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인물에게서 배우는 경영 이야기 ⑨
중견기업의 길, 정약용의 ‘겸제(兼濟)’에서 배운다
겸제원(兼濟院). 다산 정약용 선생이 1797년(정조 21년) 황해도 곡산도호부 부사 재직 시절 실시한 제도의 이름이다. 겸제(兼濟)는 ‘양쪽을 함께 구제한다’는 뜻을 갖고 있다.
당시 황해도 곡산에는 9명의 유배자들이 있었다.

문제는 그들의 생계 대책이었다. 마을의 이장은 가구 수를 계산해 끼니마다 돌아가면서 유배자들에게 식사를 대접하게 했다. 유배자들은 양반 신분이었기 때문에 그래야 먹고살 수 있었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의 끼니도 여의치 않은 상황인 데다 인색한 일부 주민들이 식사를 대접하지 않아 마을에서 갈등이 발생했다.

생각해 보면 난감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낯선 땅에서 귀양살이를 하는 유배자들은 그들대로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는데 마을 사람들은 그들 때문에 부담을 겪고 있는 것이다. 정약용은 마을의 어른들을 불러 모았고 실정을 파악했다. 그리고 나온 아이디어가 바로 ‘겸제원’의 창설이다.
중견기업의 길, 정약용의 ‘겸제(兼濟)’에서 배운다

◆성장 사다리를 연결하는 중견기업

겸제원은 마을 주민과 유배자들이 서로 숙식과 교육을 교환하는 장이 됐다. 마을 주민들은 쌀을 기금으로 내고 유배자들의 잠자리와 먹을 것을 제공했다. 유배자들은 그 대신 주민들에게 글을 가르쳐 줬다.

‘양쪽을 동시에 구제하는’ 겸제원 덕분에 주민들은 경제적 부담에서 벗어났고 유배자들은 인간다운 생활을 할 수 있게 됐다.

필자에게 다산 정약용은 기업 경영을 하며 고민이 생길 때마다 찾는 큰 스승 중 한 명이다. 겸제원을 만드는 과정에서 보여준 그의 현명함은 ‘우리 사회에서 중견기업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라는 필자의 오랜 질문에 해답의 실마리를 던져줬다. 바로 중견기업의 역할이 ‘겸제’의 실현이라는 것이다.

중견기업의 겸제는 두 가지 측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는 경제 중심으로서의 중견기업이다. 중견기업은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에 자리해 있다. 하늘은 하늘의 역할이 있고 땅은 땅의 역할이 있듯이 각자 자신의 자리에 맞는 역할을 해야 사회가 건강해진다.

즉 중견기업이 양팔을 뻗어 왼손으로는 중소기업의 손을, 오른손으로는 대기업의 손을 잡은 채 성장 사다리를 연결하는 ‘겸제’를 실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독일은 ‘히든 챔피언’이라고 불리는 중견기업이 탄탄하게 허리 역할을 수행해 지금의 경제 강국의 위치에 올랐다. 미국에서 금융 위기 이후 일자리를 책임진 것도 ‘미들 마켓 컴퍼니(middle market company)’라고 불리는 중간 규모의 기업들이었다. 이들이 최근 미국의 경제 부흥을 이끌고 있다.

중견기업은 대기업보다 덩치는 작지만 변화에 빠르게 적응하고 유연하게 대처한다. 또 자신의 분야에서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전문성을 갖고 있다. 따라서 지금처럼 위기가 일상화되고 불확실성으로 가득한 시기에는 중견기업이 바로 서야 나라 경제가 강해질 수 있다.

독일의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총리는 “미래 경제 발전을 위해서는 독일의 미텔슈탄트 같은 중견기업 육성이 필수적”이라고 말한 바 있다. 더 많은 강한 중견기업이 등장해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에서 겸제의 미(美)를 발휘할 수 있게 도와야 한다.

둘째는 ‘인재를 키우는 장’으로서의 겸제다. 기업과 인재가 함께 성장하는 겸제를 가리킨다. 기업의 책무는 좋은 일자리를 많이 만들어 인재가 오래도록 머무르도록 하는 것이다. 또 인재가 스스로 성장할 수 있는 토양을 만들어야 한다.

필자는 이를 ‘유기농 경영’이라고 부른다. 일자리를 만드는 역할을 넘어 사람을 기르는 곳이어야 한다는 믿음이다. 개개인의 강점이 발휘될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 주고 누구나 인재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인재가 나무라면 기업은 숲인 셈이다. 이 상생이 바로 기업이 추구해야 할 겸제다.

◆인재의 격차 줄여야

인재를 키우는 것은 기업의 규모와 상관없다. 유기농 경영의 터로 인재를 육성하게 되면 작은 기업은 작은 기업대로 경쟁력이 생겨 좋고 대기업도 양질의 인재를 구축한 협력사들과 일하게 돼 이롭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인재의 격차를 줄이는 것이야말로 겸제라고 할 수 있다.

한국콜마는 겸제의 정신을 실천하기 위해 상생 교육 프로그램을 만들어 운영하고 있다. 사내 교육 여건이 충분하지 않은 중견·중소기업에 한국콜마의 인재 육성 노하우를 제공하는 것이다. 참여한 기업들로부터 인재 역량을 강화하는 데 큰 도움을 받았다는 평가를 들으면 기쁘기 그지없다.

최근 국내 중견기업은 어려운 경제 상황 속에서도 채용 확대의 기조를 이어 가려고 애쓰고 있다. ‘겸제’의 시각에서 이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한국중견기업연합회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중견기업계는 2017년 총 25만3952명을 신규 채용했다.

이는 2016년 20만102명에 비해 26.9% 늘어난 것이다. 한국콜마 역시 1990년 창립 이후 해마다 두 자릿수 매출 성장에 비례해 일자리를 늘려 왔다. 2015년부터 매년 100명 이상의 대졸 신입 사원을 채용해 왔고 2018년 하반기 채용에는 200명의 신입 사원을 채용했다.

중견기업이 꼿꼿하게 허리 역할을 해낼 수 있게 뒷받침해 줘야 한다. 그래야 경제가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다. “창출한 이윤을 어디에 쓸 것인가”라는 질문에 “고용 확대”라고 답하는 중견기업들이 많아야 사회가 건강해진다. 이것이야말로 정약용이 세운 겸제원의 정신을 오늘날에 실천하는 길이다.
중견기업의 길, 정약용의 ‘겸제(兼濟)’에서 배운다

◆윤동한 한국콜마 회장약력 :
윤동한 한국콜마 회장은 한국 화장품과 제약 산업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윤 회장은 농협중앙회를 거쳐 1974년 대웅제약에 입사해 부사장에까지 올랐다. 하지만 창업의 꿈을 이루기 위해 1990년 한국콜마를 설립하고 국내 화장품업계 최초로 제조업자개발생산(ODM) 시스템을 도입해 매출 1조원의 기업으로 키워 냈다. 2017년엔 이순신 리더십을 전파하는 사단법인 서울여해재단을 설립해 이사장을 맡고 있다.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219호(2019.04.08 ~ 2019.04.14)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