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 리포트]
-국내 최초로 기술수출 대신 직접 판매 허가 신청…그룹 차원 25년 투자 ‘결실’
‘신약 개발도 딥체인지’ 美 시장 도전 나선 SK바이오팜
[한경비즈니스=최은석 기자] 최태원 SK 회장의 신약 도전이 결실을 본다. SK바이오팜이 미국 제약사 재즈와 공동 개발한 수면 장애 신약 ‘솔리암페톨’이 12월 안에 미국 식품의약국(FDA)으로부터 판매 허가를 받을 전망이다. SK는 미국 판권을 보유한 재즈로부터 로열티를 받고 일본·중국 등 아시아 12개국에서 제품을 직접 판매할 계획이다.

SK바이오팜이 자체 개발한 뇌전증(간질) 신약 ‘세노바메이트’도 2020년 상반기 미국 내 판매를 앞두고 있다. 세노바메이트는 현지에서만 연간 1조원의 매출이 기대되는 신약이다. 미국은 세계 뇌전증 치료제 시장의 약 80%를 차지한다.

최 회장은 1993년 신약 개발에 착수한 이후 제약·바이오 사업을 ‘제2의 반도체’로 키운다는 목표로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25년간의 묵묵한 기다림이 마침내 성과로 이어지는 셈이다.

◆독자 개발 신약 미국 도전 첫 사례

SK그룹 지주사인 SK(주)의 자회사 SK바이오팜은 뇌전증 신약 ‘세노바메이트’의 판매 허가 신청서(NDA)를 FDA에 제출했다고 11월 26일 발표했다. 국내 기업이 신약 후보물질(파이프라인) 발굴부터 글로벌 임상 시험, FDA 허가 신청까지 직접 수행한 첫 사례다.

SK바이오팜은 2001년 파이프라인 탐색을 시작해 2007년 FDA로부터 세노바메이트 임상 시험 신청(IND) 승인을 받았다. 2008년 임상 1상, 2015년 임상 2상, 올해 임상 3상을 각각 완료했다.
‘신약 개발도 딥체인지’ 美 시장 도전 나선 SK바이오팜
SK바이오팜은 북미·유럽·아시아·중남미 등에서 2400여 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임상 시험 결과를 바탕으로 미국 법인인 SK라이프사이언스를 통해 NDA를 제출했다. 부분 발작을 보이는 뇌전증 환자를 대상으로 한 임상 2상 효능 시험과 대규모 장기 임상 3상 안전성 시험 등을 통해 약효를 입증했다는 게 SK바이오팜의 설명이다.

뇌전증은 뇌 특정 부위 신경세포의 흥분으로 인해 발작 등이 나타나는 질환이다. 환자의 약 60%가 반복적인 부분 발작 증상을 겪는다. 뇌전증 환자들은 우울증과 불안감 등에 따른 사고나 기타 합병증에 걸릴 위험도 높다. 이들 중 최소 3분의 1은 기존 약물로도 증상을 완화하지 못해 고통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시장조사 기관 글로벌 데이터에 따르면 세계 뇌전증 치료제 시장은 2022년까지 69억 달러(약 7조원) 규모로 올해 대비 12% 성장할 전망이다. 미국은 올해 기준 세계 뇌전증 치료제 시장의 약 77.4%(48억 달러)를 차지한다.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에 따르면 세계 뇌전증 환자는 약 6500만 명으로 미국 내 환자만 340만 명 정도다. 국내 환자는 약 14만 명 수준인 것으로 전해진다.

SK바이오팜은 세노바메이트의 미국 발매 시점을 2020년 상반기로 보고 있다. FDA의 심사를 거쳐 판매 허가까지 1년 이상이 소요되기 때문이다.

SK바이오팜은 미국 법인에 세노바메이트 마케팅 전담 조직을 꾸려 판매망을 구축하는 등 현지 판매·마케팅 작업에 속도를 내고 있다. 파이프라인을 기술 수출하는 대신 개발부터 판매·마케팅까지 독자적으로 수행하는 만큼 통상 신약 특허가 만료되는 10여 년의 기간 동안 모든 관련 수익을 온전히 향유할 수 있게 될 전망이다. 세노바메이트의 원료 의약품 생산은 SK(주)의 자회사인 SK바이오텍이 맡게 된다.

SK(주) 관계자는 “세노바메이트가 상업화에 성공하면 SK는 연구·개발(R&D)과 임상, 생산·판매까지 독자적으로 수행하는 ‘글로벌 종합 제약사’로 도약하는 것은 물론 한국이 글로벌 신약 강국으로 발돋움하는 획기적 이정표를 세우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SK바이오팜은 미국 뉴올리언스에서 12월 1일 열린 ‘2018 미국뇌전증학회 연례 회의’에 참가해 세노바메이트의 임상 3상 결과를 발표하기도 했다.

올해로 72회째를 맞은 이 행사는 뇌전증과 신경 생리학 관련 전문가들이 모여 질환을 연구하고 새로운 치료법을 논의하는 세계 최대 규모의 학회다. SK바이오팜은 미국 시장 진출의 첫 단계로 지난해부터 학회에 참가해 세노바메이트를 홍보하고 있다.

