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정치판에선]
-한나라당 쇄신 모임에서 출발해 맥 끊긴 미래연대, 핵심 멤버들 존재감 커져




여야 대선 주자 잠룡들의 산실 ‘미래연대’


[홍영식 한국경제 논설위원] 1999년 말 당시 한나라당에 비상이 걸렸다. 이듬해 4월 예정된 16대 국회의원 총선거를 앞두고 김대중 대통령이 여당이던 새천년민주당 지도부에 ‘젊은 피’ 수혈을 지시하면서다. 김 대통령은 새천년민주당 총재를 겸임하고 있었다. 여소야대 정국을 뒤엎기 위해선 새 얼굴로 과감하게 물갈이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새천년민주당의 전신인 새정치국민회의는 1996년 15대 총선에서 79석만 건지며 참패했다. 한나라당의 전신인 신한국당이 예상을 뒤엎고 139석을 얻어 원내 1당을 굳건하게 유지했다. 김 대통령은 이런 정국 구도에서 법안 하나 제대로 통과시키지 못하는 등 국정 운영에 상당히 애로를 겪었다.

◆ 쇄신 외치며 기성 정치권에 새바람

김 대통령의 지시를 받은 새천년민주당 지도부는 ‘386 운동권’ 출신(당시 나이 30대·80년대 학번·60년대 출생)을 비롯해 광범위하게 정치 신인 영입에 나섰다. 임종석 전 대통령 비서실장, 송영길·우상호·이인영 현 더불어민주당 의원, 강기정 청와대 정무수석, 오영식 코레일 전 사장 등이 그때 정치권에 들어왔던 대표적 인물이다. 16대 총선에서 새천년민주당의 물갈이 공천은 빛을 발했다. 15대 때와 비교해 26석이 늘어난 115명의 당선자를 냈다. 그 가운데 절반에 육박하는 55명이 초선이었다. 각 당 중 신인 비율이 가장 높았다.

여의도에 입성한 새천년민주당 정치 초년병들은 당 쇄신의 목청을 키우며 당시 주류였던 ‘동교동계’를 정면으로 비판해 주목받았다. 이후 동교동계는 당 운영 주도권을 서서히 잃기 시작했다. 이들은 2002년 노무현 대통령 당선 밑거름 역할을 하며 정치권의 중진으로 성장했다.

한나라당도 가만있을 수 없었다. 당시 이회창 총재의 핵심 참모였던 윤여준 환경부 전 장관은 이 총재에게 젊고 참신한 인물이 필요하다고 건의했다. 이 총재는 남경필 당시 한나라당 의원에게 모임을 만들 것을 제안했다. 남 의원은 2000년 1월 ‘미래를 위한 청년연대(미래연대)’를 결성하고 참신한 인물을 모으는 작업에 나섰다. 남 의원은 1998년 7월 34세의 나이로 보궐선거를 통해 의원 배지를 달고 있었다.

1982년 제주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대학 입학 학력고사 전국 수석을 차지해 이름을 날렸던 원희룡 현 제주지사와 김영삼 전 대통령의 측근인 정병국 현 바른미래당 의원을 끌어들였다. 2000년대 소장파의 대명사로 불렸던 ‘남(남경필)·원(원희룡)·정(정병국)’이란 단어가 이때 생겼다.

‘남·원·정’이 주축이 돼 이 모임을 이끌면서 외연을 넓혀 갔다. 오세훈 전 서울시장과 김부겸 행정안전부 장관, 김영춘 해양수산부 장관, 권영진 대구시장, 심재철·황영철 자유한국당 의원, 김성식 바른미래당 의원, 임태희 전 이명박 대통령 비서실장, 권영세 전 주중 대사, 조해진·김성조·이성헌·박종희·권택기·김정권·정태근·차명진 전 의원 등이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이들은 “기성 정치의 벽 앞에서 모래알처럼 흩어지고 당리당략과 개인 영달, 눈치 보기 등 기성 정치의 껍질 속에 갇혀 있었다고 반성한다. 기성 정치가 외면해 온 목소리를 대변하겠다”는 기치를 들었다. 당 총재 1인 중심 체제에서 벗어나 집단 지도 체제인 최고위원회를 도입하는 일에 앞장섰다. 이회창 총재와 그를 둘러싸고 있었던 이른바 ‘병풍’ 세력들을 정면으로 비판하며 세대교체 바람을 일으켰다. 미래연대 멤버는 16대 국회 이후 배지를 단 사람만 30여 명에 달했다.

