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 STORY]
민첩한 시장 대응·창의적 문화의 대안으로, SK이노·KB·신한·하나 등 도입 잇따라
‘기업 조직의 새판 짜기’…애자일 경영, 전 업종으로 확산
[한경비즈니스=이현주 기자] “애자일(agile) 조직 기반으로 일하는 방식을 지속적으로 혁신할 것” -SK이노베이션, “애자일 조직으로 자율적이고 창의적으로 조직과 문화를 혁신” -HDC현대산업개발 , “독립 조직인 애자일 조직을 본부 중심으로 확대 개편해 협업 내재화” -KB국민카드. “디지털을 비롯한 조직 전반에 애자일 체계를 활용해 빠르고 민첩하게 대응” -신한금융투자

2019년 경영계 화두로 ‘애자일’이 떠오르고 있다. 애자일은 올해 최고경영자(CEO)의 신년사에서 단골 키워드였다.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은 신년사를 통해 ‘빠른 실패를 독려하는 조직’을 강조했고 정의선 현대차그룹 총괄 수석부회장은 ‘스마트한 업무 방식의 일상화’를 역설했다. SK그룹은 최태원 회장의 주문 아래 SK이노베이션에서 대규모 조직 개편과 애자일 확대 적용을 검토하고 있다.

특히 금융권에서는 지난해부터 본격적으로 애자일 조직 도입에 팔을 걷어붙였다. 보수적인 금융권의 체질을 바꾸는 실험이다. 오렌지라이프(구 ING생명)는 지난해 4월 보험업계 최초로 전사적인 애자일 조직을 도입하기로 했다.

KB국민은행은 ACE(Agile, Centric, Efficient)라는 12개의 애자일 조직을 갖고 있고 KB국민카드는 지난해 초 스웨그(SWAG : Smart Working Agile Grope)라는 애자일 조직을 신설했다. 또 KEB하나은행은 2017년부터 프로젝트 중심의 셀(cell) 조직을 운영 중이고 현대카드는 지난해 2월 애자일 조직을 도입하고 공간 중심의 ‘애자일 오피스’를 구축하고 있다.

애자일은 방법론이자 철학과 문화
최근 기업들이 주도하는 애자일 경영은 조직과 공간 재정비 흐름으로 보인다. 애자일은 당초 완벽하게 계획한 뒤 완성된 결과물을 내놓는 게 아니라 프로젝트를 실행하면서 중간중간 이해관계인의 요구를 반영하면서 끊임없이 프로토타입을 만들어 수정하는 소프트웨어 개발 방식이다. 기업 경영에 적용돼 최대한 빠르게 소비자 중심의 상품과 서비스를 개발하고 개선한다는 의미로 쓰인다. ‘피드백’과 ‘의사소통’이 골자다.

최근 주요 그룹 총수들이 꺼내든 애자일 경영은 시장의 변화에 발 빠르게 대응하는 민첩한 조직으로 바꾸고 자유롭고 창의적인 문화를 덧입히겠다는 의지의 표명인 셈이다. 방점은 조직 혁신, 일하는 방식의 변화에 찍힌다. 애자일의 태생인 정보기술(IT)업계뿐만 아니라 제조업·금융업도 달라진 시대에 맞는 조직의 새판 짜기에 몰두하는 모습이다. 애자일은 왜 지금 이때 주목받고 있을까.

지난 한 해를 휩쓸었던 ‘워라밸’은 ‘삶의 질’을 향하는 사회적 대변혁이었다. 삶의 질을 직장 내로 들여와 ‘일의 질’에 대해 논하는 게 애자일인 셈이다. 주52시간 근무제 등의 ‘제도’와 함께 근본적인 ‘문화’의 변화를 촉구하기 시작했다. 이런 흐름에 발맞춰 일하는 방식의 혁신을 통한 기업 문화 개선 움직임이 애자일이라는 키워드를 만나 촉발됐다.

대한상공회의소와 맥킨지가 국내 100대 기업, 4만여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직 건강도와 일하는 방식 진단’은 한국의 기업 문화의 근본적인 혁신을 일깨운다. 조사 결과 국내 기업의 77%가 글로벌 평균 대비 조직 건강이 저조한 것으로 나타났다. 잦은 야근, 비효율적 회의와 보고, 구시대적 업무 행태가 주된 요인이었다. 이 보고서의 결과는 바로 ‘애자일 전환’이었다.
신입 사원의 퇴사율은 기업들의 또 하나의 고민거리다. 한국경영자총협회에 따르면 대졸 신입 사원의 1년 내 퇴사율은 약 30%에 이른다. 이를 낮추기 위한 기업 나름의 대응책들이 쏟아지고 있지만 ‘무늬만 혁신’하는 ‘청바지 입은 꼰대’라는 비판을 면하기 어려웠다.

