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반도체 대전환 플랜]
-차세대 지능형 반도체 개발의 메카 ‘ETRI’…“중국 반도체 산업 주춤한 지금이 기회”
'5X5mm' AI 칩 하나로 데이터센터 대체… 1초에 33회 물체인식
[한경비즈니스=이현주 기자] “알데바란(AB)9 칩은 인공지능(AI) 칩입니다. 초당 40조 개를 연산하는 40테라플롭스급 반도체를 설계 완료했고 올해 말 선보일 예정입니다. 고신뢰 AI 자율주행 프로세서로 자율주행차에 적용될 예정인데 슈퍼컴퓨터에도 쓰일 수 있는 성능으로 끌어올렸다고 봅니다.”

강성원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지능형반도체연구본부장이 칩을 가리키며 설명했다. 6월 3일 방문한 ETRI에는 ‘알데바란 반도체 모형 칩’이 전시돼 있었다. 알데바란은 ETRI에서 개발한 자율주행차 전용 프로세서다. 자율주행차의 모든 센서로부터 수집된 데이터를 하나의 칩으로 통합 처리하는 것을 목표로, 2016년 첫선을 보인 이후 지속적으로 업그레이드 버전이 나왔다.

올해 새롭게 선보일 AB9은 AI 반도체라는 의미를 갖는다. 그간 AI는 소프트웨어의 영역으로 알려져 왔다. 구글이 만든 알파고와 같이 세상을 바꾸는 소프트웨어 프로그래밍이 중요하게 취급됐다. AI 반도체는 하드웨어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기존에는 방대한 데이터를 처리하기 위해 별도의 데이터센터를 이용해야 했다면 AI 반도체가 상용화되면 칩 하나로 직접 수많은 연산을 처리할 수 있게 된다.

강 본부장은 “AI 서비스를 할 때 원거리 데이터센터와의 통신이 원활하지 못했던 문제가 있었다면 AI 반도체를 심으면 일을 수행하는 위치가 에지(edge) 단으로 내려오면서 효율성이 높아진다”며 “사물인터넷(IoT) 시대 컴퓨팅 방식이고 이것이 가능한 것은 하드웨어인 반도체가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반도체가 ‘지능’을 갖다
ETRI는 비베모리 반도체 연구·개발(R&D)의 산실이다. 1976년 정부 출연 연구 기관으로 설립된 이후 한국 반도체 기술 개발과 맥을 같이해 왔다. 첫째 주목할 만한 성과로는 국내 최초의 메모리 반도체 32K 롬(ROM) 개발이 손꼽힌다. 32K 롬은 4000여 개의 단어를 저장할 수 있는 초창기의 메모리 반도체다.

비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선 1985년 주문형 반도체를 개발하면서 주도하기 시작했다. ETRI는 1987년 전자교환기인 TDX-1용 반도체 4종의 설계를 완료했고 휴대전화 통신 방식인 부호분할다중접속(CDMA) 관련 반도체 칩을 개발했다. 특히 디지털 멀티미디어 방송(DMB) 칩을 개발해 기술이전한 것은 비메모리 R&D가 산업 현장으로 적용된 좋은 사례다. 실제 이 기술을 적용한 한 업체는 당시 DMB 시장에서 80%의 점유율을 차지하기도 했다.

비메모리 반도체 R&D에서 최근 관심사는 차세대 지능형으로 모아진다. 반도체에 ‘지능’을 심는다는 개념이다. 4차 산업혁명이라는 용어가 부상할 무렵 ETRI 내에서도 새롭게 지능형반도체연구본부가 꾸려졌다. 2년 반 전 본부 단위로 출범해 현재 60여 명의 연구자들이 모여 있다. 특히 반도체 설계 전공 인력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 지능형 반도체 기술의 메카로서 세계적인 수준의 AI 반도체를 만든다는 미션을 수행 중이다.

지능형 반도체 개발은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이끌 핵심 기술로 평가된다. 메모리 반도체→시스템 반도체→지능형 반도체로의 패러다임 변화가 진행 중이며 AI를 기반으로 하는 새로운 서비스산업과 연계해 폭발적으로 수요가 증가할 것으로 전망된다. 지능형 반도체가 큰 개념이라면 그중 AI 반도체는 각종 AI 서비스가 가능하도록 만들어진 칩이다. 크기는 더 작게, 성능은 더 좋게, 전력 사용은 더 적게 개발하는 것이 목표다.

강 본부장은 “AI 기능이 빠르게 잘 수행되도록 기존의 중앙처리장치(CPU)가 아닌 일종의 인공지능 가속기를 달아주는 것”이라며 “지문이나 얼굴을 빠르게 인식한다거나 기존 영상 처리가 하루 걸린다면 2초 만에 끝나도록 처리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ETRI가 개발한 자율주행차용 고성능 프로세서 알데바란은 국제표준화기구(ISO)의 기능 안전 국제표준(ISO-26262)을 만족시킨다. 충돌 인식 등과 같은 위험 인식을 하면서 자율주행차에 장착될 수 있는 요건을 통과했다는 의미다. 최신 버전인 AB9은 당초 30테라플롭스급으로 개발될 예정이었는데 성능을 40테라플롭스급으로 끌어올렸다. 이에 따라 자율주행차뿐만 아니라 슈퍼컴퓨터에도 쓰일 수 있는 칩이 됐다는 게 ETRI 측의 설명이다. 이곳에서는 ‘서버급’ 칩으로 분류된다.