조정우 SK바이오팜 대표는 “세노바메이트는 미국에서만 연간 1조원의 매출이 기대되는 블록버스터급 신약”이라며 “학회 현장에서도 SK가 독자 개발한 신약에 대한 높은 관심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신약 개발도 딥체인지’ 美 시장 도전 나선 SK바이오팜
◆솔리암페톨, 12월 FDA 판매 허가 앞둬

당장 12월에는 SK바이오팜이 미국 재즈와 공동 개발한 수면 장애 신약 솔리암페톨이 FDA로부터 판매 허가를 받을 전망이다.

SK바이오팜은 2011년 솔리암페톨의 임상 1상을 완료한 뒤 미국 재즈에 기술수출했다. 이후 공동 R&D 과정을 거쳐 지난해 말 임상 3상을 마무리했다. 양 사는 지난해 12월 21일 FDA에 솔리암페톨의 NDA를 제출했다. 지난 11월 9일에는 유럽의약품청(EMA)에 NDA를 제출하기도 했다.

글로벌 수면 장애 치료제 시장 선도 의약품인 ‘자이렘’을 판매하는 재즈는 솔리암페톨을 후속작으로 중점 육성할 계획이다. 자이렘은 수면 장애 치료제 시장에서 매년 1조원 이상의 매출을 올리는 블록버스터 의약품이다.

솔리암페톨은 수면 장애 환자 880명을 대상으로 한 임상 3상에서 주간 졸림증을 현저히 개선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환자의 주관적 졸림 정도도 자이렘 대비 2배 이상 개선됐다는 게 SK바이오팜의 설명이다.

솔리암페톨이 FDA와 EMA로부터 판매 허가를 받으면 SK바이오팜은 관련 판권을 보유한 재즈로부터 로열티를 받는다. 일본·중국 등 아시아 12개국에서는 제품을 직접 판매한다.

SK바이오팜은 미국 판매 허가를 앞둔 이들 신약 외에도 다수의 파이프라인을 갖추고 있다. SK바이오팜은 국내 최다인 16개 파이프라인 임상 시험 승인을 FDA로부터 확보한 상태다.
‘신약 개발도 딥체인지’ 美 시장 도전 나선 SK바이오팜
SK바이오팜은 자체 개발한 만성 변비 치료제 ‘렐레노프라이드’를 희귀 신경계 질환 치료제로 개발하는 방안도 추진하고 있다. 이를 위해 올해 초 영국 바이오벤처 글라이식스와 합작 투자 법인을 설립했다. 조만간 글로벌 임상 2상을 추진할 계획이다.

조 대표는 “뇌전증 신약 세노바메이트를 자체 개발하는 한편 수면 장애 신약 솔리암페톨과 희귀 신경계 질환 치료제 렐레노프라이드는 기술수출과 합작 법인 설립 등을 통해 협업하는 다각화 전략으로 글로벌 시장을 공략 중”이라고 말했다.

SK(주)는 SK바이오팜의 상장 작업에도 속도를 내고 있다. 당초 목표였던 미국 나스닥 직상장은 물론 한국 유가증권시장 입성 등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내부 조율을 진행 중이다.

◆SK바이오텍, 글로벌 선두 CDMO 도약 목표

SK(주)는 SK바이오텍을 중심으로 한 원료 의약품 수탁 생산·개발(CDMO) 사업에도 드라이브를 걸고 있다.

SK바이오텍은 1998년부터 대전 대덕단지에서 원료 의약품을 생산해 글로벌 제약사에 수출해 왔다. 지난해 10월 세종 공장을 준공하기도 했다. 현재 노바티스·BMS·화이자·로슈 등 글로벌 메이저 제약사에 당뇨·간염 치료제에 쓰이는 원료 의약품을 공급하고 있다.

SK바이오텍은 지난해 6월 아일랜드 스워즈의 브리스톨마이어스스큅(BMS) 원료 의약품 공장을 인수하는 데 성공해 화제가 됐다. 국내 제약·바이오 기업 중 유럽 본토에 대규모 생산 설비를 직접 보유한 곳은 SK바이오텍이 유일하다.

아일랜드 스워즈 공장은 BMS가 생산하는 합성 신약 제조 과정 중 난이도가 가장 높은 공정을 담당하는 곳이다. SK바이오텍은 향후 스워즈 공장에 ‘연속 반응 공정’을 적용할 예정이다.

연속 반응 공정은 긴 파이프에 물질을 흘려보내는 과정에서 화학반응을 통해 원하는 물질을 만들어 내는 공법이다. 세계적으로 양산화 성공 사례가 드문 고난도 생산 기술로 꼽힌다. 기존 공정보다 낮은 비용으로 고품질의 원료 의약품을 생산할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안전성 확보는 물론 폐기물도 최소화할 수 있어 글로벌 CDMO들이 앞다퉈 도입하려는 기술 중 하나로 꼽힌다는 게 SK바이오텍의 설명이다.

