 닥친 아시아 경제 위기와 중국 반환은 큰 타격이었다. 관광객의 급감으로 홍콩 경제는 심각한 불황에 빠졌다. 홍콩 정부는 세계적 테마파크를 보유함으로써 위기를 만회하고자 했다.

홍콩 정부는 초기에 파격적인 조건을 제의했다. 테마파크의 1단계 개발에 소요되는 토지를 50년 임차 조건을 보장하고 도로·부두·교통환승시설 등을 포함하는 인프라 건설을 약속했다.

하지만 홍콩 정부의 조급한 마음을 읽은 월트디즈니 측은 돌연 협상 자세를 바꿨다. 홍콩 외에 중국 상하이·주하이와 싱가포르 등 대체 후보지를 슬쩍 흘리면서 테마파크 건설에 소요되는 금융 지원과 세제 혜택 등 과다한 요구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홍콩 정부는 가능한 범위 내에서 월트디즈니의 요구를 수용하려고 노력했지만 한계점에 봉착했고 협상은 교착상태에 빠졌다.

그렇다고 이제 와 다른 테마파크(유니버설스튜디오 등)를 유치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한마디로 BATNA가 없었던 것이다. 고민하던 홍콩 정부는 이러한 상황을 언론에 슬쩍 흘리는 방법을 생각해 냈다. 월트디즈니 측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월트디즈니의 가장 큰 고객은 홍콩 주민과 중국 관광객이었고 그들로부터 외면 받는다면 장사하기 어렵다는 점에 착안했다.

홍콩 정부는 사우스 차이나 모닝 포스트에 ‘월트디즈니가 과도한 경제적 요구를 하고 있다’는 정보를 흘렸다. 이 보도로 인해 여론의 반감을 사게 되자 기업 이미지가 중요했던 월트디즈니 측은 과도한 협상 요구를 철회할 수밖에 없었다.

협상에서 자신의 BATNA가 형편없거나 아예 없다고 해도 포기하면 안 된다. 자기 힘이 약하다고 해도 상대 요구를 그대로 수용하는 것은 어리석다. 나중에 후회해도 소용없다. 협상은 한 번 지나가면 더 이상 되돌릴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협상을 시작하기 전에 또는 협상 도중에라도 생각의 패러다임을 전환할 필요가 있다.

눈을 돌려 다른 시각으로 협상 상황을 냉정하게 분석하는 것이다. 자기 힘이 약하다면 다른 곳의 힘을 빌릴 수 있을지 전략적으로 생각해 보라. 제삼자의 힘을 빌린 또 다른 사례를 보자.

1991년 당시 조지 H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쿠웨이트를 침공한 이라크를 응징하기 위해 미군을 파병하려고 했다. 하지만 전쟁에 회의적인 미국 의회를 설득하는 것이 만만치 않았다. 전쟁 비용도 그랬지만 미국 젊은이의 생명도 소중하기 때문이었다.

부시는 의회를 설득하는 대신 다른 길을 택했다. 영국과 프랑스를 비롯한 우방국과 유엔의 지원을 받기로 했다. 세계 평화를 위해 국제적 연합 전선을 구축한 것이다. 동맹국들의 지지와 ‘세계 평화’라는 대의적 명분 앞에서 미국 의회도 두 손을 들고 말았다.

만약 부시가 전쟁에 회의적인 미국 의회의 승인부터 협상하려고 했다면 이라크에 대한 응징은 실패했을 것이다. 부시는 연합 전선을 구축하고 유엔 표결까지 받아낸 상황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는 점을 노렸다.

이처럼 약자의 처지에 몰렸다고 협상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상대도 약점이 있을 수 있다. 노련한 협상가는 자신의 BATNA에만 몰입하지 않는다. 협상이 깨졌을 때 상대에게 어떤 대안이 있는지 조사하고 분석해 상황을 뒤집을 묘안을 찾아낸다. 자신의 힘이 약하다면 제삼자의 힘을 빌려 협상력을 키우는 게 중요하다.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다.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193호(2018.10.08 ~ 2018.10.14)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