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정치판에선]
-도입 20년 맞은 인사청문회 어떻게 해야 하나

‘자료 제출 거부’ 정책 질의 ‘실종’ 인신공격 ‘난무’ 바뀌지 않는 청문회
[김형호 한국경제 정치부 기자] “일본 주택 세금 신고 과정에서 국세청에 압력을 행사한 것 아닙니까?”(이철규 자유한국당 의원)

“그런 식으로 말씀하시면 제가 굉장히 화가 납니다.”(박영선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후보자)

3월 27일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에서 열린 장관 후보자 인사청문회는 평소 보기 드문 장면의 연속이었다. 현직 국회의원이더라도 장관 후보자로 지명돼 청문회에 들어서면 청문위원들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최대한 자세를 낮추는 게 통례였다. 하지만 이날 중소벤처기업부 장관후보자 인사청문회는 누가 청문 대상인지 헷갈릴 정도로 공수가 뒤바뀐 장면이 적지 않았다.

‘유방암 수술을 한 적이 있느냐’는 윤한홍 한국당 의원의 서면 질의에 박 후보자는 “여성으로서 모멸감을 느꼈다. 같은 수술을 한 여성들에 대한 모욕이자 ‘섹슈얼 허래스먼트(sexual harassment : 성희롱)’라고 느낀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야당 의원들의 공세는 박 후자의 역공에 번번이 가로막혔다.

박 후보자는 답변 도중 “황교안 한국당 대표가 법무부 장관 때 국회 법사위원장실에서 따로 만나 김학의 CD와 관련한 사안을 얘기한 적이 있다”는 폭탄성 발언도 내놓았다. 이후 박 후보자 청문회는 ‘김학의 CD’를 둘러싼 진실 공방으로 변질됐다. 중소벤처 현안과 정책에 대한 후보자의 소신을 묻고 따지는 검증은 설 자리가 없었다.

청문회를 지켜본 국회 관계자는 “청문회 저격수였던 박 후보자로부터 과거 이명박·박근혜 정부 당시 숱하게 당했던 한국당이 작심하고 나왔지만 의원들의 공격력이 예상보다 매섭지 못했다”며 “이를 간파한 박 후보자가 오후부터 역으로 야당 청문위원들의 질문에 역공을 가하면서 청문회가 결국 파행으로 끝났다”고 전했다.

이와 달리 전날인 3월 26일 열린 박양우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후보자 청문회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자녀에 대한 증여세 지연 납부, CJ ENM 사외이사 경력 등이 일부 도마 위에 올랐지만 큰 논란이 되지는 않았다. 박 후보자와 같이 장관 후보로 거론됐던 우상호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같이 후보군에 올랐던 사람으로서 축하드린다”는 덕담까지 건넨 뒤 질의를 이어 갔다.

한국당 등 야당 의원들도 초반 각종 의혹에 대한 질의를 마친 후 오후부터 정책 관련 질문을 던지며 모처럼 자질 검증 청문회의 모습을 보였다. 안민석 문화체육관광위원장은 “국회에서 청문회를 여러 번 해봤는데 이렇게 원활하게 진행된 것은 처음 본다”며 애초 3분인 추가 질의 시간을 5분으로 늘려주는 여유까지 보였다.

그런데도 이번에 인사청문회를 치른 7개 부처 장관 후보자의 인사 청문 경과보고서가 국회에서 여야 합의로 통과될 가능성은 극히 낮다. 청문회를 마무리한 직후 한국당은 후보자 7명 전원이 모두 ‘부적격’이라며 청문보고서 채택을 거부했다. 청문회를 거친 장관 전원의 청문보고서가 채택되지 않는 초유의 사태도 배제할 수 없다는 관측이 나온다.

박영선 후보자 청문회 과정에서 불거진 ‘김학의 동영상’ 발언을 계기로 여야의 대립이 한층 격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권 관계자는 “김학의 전 차관 관련 동영상 발언이 나오면서 한국당이 크게 격앙된 상태”라며 “이제 후보자 개개인의 자질 문제로 청문보고서 채택을 논의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 ‘김학의 동영상’ 파문에 한국당 청문보고서 채택 거부

한국당을 제외한 여야 4당이 선거법 개정안과 고위 공직자 비리수사처를 연계한 패스트 트랙(신속 처리 안건) 지정을 추진하고 있는 만큼 한국당은 ‘청문 보고서 채택 거부’ 카드를 적극 활용할 공산이 크다. 나경원 한국당 원내대표는 3월 28일 ‘문재인 정권 인사청문회 평가회의’에서 장관 후보자 7명에 대한 청와대의 지명 철회와 사퇴를 요구했다.

