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조원 시장’ 새 먹거리로…필수 기술 58개 중 48개 이미 확보



[한경비즈니스=김정우 기자] 정부의 탈원전 정책에 따른 원자력발전소 생태계의 붕괴 우려는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국내에서 신규 원전 건설과 같은 대형 호재가 사라진 만큼 원전 산업 전체가 위축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여기에 대한 대안으로 정부가 주목하는 것은 바로 ‘원전 해체’ 시장이다. 국내를 넘어 세계적으로 노후화된 원전이 늘고 있는 만큼 향후 시장 규모만 500조원에 이를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정부는 원전의 성공적 건설과 운영을 통해 쌓은 노하우를 토대로 세계 원전 해체 시장에 진출해 새로운 먹거리를 마련하겠다는 청사진을 그리고 있다.

탈원전 대안으로 떠오른 ‘원전 해체 시장’




원천 해체 시장이 새로운 ‘불루오션’으로 떠오르고 있다. 세계적인 탈원전 흐름으로 신규 원전 건설에 대한 수요가 예전만 못한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설계 수명을 다해 폐로(수명이 다한 원전의 원자로를 처분)가 다가오는 원전은 계속 늘어날 것으로 전망되는 것이 그 배경이다.


◆ 줄줄이 대기 중인 노후 원전


현재 상황만 놓고 봐도 원전 해체 수요는 상당하다. 한국원자력안전기술원이 제공하는 원전 안전 운영 정보 시스템(OPIS)에 따르면(2018년 11월 기준) 전 세계에서 폐로에 들어가 가동이 중지된 원전 수는 총 169기에 달한다. 이 중 해체를 완료한 곳은 아직 약 20기에 불과하다. 140여 기가 해체를 기다리고 있다.

향후 그 숫자는 더욱 증가할 전망이다. 현재(2018년 11월 기준) 38개국에서 454기의 원전이 가동 중인데 이 중 가동 연수가 30년 이상인 원전은 약 280기로 집계된다. 전체의 60%가 넘는 수준이다.

각 원전의 내부 ‘건강 상태’에 따라 수명이 연장되는 곳도 있겠지만 2020년대 이후 해체에 들어가는 원전이 급증할 것이라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그렇다면 원전 해체 시장의 규모를 돈으로 환산하면 과연 얼마일까. 각 나라마다 인건비 등을 포함한 물가가 상이해 정확히 계산하기는 어렵다. 다만 2014년 글로벌 컨설팅 회사 딜로이트는 ‘세계 원전 해체 전망’을 내놓으며 원전 해체 시장이 440조원 규모가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탈원전 대안으로 떠오른 ‘원전 해체 시장’
당시 딜로이트는 2015년부터 2029년까지를 원전 해체 시장의 ‘개화기’라고 분석하며 해당 기간 동안 원전 해체에 소요되는 예상 금액을 72조원으로 추산했다.

2030년부터 2049년은 ‘성장기’로 분류하며 185조원이 투입될 것으로 예상했고 2050년 이후 시장이 ‘성숙기’에 접어들어 182조원 규모의 돈이 오갈 것으로 관측했다. 이를 모두 합해 원전 해체 시장 규모는 약 440조에 이를 것이라고 봤다.

하지만 실제 시장 규모는 이보다 더 커질 것이라는 게 업계의 중론이다. 한 원전업계 관계자는 “약 4년 전에 440조원으로 예상했다. 그간의 물가 상승분 등을 따져 다시 계산하면 그 규모가 500조원을 훌쩍 넘어설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 정부가 원전 해체 시장에 눈독을 들이는 배경이다.

원전을 해체하는 것은 건설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워 시장 진출이 쉽지만은 않다. 방사능 유출을 막기 위해 다양한 기술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경우에 따라 최소 15년에서 최대 60년이 걸리는 대규모 작업이다.

원전 해체는 크게 ‘영구 정지 후 해체 준비’, ‘해체 단계’, ‘사후 관리’ 등 세 단계로 구분된다. 원전 시설의 운전을 중단하면 해체를 위한 시설과 부지 특성 평가, 기술 개발 타당성과 소요 자금 등을 결정한다. 여기까지가 해체 준비 단계다.

본격적인 해체 단계 작업은 제염(오염 제거)과 구조물 철거로 구분할 수 있다. 제염은 특정 시설이나 지역의 방사성 물질을 제거하거나 감소시키는 과정이다. 기계와 화학적인 방법을 동원한 다양한 기술을 적용한다. 제염 작업이 끝나면 구조물 철거를 진행한다. 원전 시설 내부는 높은 방사선으로 인해 작업자의 접근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로봇을 활용한 원격 해체 시스템이 요구된다.

