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코인 A to Z]
- 글로벌 물류 기업 CEO 60% “참여자에 대한 불신 때문에 아직 블록체인 적용 어려워”

블록체인의 한계를 만드는 ‘신뢰의 역설’
[오태민 마이지놈박스 블록체인 연구소장] 혁신 기술로서 블록체인의 공헌이 가장 뚜렷할 것으로 예상되는 분야는 바로 물류 산업이다. 실제로 2016년 글로벌 1위 선사인 머스크가 IBM과 손잡고 컨테이너 화물 추적 블록체인 프로젝트를 시작했고 2018년 양 사는 합작 법인인 ‘트레이드렌즈(TradeLens)’를 설립했다.

트레이드렌즈 서비스에는 지난해 말까지 세계적 물류 기업을 포함한 100개 이상의 조직과 20개의 항만 터미널 운영사가 파트너로 참여했다. 트레이드렌즈 서비스는 이미 2000만 개 이상의 컨테이너를 처리했고 전 세계적으로 2억3000만 건의 출하를 기록했다.

국내에서도 2017년 삼성SDS 주도로 해운 선사와 항만·세관·화주·운송사 등이 함께 해운 물류 블록체인 컨소시엄을 구성하고 개념 증명(PoC : Proof of Concept)을 진행했다. 최근에도 물류 블록체인협의회를 구성하는 등 다양한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해운업을 비롯한 물류 산업에서 블록체인이 일으킬 변화는 설명하기도 쉽고 블록체인의 특성도 잘 보여준다. 화물이 먼 거리를 이동함에 따라 발생하는 신뢰의 문제들을 블록체인이 해결해 줄 수 있다. 대표적으로 와인과 같은 농산물이나 의약품들이 컨테이너 내부의 온도 변화로 변질되는 것을 감시하고 이상 징후를 투명하게 공개해 정보의 비대칭 문제를 해결한다.

하지만 물류 산업을 대표하는 기업 경영자들의 블록체인에 대한 인식은 그리 명료하지 않다. 세계적 컨설팅 기업인 보스턴컨설팅그룹(BCG)은 물류 수송(T&L)업계 대표자들을 대상으로 2018년 9월 서베이를 진행했고 그 결과를 지난 1월 발표했다. 보고서 제목에 ‘블록체인 패러독스’라는 어휘가 들어가 있을 만큼 블록체인을 둘러싼 물류업계 경영자들의 인식은 혼란스럽다.


머스크와 IBM이 주도하는 ‘트레이드렌즈’

업계 최고경영자(CEO) 10명 중 9명은 블록체인이 물류 운송업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것이라고 전망했다. 또 60%는 그 변화가 2년에서 5년 내에 벌어질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75%는 블록체인을 적용할 계획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보고했다. 20% 정도만 블록체인이 회사의 주요 전략 사항 톱10에 포함돼 있다고 응답했다. 경영자 스스로 블록체인을 이해하고 있는 것 같다고 대답한 비율도 16%에 불과했다.

BCG는 블록체인이 해결하려는 문제가 바로 블록체인의 확장을 막고 있다고 지적했다. 쉽게 말해 블록체인이 물류 산업의 불신 문제를 해결해 준다고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블록체인에 대한 기업들의 불신을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참여자 간의 불신이 블록체인 기술을 업계에 적용하는 데 가장 큰 장애 요소라고 답한 비율이 60%라는 결과가 이 주장을 뒷받침한다. 경쟁사가 주도하는 블록체인 플랫폼이 중립성을 지킬 것으로 보지 않아 믿을 수 없다는 의미다.

머스크가 주도하는 트레이드렌즈가 해상 물류에서 신뢰 문제의 종결자가 되기 위해서는 머스크와 경쟁 관계에 있는 다른 해운사가 이 플랫폼 운영에 참여해야 한다. 블록체인은 본질상 분산 서버이므로 이해가 상충하는 경쟁사들 간에 서버를 분할했을 때 누군가 데이터를 지배하거나 조작하기가 어렵다.

문제는 다른 플랫폼 경쟁이 그러하듯 주요 기업들이 경쟁자를 배제하고 자신이 주도하는 플랫폼이 업계 표준으로 자리 잡기를 희망한다는 것이다. 머스크와 같이 지배적인 위치에 있는 기업이 주도하는 플랫폼에 참여하면 자신의 독자적이 플랫폼이 성장할 기회를 잃게 되지만 자사의 독자적인 플랫폼을 다른 업체나 소비자들이 믿어줄 것으로 기대하기는 더욱 어렵다. 기업들이 주도하는 플랫폼이 아니라 이더리움과 같이 공개된 플랫폼을 사용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일단 굵직한 글로벌 기업들이 참여하지 않고 참여한다고 해도 당장 이익이 없고 더구나 자사의 물류 정보가 공개되므로 경쟁사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내키지 않는 선택이다.