다만 7명 후보자 전원에 대한 청문보고서 채택 거부에 따른 여론의 반발을 고려해 여야 협상 과정에서 선택적으로 청문보고서를 처리할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한국당이 절대 거부 방침을 밝힌 박영선 중소벤처부 장관 후보자와 김연철 통일부 장관 후보자에 대해서는 여권에서도 보고서 채택을 기대하지 않는 분위기다.

인사청문회법에 따르면 청문보고서가 채택되지 않으면 대통령은 10일 이내 범위 내에서 기간을 정해 보고서를 보내 달라고 요청할 수 있다. 국회가 끝내 보고서를 채택하지 않으면 한 차례 더 보고서 송부를 요청할 수 있다. 이후에도 보고서가 오지 않으면 대통령은 후보자 임명을 강행할 수 있다. 야당이 청문보고서를 채택하지 않는다면 4월 중순 이후에는 문재인 대통령이 후보를 임명할 수 있다는 얘기다.

이런 구조 때문에 인사청문회는 매번 운영 방식을 둘러싼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인사 청문보고서 채택과 무관하게 대통령이 임명을 강행할 수 있는 제도에서는 정상적인 청문회 운영이 어렵다는 지적이다. 후보자들이 ‘하루만 버티면 된다’는 식의 태도를 보이고 자료 제출에 비협조적인 것도 그 누구보다 이런 맹점을 잘 알기 때문이다.

신율 명지대 교수는 “청문위원들의 공세를 피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매뉴얼이 생겨날 정도로 버티면 된다는 분위기 팽배하다”며 “입법부가 행정부를 견제하는 수단이자 장관 후보자가 국민과 소통하는 자리가 청문회인데 그런 기능이 전혀 작동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인사청문회는 김대중 정부 때인 2000년 6월 이한동 국무총리 후보자를 대상으로 사상 처음 도입된 후 숱한 낙마자를 낳았다. 2002년에는 장상 총리 지명자와 장대환 지명자가 연거푸 국회 인준 문턱을 넘지 못했다. 2003년 노무현 정부에서부터 인사 청문 대상자가 국가정보원장·검찰총장·국세청장·경찰청장으로 확대됐다. 이전까지 장관 후보자는 청문 대상에서 제외됐지만 2005년 7월부터 국무위원 전원으로 확대되면서 대통령의 지명 이후 인사 청문 과정에서 사퇴하거나 지명을 철회하는 등 낙마자가 등장했다.

◆ 20년 맞은 인사청문제도 보완 시급

전문가들은 올해로 20년 차를 맞은 인사청문제도의 보완을 검토할 때가 됐다고 보고 있다. 인사청문회의 유명무실화를 방지하기 위해 장관 후보자도 국회 동의 대상에 포함하는 방안 등이 거론된다.

김준한 동국대 교수는 “청문회가 무력화되는 데는 청와대의 임명 강행 방식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며 “야당으로서는 무슨 지적을 하든 임명을 강행하기 때문에 정치 공세로 나갈 수밖에 없고 여당은 흠결 있어도 밀고 나가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제도 보완 방안의 일환으로 국회 동의제를 거론했다. 그는 “현재 국무총리에게 적용되는 국회 동의제를 미국처럼 전체 국무위원으로 확대하는 방안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신 교수도 인준 대상의 확대를 권고했다. 신 교수는 “미국은 국회 인준 대상이 1만7000명에 달하지만 우리는 채 20명도 되지 않는다”며 “행정부 견제라는 본연의 기능을 위해 대상을 확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반면 지나치게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면 장관 후보자 발굴이 어려울 수 있는 만큼 국회 차원에서 여야가 모두 합의할 수 있는 ‘가이드라인’을 마련하는 게 보다 현실적이라는 목소리도 있다.

이준한 인천대 교수는 “대통령이 강행하는 게 매번 문제라면서도 여야로 정권이 바뀔 때마다 다른 주장을 했기 때문에 그동안 손을 대지 못한 것”이라며 인준 대상 확대가 정확한 처방은 아니라는 의견을 보였다. 이 교수는 “여야가 바뀌더라도 일괄되게 적용할 수 있는 기준을 합의로 마련해 정치 공세를 지양하는 청문회 문화를 만들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chsan@hankyung.com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218호(2019.04.01 ~ 2019.04.07)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