이렇게 수거된 각종 폐기물은 처분장 수용에 적합한 형태로 만들어 이송된다. 해체가 완료된 부지는 원래의 자연 상태로 되돌리기 위한 복원 작업이 이뤄지는데 이 과정이 사후 관리 단계다.


◆ 독자적인 원천 기술 확보에 주력

한국 역시 원전 건설에 있어서만큼은 이미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력을 확보했지만 아쉽게도 해체 시장에서는 아직 기술력이 다소 부족한 것이 현실이다.

해체 기술이 떨어지는 주된 배경은 원전의 역사를 원인으로 꼽을 수 있다. 한국의 첫 원전은 1978년 도입한 고리 1호기다. 2017년 가동 중지를 결정하면서 2022년 해체 수순을 밟게 됐다. 국내 처음으로 원전이 해체되는 사례다.

해외 국가에 비해 다소 늦은 편이다. 미국·독일·일본 등은 1960년대 후반부터 대규모 원전을 곳곳에 설립해 왔다. 자연스럽게 원전 해체에 관한 논의도 한국보다 훨씬 먼저 이뤄졌고 이미 원전 해체 작업을 완료한 경험도 갖고 있다.

이 중에서도 미국의 기술력이 가장 뛰어나다고 평가받는다. 이미 15기의 원전을 해체하며 가장 돋보이는 활약을 펼치고 있다. 독일과 일본도 미국보다는 한 수 아래지만 자국의 원전 해체 경험을 토대로 한국보다 한 수 위의 기술을 갖고 있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원전 해체 기술의 격차가 그렇게 크지 않다는 것이다. 예컨대 미국의 기술 정도를 100이라고 수치화하면 한국은 80 정도에 머물러 있다는 분석이다. 원전업계에서는 건설에서 쌓은 노하우를 바탕으로 해체 시장에서 빠르게 기술력을 확보해 나가면 조만간 해외 국가와 비슷한 기술력을 갖게 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실제로 해외 국가를 따라잡는다는 목표로 노력해 온 결과 국내의 원전 해체 기술 개발도 최근 상당한 진척을 보이고 있다. 2021년이 되면 미국과 비교해도 큰 차이가 없을 정도로 기술 확보가 가능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이미 원전 해체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상용화 기술’은 대부분 확보를 완료한 상태다. 한국수력원자력에 따르면 원전 해체를 위한 상용화 기술은 총 58가지로 분류된다. 이 중 이미 45개를 보유한 가운데 2021년까지 나머지 13개 기술을 자체 개발해 확보할 예정이다.

상용화 기술은 이미 해외에서 개발한 기술들도 많아 함부로 사용할 수 없거나 로열티를 지불해야 하는 기술들이 많다. 따라서 이와 별도로 원전 해체와 관련한 원천 기술 개발도 추진 중이다.

원전 관련 기술 연구·개발을 목적으로 설립된 한국원자력연구원은 2012년부터 원전 해체에 필요한 38개 핵심 원천 기술을 설정하고 이를 개발하는데 매진해 왔다.

그 결과 현재 해체 안전성 평가 기술부터 로봇을 활용한 제어 기술까지 총 28개 원천 기술 개발을 완료했다. 2021년까지 나머지 10개 기술을 모두 완성해 세계 최고수준의 원전 해체 기술력을 갖춘다는 방침이다.

한국원자력연구원 관계자는 “연구원에서 개발 중인 원천 기술들은 해외에 신경 쓸 필요 없이 원하면 그대로 사용할 수 있는 기술들”이라며 “38개가 모두 개발되면 2022년 해체 과정에 들어가는 고리 1호기 해체를 완수할 수 있을 정도의 독자 기술을 완전히 확보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탈원전 대안으로 떠오른 ‘원전 해체 시장’
문제는 기술 검증인데 이 부분 역시 정부 정책에 따라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 정부는 오는 3월까지 원전 해체 산업 종합 육성 전략을 수립하고 2021년까지 동남권 원전해체연구소를 설립할 계획을 세웠다. 이 연구소는 국내에서 개발된 원전 해체 관련 기술들이 얼마나 효과가 있는지 검증하는 일종의 ‘테스트 베드’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 수주 경쟁 이겨낼지는 미지수

기술 개발과 검증을 통해 정부는 원전 해체 시장이 본격 성장할 것으로 예상되는 2030년에 해외 수주까지 노린다는 계획이다.

