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코인 A to Z]
-재화와 가치가 교환되는 ‘토큰 생태계’…가치 없는 생태계의 토큰은 의미 없어
ICO는 왜 정부의 규제에 맥을 못 출까
[오태민 크립토비트코인연구소장, ‘스마트콘트랙 : 신뢰혁명’ 저자] 올 하반기 암호화폐 시장의 침체에는 암호화폐 공개(ICO)에 대한 미국 정부의 규제 의지가 한몫했다.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는 ICO를 한 기업들을 기소하고 있다. 대부분은 법원에 가기 전에 투자금을 반환하고 벌금을 내는 합의에 굴복하고 있다.

2017년 암호화폐 열풍을 주도한 것은 비트코인보다 이더리움이었다. 특히 한국과 중국 등 동아시아에서 거셌다. 이더리움은 ‘스마트 콘트랙트’라는 멋진 어휘와 연결됐다. 도박과 암시장 같이 부정적인 개념으로 묶인 비트코인과 달리 혁신을 주도할 신기술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빛나지 않았다. ICO라는 형태로 누구나 토큰을 만들 수 있었고 토큰을 팔아 채무도 없고 회사의 의결권을 양보할 필요도 없는 돈을 모으는 믿기 어려운 풍경이 벌어졌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4차 산업혁명을 선도하는 신기술을 활용하기 때문에 미국 규제 당국이 막지 않거나 막을 수 없다는 근거 없는 낙관이 모두를 한동안 지배했다. 새로운 기술이라는 사실과 이를 이용해 돈을 모으는 행위를 정부가 규제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사이에는 논리적 연결 고리가 없다. 오히려 정부들은 새로운 기술이라면 일단 규제하고 보는 게 더 일반적이다.

ICO 규제에 대한 낙관론이 팽배했던 이유엔 비트코인이 영향을 미쳤기 때문일 수 있다. 블록체인 옹호론자들 사이에서도 유독 비트코인에 대한 평판은 좋지 않다. 정부가 막아야 한다면 새로운 기술과 연계된 ICO가 아니라 법정화폐 지위에 노골적으로 도전하는 비트코인이어야 한다. 그러한 비트코인이 10년 동안이나 거리를 활보하고 있으니 평판마저 좋은 이더리움 같은 신기술로 이뤄지는 ICO가 대세가 되는 것이 공평하다고 느끼게 했다.

인류의 잠재의식에 미치는 이런 영향력이야말로 비트코인 10년 생존의 진정한 의의일 것이다. 비트코인이 건재를 자랑할 때마다 미국과 중국 같은 강력한 정부들은 체면을 구긴다. 또 주류 언론의 정직성에 대해 대중은 그나마 가진 신뢰를 철회할지 모른다. 무엇보다 경험주의로부터 멀어진 오늘날 경제학자들의 비과학성을 신랄하게 고발하고 있다.



비트코인, 안 막는 게 아니라 못 막는 것

ICO가 정부의 규제 앞에 무력한 이유는 ICO 토큰이 비트코인을 닮았기 때문이 아니라 거의 닮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국의 규제 기관은 ICO를 막겠다고 말하지만 비트코인 규제는 자신들 관할이 아니라고 말을 자른다. 한국 정부의 거래소나 ICO에 대한 규제는 비트코인에 대한 엄한 화풀이로 보이기까지 한다. ICO 토큰이 비트코인을 닮았다면 비트코인처럼 규제를 피할 수 있다는 단순한 논리지만 여기에는 비트코인과 블록체인 현상의 핵심에 대한 성찰이 담겨 있다. 비트코인과 블록체인의 진정한 혁신성은 화폐를 발행할 수 있는 정부의 독점 권한을 허문데 있는 것이지 마일리지 쿠폰을 화폐처럼 쓰게 하는 데 있지 않다. 비트코인은 처음부터 화폐를 추구한 반면 토큰들은 마일리지나 상품권에서 출발하려고 노력했다.

비트코인이 화폐가 아니라면 비트코인은 아무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비트코인은 상품권이나 마일리지·유가증권이라면 기본적으로 갖고 있는 속성, 즉 교환권이나 보관증으로서의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경제학 교과서는 달러가 금의 보관증에서 시작됐고 동전은 그 자체가 금화로부터 변형됐다고 가르친다.

화폐론을 철학적으로 성찰하자면 여기에서부터 엄청난 논리의 비약이 있다. 과거야 어떻든 현재의 달러는 금과 연계성이 없다. 즉 10달러권의 가치를 정부는 1달러짜리 종이 10장으로 보장해 줄 뿐이다.

