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코인 A to Z]
-비트코인, 물가 폭등하는 베네수엘라에서 가장 안정적인 가치 보존 수단으로 선택 받아
2000년 동안 나라 없이 생존해 온 유대민족의 비밀…‘부의 추상화’
(사진) 유대인들이 가을 수확 축제인 ‘초막절(Sukkot)’을 즐기고 있다.

[오태민 마이지놈박스 블록체인 연구소장] 침체된 가격과 달리 비트코인의 블록체인 거래량은 역사상 최대치에 근접하고 있다. 이는 비트코인 직거래가 증가한 것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최근 베네수엘라에서 비트코인 사용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비트코인 직거래 사이트 로컬비트코인닷컴(LocalBitcoins.com)에서 베네수엘라는 러시아에 이어 거래량 2위에 올랐다.

뉴욕타임스는 2월 23일 ‘비트코인이 우리 가족을 살리고 있다’는 제목으로 베네수엘라의 경제학자 카를로스 에르난데스의 기고문을 실었다. 에르난데스 가족의 생생한 경험담은 ‘비트코인은 화폐가 아니고 될 수도 없다’는 주류경제학자들의 비판에 대해 그 어떤 반론보다 설득력이 있다.

그와 그의 가족은 전 재산을 비트코인으로 보유한다. 1년에 80%나 가치를 잃어버리는 비트코인에 전 재산을 거는 일은 1년에 1만7000배나 물가가 오르는 베네수엘라에선 가장 안전한 저축이다. 볼리바르로 환전하면 그 즉시 모두 사용해야 하기 때문에 그는 매일 조금씩 비트코인을 팔아 우유나 치즈를 구입하고 있다.

가치가 안정적인 달러를 가지고 있으면 좋지만 외국으로부터 달러를 들여올 방법이 없다는 것이 문제다. 은행을 통한 송금은 모두 막혀 있고 공식 환율과 암시장 환율은 두 배 이상 차이가 난다. 손해를 덜 보기 위해 암시장에서 환전하려면 사기와 범죄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따라서 현재 베네수엘라에서 외국으로부터 송금 받는 가장 저렴하고 안전한 방법은 비트코인인 셈이다. 변호사로 일하다가 생계 때문에 그래픽 디자이너로 전업한 그의 동생은 외국의 의뢰인으로부터 페이팔로 달러를 송금 받을 수 없었다고 한다. 정부가 달러 송금을 막았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비트코인으로 결제 받았는데 그렇게 모은 비트코인 덕분에 베네수엘라를 떠날 수 있었다.

에르난데스에 따르면 비트코인은 국경도 상관없고 형태도 없기 때문에 유용하다. 베네수엘라의 국경 수비대는 국경을 넘는 이들의 짐을 뒤진다. 월경을 눈감아 주는 대신 가진 것을 내놓으라는 일종의 산적질이다. 에르난데스의 동생은 비트코인 개인키만 머릿속에 넣어 두었기 때문에 군인들에게 빼앗기지 않고 국경을 넘을 수 있었다.

‘비트코인이 우리 가족을 살리고 있다’

경제학자들은 시스템이 제 기능을 하는 사회만 전제하느라 비트코인의 본질에 다가가지 못할 때가 많다. 하지만 비트코인은 베네수엘라처럼 경제가 무너지는 사회에서 저력을 발휘한다. 역사적으로 금융을 통해 사람들이 해결하고자 했던 문제들을 살펴보면 에르난데스의 비트코인 옹호론이 그다지 유별난 것이 아니라는 결론에 다다른다.

근대 금융의 발달을 이야기할 때 유대인들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다. 무기명 채권이나 주식, 중앙은행이 유대인들의 발명품이 아니라고 해도 이 시스템들이 성장하는 데 유대인들이 크게 기여했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학자는 드물다. 각지에 흩어져 살면서 소수민족의 정체성을 2000년 이상 유지해 온 이들은 핍박받아 온 다른 소수민족과는 구별되는 패턴을 보여준다.
소수민족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주류 사회의 핵심부에 접근했다가 추방당하는 과정을 반복해 왔다. 무대와 배우만 바꾼 채 동일한 각본으로 재연되는 연극과도 비슷하다. 기독교나 이슬람 국가를 가리지 않고 어느 곳에서나 유대인들은 몇 세대에 거쳐 부를 축적하는 데 성공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주류 사회의 하층민으로부터 질시를 받는다.