AI 반도체 중 시각 지능 칩을 만드는 것도 이곳 지능형반도체연구본부의 주요 과제다. 대표적 성과인 VIC(Visual Intelligence Chip)는 시각 지능 칩의 영문 표기의 앞 글자를 따 만든 AI 칩으로, 인공지능의 ‘눈’ 역할을 한다. 영상을 통해 신호가 받으면 일상생활에서 접하는 모든 범용 개체에 대해 학습을 통해 사람 수준으로 인식, 물체의 종류와 위치 등을 판별할 수 있다.

주로 스마트폰에 쓰일 목적으로 개발됐는데 모바일뿐만 아니라 자동차, 지능형 CCTV, 로봇, 드론 등에 적용될 수 있다. 그래서 ‘모바일급’이면서 ‘에지급’으로 분류된다. 이 밖에 각종 센서에 부착돼 AI 기능을 수행하는 ‘에지급’ 반도체 개발도 역점을 두는 부분이다.

서버급·모바일급·에지급 AI 반도체 기술 개발
6월 3일 방문한 ETRI 지능형반도체연구본부 사무실에는 각종 사물을 모아 만든 미니어처가 있었다. TV·오토바이·화분·개·자동차·의자 등으로 구성된 미니어처다. 이 미니어처를 영상으로 찍으면 화면에 각 물체의 사각형 테두리와 숫자가 표기된다. ‘TVmonitor(99.2%), motorbike(100.0%), pottedplant(56,2%), dog(99.6%), car(100.0%), chair(97.7%)’ 등으로 나타난다. 각각의 물체를 알아보고 정확도를 숫자로 표시해 준 것이다. “쉽게 말하면 자동차·로봇·CCTV가 공원이나 거리를 관찰하고 물체가 어디에 있는지 위치를 표시해 준다. 학습하기에 따라 다양한 차의 종류도 인식할 수 있고 지능형 CCTV에 쓰이면 위험인물을 판별해 알려준다”는 설명이다.

비슷한 기술을 개발한 곳으로는 인텔과 엔비디아 등이 있다. GPU에 AI칩을 적용하고 있는 엔비디아와 비교하면 저전력이라는 강점이 있다. ETRI가 2018년 개발한 모바일 비주얼 인텔리전스 칩은 소비 전력이 0.5W(500mW)로 세계 최저 수준이다. VIC를 설계한 한 연구원은 “방 크기의 데이터센터에서 컴퓨터 여러 개를 놓아두고 처리하던 일을 크기를 점차 줄여 5×5mm 칩 하나로 만들었고 1초에 33회 물체 인식이 가능하며 사람 수준으로 시각 지능을 한다”며 “인텔도 올해 말쯤 제품이 나오는 것과 비교하면 우리는 일단 칩을 만들어 상용화를 추진하는 단계로 세계 경쟁력에서 뒤지지 않는 셈”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국내 기업들이 외국산 설계 및 프로세서를 들여오지 않아도 비메모리 반도체 경쟁력을 보유할 수 있도록 원천 기술을 개발하는 게 ETRI의 역할이다. 또 반도체 설계 자산을 기술이전을 통해 확산시키는 것도 중요한 과업이다. ETRI는 국책 연구 기관으로 직접 상용화하지는 않고 주로 국내 중소기업들에 기술이전을 실시한다. 그런데 기술을 넘겨 받아야 할 국내 팹리스 업체들이 새로운 투자를 할 여력이 되지 않아 기술은 있어도 빠른 시장 확보로 잘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은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다.

지난 4월 30일 정부가 발표한 ‘시스템 반도체 비전과 전략’에 따르면 ‘기술’ 부문에서 AI 반도체 등 차세대 반도체 기술 개발에 향후 10년간 1조원 이상 투자가 이뤄질 예정이다. 산업통상자원부에서 5200억원, 과학기술정보통신부에서 4800억원 등 총 1조원을 투자해 원천 기술부터 응용 기술까지 경쟁력을 확보할 계획이다. 이를 위해 ‘차세대 지능형 반도체 기술 개발’의 예비타당성조사가 지난 4월 25일 통과됐다. 국가 R&D 사업을 진행하기 전에 사업 타당성을 평가하는 예타조사에서 최근 5년간 R&D 사업 중 1조원 규모를 넘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ETRI는 예타사업과 관련해 지능형 반도체와 차세대 반도체에 대한 현황과 미래 비전을 제시하는 역할도 해 왔다. 향후 반도체 산업의 패러다임을 바꿀 원천 기술 확보와 인력 양성, 인프라 구축이 필요한 ‘기술 기획’ 부문을 담당해 왔다. 정부 발표에 따르면 앞으로 AI·자동차·바이오 등 유망 분야에 대해 비메모리 반도체 기술 개발이 본격적으로 추진된다.

강 본부장은 “최근 중국의 반도체 산업이 주춤하면서 우리에게 큰 기회가 왔다”며 “중국의 팹리스가 3000여 개라면 우리는 100여 개 안팎으로 큰 차이가 나는데 이를 이겨 내기 위해서는 우선 팹리스의 수를 늘려야 하고 경량의 고성능 칩으로 승부수를 띄워 전 세계적인 수요처를 개발해야 한다”고 말했다.
'5X5mm' AI 칩 하나로 데이터센터 대체… 1초에 33회 물체인식
chari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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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228호(2019.06.10 ~ 2019.06.16)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