4차 산업혁명의 시대의 일하는 방식도 애자일과 맞닿는다. 매일같이 새로운 기술과 데이터가 쏟아지고 재빠르게 시장 요구에 대응하는 상품과 서비스를 선보이기 위해서는 기민한 움직임이 필요하다. 즉, ‘소비자 중심’ 그리고 이를 실현할 ‘인재 중심’으로의 변화를 피할 수 없게 됐다. 특히 애자일 조직이 최근 금융권에서 떠오르는 배경에는 위기감이 자리한다. 디지털 혁신의 물결 속에서 경영자들은 다양한 ‘방법론’으로 돌파구를 찾으려고 한다.

불확실성에 대응하기 위해 만들어진 애자일
애자일은 해외에서 먼저 부상했다. 특히 실리콘밸리에서 유명세를 탔다. 구글·페이스북·아마존 등 글로벌 기업과 크고 작은 스타트업들이 ‘애자일스럽다’는 평가를 얻으면서 ‘애자일=혁신’의 이미지로 통하게 됐다. 수평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으면서 빈번하게 상품과 서비스를 출시하는 것이 특징으로 꼽힌다.

미국과 유럽에서 애자일은 꽤 보편적인 조직 형태로 자리 잡았다. 필립스·코카콜라 등 제조업과 ING 등 금융권에서 애자일 조직을 도입한 후 매출과 영업이익이 늘어났다는 소식이 유명 저널에 실리면서 화제를 모았다. 현재는 IT뿐만 아니라 다양한 업종에서 애자일을 적용하고 있다. 애자일의 씨앗이 소프트웨어 업계에서 뿌려졌다면 점차 시장의 선택을 받아 진화를 거듭한 모양새다.

애자일이 요즘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는 이유는 불확실성에 있다. 애자일은 당초 불확실성에 어떻게 대응할지 고심하는 가운데 싹트기 시작했다. 2001년 애자일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17인의 소프트웨어 전문가들이 고민했던 것은 ‘인간성’과 ‘생산성’을 동시에 추구하는 것이었다.

한때 경영계를 휩쓴 ‘식스시그마(6sigma)가 제너럴일렉트릭(GE)으로 통한다면 애자일을 대표하는 성공 모델은 딱 하나를 꼽기는 어렵다. 식스시그마는 만든 사람과 구체적인 방법론이 명확하다면 애자일은 공식 가이드가 없다. 17명의 소프트웨어 개발자가 모여 그들이 공유하는 가치와 원칙을 담은 ‘애자일 선언문(Agile Manifesto, 2001년)’에서 유추할 수 있을 뿐 명시된 정의는 없다. 좁은 의미로는 소프트웨어 개발 방법론이고 넓게는 일하는 방식에 대한 철학과 문화에 이른다. 그래서 ‘애자일은 무엇인가’는 여전히 중요한 질문이고 ‘왜 애자일인가’에 대한 고민에 따라 길은 달라질 수 있다.

즉, 애자일은 결과가 아닌 ‘과정’에 의미가 있다. ‘함께 자라기, 애자일로 가는 길’을 쓴 김창준 애자일컨설팅 대표는 “애자일의 변하지 않는 가치는 ‘함께’와 ‘자라기’이며 마치 오즈의 마법사가 그 길을 걷는 여정에서 자아를 발견하고 성장하는 것처럼 애자일 또한 구성원들이 함께 자라는 과정에서 가치의 보물을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과거에는 목표를 확인할 필요 없이 계획대로만 직진하면 성장할 수 있었지만 불확실성의 시대에는 목표 자체가 계속 흔들리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바라보고 피드백을 받아 목표를 재정립하는 과정이 필요하다”며 “이때 함께한다는 것은 리스크를 줄이는 방법이고 조직에 적용하면 서로 다른 역량들이 충돌을 일으켜 고민하고 위험성을 감지하고 새로운 시도를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께 시너지를 내면서 성장하는 게 애자일이 인간성과 생산성을 동시에 추구하는 법”이라고 말했다.

재미있는 점은 애자일이 뜬 실리콘밸리에서 애자일을 공식적으로 선언한 기업을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애자일은 애자일이 아니다’는 말은 그래서 나온다. 애자일 방법론을 적용하는 게 능사는 아니다. 알고 보면 2000년대 이후 크고 한국의 작은 기업에서 애자일 조직을 실험했지만 눈에 띄는 성공 사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것도 같은 이유다. 그래서 화두는 애자일 그 자체보다 애자일스럽게 일하기, 애자일을 애자일답게 도입하는 것에 모아진다.


chari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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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208호(2019.01.21 ~ 2019.01.27)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