모든 비극의 뿌리를 캐 들어가면 거기에는 탐욕스러운 유대인들의 음모 세력이 있다는 식의 소문이 정설로 굳어지고 나면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고자 하는 군왕이 등장해 결국 유대인들의 학살과 추방으로 귀결된다. 광기가 잦아들고 나면 유대인들의 재산을 빼앗는 것이 숨겨진 목적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나곤 했었다. 유대인들의 성공이 유대인들의 고난을 초래한 셈이다.

‘국경 없는 화폐는 유행 이상의 의미다’

소수민족으로서 권력을 가진 왕실에게 돈을 빌려주는 일은 일종의 보험이기도 했지만 매우 위험한 일이기도 했다. 빚을 갚지 않으려는 왕은 구실을 만들어 채권자를 죽이려고 했다. 왕실에 빚을 떼이고 비참한 몰락을 경험한 유대계 금융인들은 무기명 채권을 선호하기 시작했다. 채권은 비인격적인 채무이기 때문에 유대인 금융 재벌을 추방한다고 간단하게 털어버릴 수 없다. 여기에 채권자 쪽에서도 왕실의 재정이 위기에 처했다고 판단되면 채권을 처분하는 방식으로 비교적 손쉽게 대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자산의 추상화는 인간의 직관에 어긋나는 개념이었다. 중세인들은 집과 토지 대신 채권과 같은 종이 쪼가리를 수집하는 유대인들이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유가증권과 같이 추상화된 자산에 대한 유대인들의 애착은 몇 세대에 걸쳐 축적한 자산을 하루아침에 빼앗겨 본 아픔을 겪었던 이들의 축적된 지혜인 셈이다. ‘유대인의 역사’를 쓴 폴 존슨은 ‘재정을 비인격화해 경제 과정을 합리화하는 것은 유대인들의 집단적 본능’이라고 말했다.

오늘날 국가 채무를 없애는 가장 쉬운 방법은 바로 인플레이션이다. 이런 정부를 둔 주민들은 정부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부터 도움을 받거나 자산을 이동해야 한다. 하지만 정부가 은행을 통제하기 때문에 달러나 신용카드로는 그 일을 할 수 없다. 국경이나 실물에 매이지 않는 권리물이 필요하다. 화폐를 국가가 인정하는 지불수단이라고 정의하는 데서 한 발짝도 움직이려고 하지 않는 경제학자들로서는 도무지 인정할 수 없는 주장이지만 비트코인의 무정부성이야말로 정부가 약탈자와 다름없는 국가의 주민들에게는 일종의 복음인 셈이다.
“경제를 붕괴시키는 독재국가의 국민들에게 국경 없는 화폐는 유행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경제학자이기 이전에 사회 붕괴의 현장에서 살아남고자 하는 생활인 에르난데스의 증언이다.

[돋보기] 왕실에 직접 돈을 빌려주는 일의 위험성
십자군 전쟁에서 활약했던 성전기사단도 근대적 금융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일조했다. 성전기사단은 전쟁터에서 대활약을 펼쳤던 소수 정예 전사 집단이지만 당시 서유럽과 중동을 연결하는 금융업을 독점한 은행 역할도 했다. 귀족의 자제들이 입단할 때 자신의 전 재산을 기탁한데다 성금도 많았기 때문에 자기자본이 풍부했다. 또 당시는 무장 세력만이 금융업을 영위할 만큼 험악했던 때였다. 하지만 200년 동안 지속돼 온 성전기사단의 신화는 같은 십자군 진영인 프랑스 국왕에 의해 철저히 파괴됐다.

재정난에 허덕이던 프랑스 왕실은 성전기사단에 막대한 빚을 지고 있었다. 프랑스 왕 필리프 4세는 기사단이 악마 숭배 의식을 한다는 소문을 활용하기로 했고 고문 끝에 자백을 받아냈다. 핵심 요인들은 화형에 처했고 성전기사단의 남은 재산은 대부분 프랑스 왕의 몫이 됐다. 프랑스 왕과 로마 교황은 성전기사단을 민중의 기억에서 지우는 작업을 조직적으로 펼쳤다.

1308년 금융 재벌의 자산을 몰수하기 위해 국가권력이 조직적으로 날조한 재판에 대한 잔인한 희화인지도 모르지만 오늘날 음모 이론에도 악마 숭배 의식에 관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아무튼 당시 성전기사단과 쌍벽을 이뤘던 병원기사단은 금융업에 손을 대지 않았고 그래서인지 현재까지도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만약 성전기사단이 프랑스 왕실의 빚을 채권 형태로 시장에 유통시켰더라면 아직까지도 로마 바티칸 한쪽에 성전기사단의 휘장이 남아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215호(2019.03.11 ~ 2019.03.17)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