SK바이오텍은 2007년 연속 반응 공정 양산화에 성공한 뒤 2014년 세계 최초로 FDA의 인증을 받았다. 1970년대 유공 시절 석유화학 공정에 활용하던 기술을 의약품 생산에 적용한 것이다.

SK(주)는 지난 7월 국내 제약·바이오업계 인수·합병(M&A) 사상 최대 규모의 글로벌 M&A에 성공하며 업계의 이목을 끌었다. 약 8000억원을 들여 미국 CDMO인 앰팩(AMPAC)을 인수한 것이다.
‘신약 개발도 딥체인지’ 美 시장 도전 나선 SK바이오팜
앰팩은 1990년대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설립된 기업이다. 미국 내 3곳의 생산 시설에서 항암제와 중추신경계·심혈관 질환 치료제 등에 쓰이는 원료 의약품을 생산한다. 임직원 수는 약 500명으로, 연 15% 이상의 성장세를 유지 중이다.

앰팩은 글로벌 제약사들과 20년 이상 장기간에 걸친 파트너십을 유지하며 입지를 다지고 있다. 블록버스터로 성장할 가능성이 높은 의약품 원료에 대한 단독·우선 공급자 지위를 확보하는 등 미국에서 10위 안에 드는 우량 CDMO라는 게 SK의 설명이다.
‘신약 개발도 딥체인지’ 美 시장 도전 나선 SK바이오팜
SK바이오텍은 올해 1월 미국에 마케팅 법인을 설립하는 등 글로벌 제약 시장을 양분하는 미국과 유럽에 판매 전초기지를 마련하기도 했다.

SK(주) 관계자는 “SK바이오텍의 한국·유럽 생산 시설과 앰팩의 R&D, 생산, 마케팅·판매 ‘삼각편대’를 활용해 글로벌 사업을 지속적으로 키워 나갈 것”이라며 “2022년 기업 가치 10조원 규모의 글로벌 선두 CDMO로 도약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SK의 신약 주권 선언 히스토리
93년 신약 개발 개시…최태원 회장의 장녀도 SK바이오팜에 근무 중


SK는 1993년 그룹의 차세대 성장 동력을 발굴하기 위해 신약 연구·개발(R&D)을 시작했다. 당시 유공 대덕 기술원 내 신약개발연구팀이 SK바이오팜의 모태다.

SK는 이 조직을 점진적으로 확대했고 2007년 지주회사 체제 전환 이후에는 지주사 직속 신약개발사업부로 승격시켰다. 이후 2011년 물적분할을 통해 현재의 SK바이오팜을 설립했다. 2015년에는 원료 의약품 생산 사업 확대를 위해 SK바이오팜으로부터 분리해 SK바이오텍을 설립했다.
‘신약 개발도 딥체인지’ 美 시장 도전 나선 SK바이오팜
SK바이오팜은 경기도 판교 테크노밸리에서 신약 개발 관련 기초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미국 뉴저지 현지법인 SK라이프사이언스는 글로벌 임상 개발 수행과 신약 관련 마케팅을 진행 중이다.

SK는 신약 개발 성공 여부에 대한 불확실성 속에서도 최태원 회장의 강력한 의지에 따라 투자를 멈추지 않았다. 신약 개발이야말로 단기 실적 압박에서 벗어나 지속적인 투자와 장기적 비전이 담보돼야 가능하다는 게 최 회장의 지론이다. 최 회장은 2016년 SK바이오팜 판교 연구소를 직접 방문해 구성원들을 격려하는 등 제약·바이오 사업에 각별한 애정을 쏟고 있다.

최 회장의 장녀 최윤정(29) 씨가 SK바이오팜에서 실무 경력을 쌓고 있다는 점도 SK의 제약·바이오 사업에 대한 의지를 반영하는 대목이다. 최 씨는 미국 시카고대에서 생물학을 전공한 후 시카고대 뇌과학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했다. 지난해 6월 SK바이오팜 경영전략실 산하 전략팀 선임매니저(대리급)로 입사해 현재 책임매니저(과장급)로 근무 중이다.

SK바이오팜은 임상 초기 단계의 파이프라인을 글로벌 제약사에 기술수출 중인 대부분의 국내 제약사와 달리 신약을 자체 개발하는 데 모든 역량을 집중했다. 기술수출 시 투자 리스크는 줄어들지만 대부분의 수익은 파트너 업체와 나눠 갖는 한계가 있다. 반면 자체 개발·마케팅 전략은 신약이 창출하는 모든 가치를 향유할 수 있다. 영업이익률도 50% 이상으로 높이게 된다. 유럽·미국 제약사들이 점령한 글로벌 제약 시장에서 ‘신약 주권’ 달성을 통한 국가 위상 제고도 기대할 수 있다.

미국 판매 허가를 앞둔 세노바메이트 등을 통해 SK의 신약 도전 과정은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의 대표적 사례로 기록될 전망이다.

choies@hankyung.com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202호(2018.12.10 ~ 2018.12.16)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