하지만 미래연대는 2002년 16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회창 후보가 노무현 후보에게 패하면서 활력을 잃었다. 특히 16대 대선 당시 한나라당이 불법 선거 자금을 수수한 이른바 ‘차떼기’ 파문 이후 김부겸·김영춘 당시 의원이 이우재·이부영·안영근 의원과 함께 탈당해 열린우리당으로 가면서 치명적 손상을 입었다. 이들은 ‘독수리 5형제’로 불렸다.
여야 대선 주자 잠룡들의 산실 ‘미래연대’
◆ 대권 잠룡으로 떠오른 미래연대 출신들

‘당 개혁과 쇄신’이라는 모임의 명분과 동력을 잃어버렸고 남은 의원들조차 한나라당 대표 자리를 놓고 맞붙었던 최병렬계와 서청원계로 분열됐다. 남경필·원희룡·오세훈·정병국 의원 등은 ‘친최병렬’ 인사로, 박종희·김용학·심규철·오경훈 의원 등은 ‘친서청원’ 인사로 분류됐다.

‘차떼기’ 사건으로 구속된 서청원 전 대표 석방 결의안 파문이 갈등 증폭의 결정적 계기가 됐다. 남경필 의원 등은 박종희 의원 등 이른바 서청원계 의원들이 서 전 대표 석방 요구 결의안 통과를 주도한 것에 대해 거세게 비판하면서 대립했다.

2004년 2월 미래연대는 공식적으로 해체됐다. 이 모임의 공동대표였던 남경필 의원은 성명을 내고 “미래연대가 당의 변화·개혁을 이끄는 것이 더는 불가능한 만큼 소속 회원들에게 이런 뜻을 알리고 해체 과정을 밟는 것이 옳다”고 밝혔다. 미래연대는 17대 국회에서 ‘수요모임’으로 18대 국회에서 ‘민본21’로 이어졌지만 미래연대 시절만큼 두드러진 활동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이후 정가에서 고비 때 개혁과 쇄신을 이끌었던 소장파의 존재감은 거의 볼 수 없다.

미래연대 멤버들은 이후 각자의 길을 걸으면서 때론 경쟁 관계를 형성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대구시장 자리를 놓고 맞붙었던 김부겸 장관과 권영진 현 시장이다. 김 장관은 2018년 지방선거에서 대구시장 후보로 나섰지만 권 시장에게 고배를 마셨다. 1956년 경북 상주에서 태어난 그는 경기 군포에서 내리 3선을 한 뒤 지역주의 벽을 깨겠다며 2012년 19대 총선 때 지역구를 옮겨 대구 수성갑에 출마했다. 패배했지만 40%가 넘는 득표율로 기염을 토했다. 야당의 불모지인 대구에서 거둔 의미 있는 성과였다. 절치부심한 끝에 2016년 20대 총선 때 김문수 새누리당(현 자유한국당) 후보를 제치고 당선됐다.

1962년 경북 안동에서 태어난 권 시장은 1999년 이회창 대통령 후보 보좌역으로 정치에 입문한 뒤 미래연대 사무총장을 지내는 등 소장파 리더로 꼽혔다. 2006년 지방선거에서 미래연대 동료였던 오세훈 서울시장 후보 비서실장을 맡아 선거를 승리로 이끈 뒤 서울시 정무부시장으로 변신했다. 18대 총선에서 서울 노원을에서 당선된 뒤 쇄신 모임인 ‘민본21’ 간사를 지냈다.

2022년 대선에서 미래연대 출신들이 경쟁해야 할 가능성이 높다. 여권에선 다시 당으로 돌아오는 김부겸·김영춘 장관이 내년 총선에서 당선된다면 대선에 나갈 가능성이 예상된다. 지난 대선 때 출마했던 김부겸 장관은 박원순 서울시장 등과 함께 일찌감치 유력 주자로 꼽혀 왔다.

야당에선 오세훈 전 시장과 원희룡 지사, 권영진 시장 등이 유력 잠룡으로 꼽힌다. 오 전 시장은 지난 2월 자유한국당 대표 경선에서 황교안 대표에게 패배했지만 여론조사에선 50.2%를 얻어 황 대표를 제치고 1위를 차지해 존재감을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오 전 시장은 내년 총선에서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의원 지역구인 서울 광진을 출마를 준비하고 있다. 19년 전 정치권 개혁과 쇄신을 기치로 내걸고 미래연대를 만들었던 여야 잠룡들이 차기 대선에서 어떤 승부를 펼칠지 주목된다.

yshong@hankyung.com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217호(2019.03.25 ~ 2019.03.31)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