이 같은 정부 계획에 대해선 원전업계에서도 전반적으로 환영하는 분위기다. 한 원전업계 관계자는 “탈원전 정책으로 국내외 신규 수주가 막혀 새로운 일감 확보가 어려운 상황에서 정부가 원전 해체 시장을 주목하고 기술 개발에 적극 나서는 것은 반길 만한 일”이라고 전했다.

물론 좋은 평가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일각에서는 정부의 계획이 지나치게 긍정적인 것 아니냐는 부정적인 시선도 나온다. 기술 개발을 완료하더라도 원전 해체 시장 수주까지는 어려울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다.

“한국이 아무리 뛰어난 원전 해체 기술력을 갖추더라도 수주는 힘들 것이다. 바로 경험 때문이다. 이미 미국은 15건의 원전 해체를 비롯해 환경 복원까지 완료한 바 있다. 독일과 일본도 원전 해체를 이미 완수한 상태다. 한국이 2022년 고리 1호기 등을 통해 원전 해체와 관련한 경험을 쌓는다고 하더라도 경험에서 이들 국가를 앞서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원전 해체 수주 경쟁에서 이들 국가를 이기기 힘들 것이라고 예상하는 이유다.” 김명현 한국원자력학회 학회장(경희대 원자력공학과 교수)은 이같이 분석했다.

수익성에 대한 의문도 뒤따른다. 원전업계에 따르면 국내에서 책정된 원전 해체 비용은 7515억원이다. 하지만 여기서 보통 40% 정도가 폐기물 운반비용에 들어가는 것으로 알려졌다. 인건비까지 포함하면 해외 수주를 따내더라도 이윤 자체는 크지 않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이런 지적들도 일리는 있지만 일단 시장의 문을 두드리는 것 자체에 의미를 둬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서범경 원자력연구원 박사는 “수주 경쟁이 어렵고 수익성도 나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도전 자체를 하지 않고 통째로 시장을 빼앗기는 것보다 경쟁하는 것이 의미가 있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탈원전 대안으로 떠오른 ‘원전 해체 시장’
탈원전 정책으로 국내시장만으로도 충분한 규모의 새로운 시장이 형성될 것이란 예상도 내비쳤다. 정부는 탈원전 정책에 따라 향후 수명이 완료되는 원전은 영구 정지하기로 방침을 정했다. 이렇게 2029년까지 수명이 완료돼 해체에 들어가는 원전은 약 12기에 이른다.

서 박사는 “국내에서만 약 9조원대의 새로운 시장이 열리는 셈”이라며 “원전업계의 어려움을 조금이나마 해소할 수 있을 것이다. 수익성이나 수주 가능성을 따질 것이 아니라 원전업계의 활력 제고라는 보다 큰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돋보기



한국원자력연구원이 2021년까지 개발 완료 예정인 38개 원천 기술은 이를 원하는 기업들에 이전하기 위한 목적으로 마련되는 기술이라고 보면 된다. 원자력연구원은 연구를 목적으로 설립된 기관이기 때문에 기술을 활용해 원전 해체 사업에 직접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예컨대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은 국내 원전 사업을 총괄하는 만큼 원전 해체 역시 주관하게 된다. 한수원이 원전 해체를 하게 되면 입찰 공고를 내고 원전 해체 관련 기술을 가진 기업들을 사업에 참여시킨다. 이때 참여하는 기업들은 원자력연구원이 개발한 기술들 가운데 필요한 기술이 있다고 판단되면 이전받아 그 기술을 갖고 사업에 참여할 수 있다.

2022년 고리 1호기 원전 해체가 가까워지면서 최근 원자력연구원은 이미 확보한 핵심 기술 중 실용화 가능성이 높은 4개 분야와 각 전문 기업을 우선 지정하기도 했다. △해체 시설·부지 오염도 측정 기술(미래와 도전) △핵심 설비 해체 공정 시뮬레이션 기술(두산중공업) △원전 1차 계통 화학 제염 기술(한전KPS) △해체 폐기물 처리 기술(오르비텍·선광T&S) 등을 각각 선정했다. 올해 말까지 해당 기업과 함께 기술에 대한 검증 등을 진행하며 완성도를 높여 나갈 계획이다.


enyou@hankyung.com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206호(2019.01.07 ~ 2019.01.13)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