즉 가치 있는 권리와의 교환을 정부를 비롯해 누구도 보장하지 않는 것은 종이돈과 비트코인뿐이다. 비트코인이 논리의 비약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은 화폐 현상 자체가 기존의 틀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비약 위에 서 있다는 것을 간과한다. 변동이 심하지 않고 장기적으로 가치를 보장하는 화폐는 이데아의 세계에나 존재한다. 현실의 화폐는 그 어느 것도 이 속성을 모두 만족시킬 수 없다는 것이 경험적으로 증명됐다. 가치 하락 혹은 인플레이션으로 성적을 내자면 달러·위안화·원화는 낙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 정부와 중국 정부 때문에 이런 종이의 가치를 믿어야 한다는 논리라면 10년 동안 강력한 정부들의 공격을 이겨낸 비트코인을 더 믿을 수 있다는 논리도 가능하다. 비트코인은 화폐 현상이다. 그간 화폐는 정부의 독점 영역이었으므로 정부는 비트코인을 진작에 없애버려야 했다. 없애지 못한 것은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럴 수 없었기 때문이다.

ICO 백서들은 자신들이 만든 토큰에 마일리지 포인트의 속성을 넣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린다. 어떤 재화와 가치가 교환되는 순환 경제를 ICO에서는 흔히 ‘생태계’라고 부른다. 토큰은 이 폐쇄된 생태계 안에서 화폐로 쓰인다. 만약 이 생태계에 참여하는 것이 이롭다면 이 생태계에서 통용되는 교환권은 외부 생태계에서도 가치를 갖게 된다. ICO 토큰은 버스 승차권이나 극장이나 야구장 티켓, 우표, 온라인 게임 세계의 아이템을 닮고자 한다.

화폐의 본질은 범용성이다. 생태계가 가치가 있다면 범용적인 화폐가 쓰인다. 공식적인 화폐를 토큰으로 제한해도 소용없다. 즉 생태계 바깥에서 인정받은 모든 지불 수단이 사용될 수 있다. 그것이 가치 있는 생태계의 정의이기도 하다.

또 ICO로 만든 토큰이 범용성을 가지면 다른 생태계에서도 통용된다. ICO가 할 수 있고 발견하지 못했던 생태계를 활성화해 가치를 갖도록 하는 것이지 아무 가치도 없는 토큰을 돈으로 바꾸는 마술이 아니다.

하지만 ICO는 마일리지를 닮으려다가 화폐를 설명하는 경제학자들보다 더 심각한 논리적 비약에 빠지고 이를 얼렁뚱땅 넘어가려고 한다. 가치 없는 생태계가 가치 없는 토큰을 공식 화폐로 인정하면 생태계도 가치가 생기고 토큰도 돈이 된다는 주장에 가깝다.

많은 ICO가 규제 앞에서 맥을 못 추는 진짜 이유도 어쩌면 규제 당국의 의지 이전에 ICO를 시도하는 이들의 지적 허약함, 성찰의 부재, 미신적인 논리의 신봉에 숨어 있는지 모른다.

탄생 10년을 맞은 비트코인은 이 현상의 본질에 대한 지식사회 전반의 겸허한 성찰을 요구하고 있다. 아니 강요하고 있다.

[돋보기] ‘마일리지 쿠폰’이 아니라 ‘화폐’가 돼야

모든 암호화폐 공개(ICO)의 성공 여부는 생태계의 실제 가치에 달렸다. 생태계가 가치 있다면 거기에서 통용되는 토큰도 가치를 갖는다. 투자자들은 투자 이익을 기대하면서 아이디어만 보고 토큰을 미리 구입한다. 토큰을 팔아 얻은 자원으로 발행자가 생태계를 조성한다. 생태계가 조성되고 활성화되면 투자자들의 기대는 실현된다. 이는 선순환 구조다. 기대가 현실을 만들고 현실이 기대를 강화하는 것을 자기실현적 예언(self-prophecy reinforcement)이라고 한다.

문제는 가치를 보장하면서 발행자가 토큰을 파는 것이 전통적인 유가증권법이나 투자 관련 규제에 저촉된다는 것이다. 증권의 판단 기준은 생긴 모양이 아니다. 발행자와 투자자의 관계 설정이 판단 기준이기 때문에 미국증권거래위원회(SEC)는 거의 대부분의 ICO가 증권법을 위반했다고 주장한다.

토큰의 가치를 보장하지 말고 생태계의 가치를 보장하는 역발상이 필요하다. 생태계가 가치를 가진다면 토큰을 돈으로 바꾸거나 가치를 보장하지 않고도 그 토큰을 매개로 다양한 자원을 모을 수 있다. 가치 있는 생태계가 블록체인과 만나 창출하는 것은 마일리지 쿠폰이 아니라 화폐이기 때문에 전통적인 법적 범주로는 정부가 막을 수 없다.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204호(2018.12.24 ~ 2018.12.30)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