블록체인의 속성은 가시성과 투명성, 변경 불가능성이다. 이 속성을 경영자들이 이해한다면 이 기술이 물류 산업의 고질적인 불신 문제와 이를 해결하기 위해 지불해야 하는 큰 비용을 해결해 줄 것으로 기대할 것이다. 그런데 다양한 기업들이 복잡한 관계를 맺고 있는 현실을 고려할 때 공평무사한 블록체인 플랫폼이 등장하기까지는 수많은 난관을 통과할 필요가 있다는 결론에 바로 다다른다. 이런 생각의 여정이 서베이를 통해 드러난 셈이다. 경영자들의 현실 인식은 단기적으로는 투자 보류와 관망으로 나타날 것이다. 하지만 어디에선가 ‘대세’가 감지되는 즉시 그 흐름에 올라타기 위한 러시가 있을 것이라는 여운도 남기고 있다.

블록체인에 대한 물류업계 경영자들의 인식이 패러독스로 이뤄져 있다는 사실은 ‘신뢰’ 자체가 역설적인 현상이라는 점에서 볼 때 자연스럽다. 인터넷도 분산 시스템이지만 대중이 주로 사용하는 인터넷은 집중돼 있다. 그것도 구글·페이스북·유튜브와 같이 대기업들이 제공하는 상업적인 서비스가 대부분이다. 인터넷 공룡 기업들이야말로 대중이 선택의 상황에서 큰 기업을 신뢰한다는 증거다. 신뢰의 쏠림은 배신의 이익을 높이기 마련이므로 글로벌 뉴스는 언제나 대기업들의 기만행위에 대한 고발로 넘쳐난다.

신뢰는 쏠리는 경향이 있고 그 결과 배신의 이익이 커지므로 대중은 엘리트들로부터 종종 배신을 당한다. 그렇다고 신뢰가 분산돼 안정적으로 유지되는 것을 현실에서 관찰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대중은 언제나 남이 본 영화나 남이 구입한 상품, 남들이 이용하는 백화점을 선호한다. 제한된 자원과 정보라는 현실 제약을 고려할 때 가장 합리적 선택이기도 하므로 쏠림 현상은 하나의 사회구조다.

블록체인에 대한 투자나 비트코인의 가격이 점진적이거나 완만하지 않고 거품과 붕괴를 반복하는 이유도 결국 사람들이 남들의 선택을 선택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블록체인이 패러독스이기 이전에 신뢰야말로 패러독스이자 거대한 수수께끼인 셈이다.


[돋보기] 다이아몬드를 놓고 벌이는 에버레저와 트레이서의 경쟁
시장의 지배자가 독자적인 플랫폼을 만들어 업계의 표준으로 삼으려는 시도는 전 산업 분야에서 관측되는 보편적인 현상이지만 블록체인 플랫폼에서는 다이아몬드가 대표적이다.

다이아몬드의 생산과 유통을 블록체인에 올리면 블러드 다이아몬드와 같이 윤리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생산되는 다이아몬드를 추방할 수 있고 허위 도난 신고와 같은 보험 사기를 위축시킬 수도 있다. 이 아이디어를 일찌감치 실행에 옮기겠다고 나선 기업은 스타트업인 에버레저다.

한동안 블록체인이라는 비주류 기술에 대해 심드렁한 모습을 보이던 드비어스도 최근에는 다이아몬드 블록체인 플랫폼 ‘트레이서’를 개발하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아무도 다이아몬드 시장 비율이 30%가 넘는 드비어스를 블록체인 유통 플랫폼의 후발 주자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다이아몬드 광산을 하나도 보유하지 않은 에버레저보다 드비어스의 트레이서가 다이아몬드 유통 블록체인 플랫폼의 표준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예측한다.

그렇다면 과연 드비어스가 지배하는 플랫폼이 단지 블록체인이라는 이유로 궁극적인 신뢰를 확보할 수 있을까. 드비어스가 심판자로서 소규모 유통 업체와 소비자를 중재할 때는 그렇다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드비어스 자체가 이해 당사자가 되는 경우 드비어스가 주도하는 블록체인이 이해 상충을 무릅쓰고 중립성을 지킬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게다가 물류 업체들이 디자인하는 블록체인은 누구나 서버를 운영하는 비트코인과 같은 퍼블릭 블록체인과는 거리가 멀다. 서버가 분산돼 있는 것은 사실이겠지만 대부분의 서버가 자사나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협력회사들의 지배 아래 놓여 있다.

자사의 시장 지배력을 믿고 손쉽게 업계 표준을 만들 것으로 예상하는 드비어스는 플랫폼이 완성되는 단계에 이르면 자사의 바로 그 우월적 지위 때문에 플랫폼에 궁극적인 신뢰를 부여하기 어렵다는 역설, 즉 신뢰의 수수께끼라는 벽에 마주칠 가능성이 높다.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211호(2019.02.11 ~ 2019.02.17)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