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 포커스]
-한국거래소, ‘시장 교란’ 메릴린치에 제재금 1억7500만원 부과
-금융감독원, 주범 시타델 조사 착수
개미 투자자 울리는 ‘초단타 매매’…한국은 규제 사각지대
[한경비즈니스=최은석 기자] 한국거래소가 코스닥시장에서 수십조원의 ‘초단타 매매(고빈도 매매)’로 시장을 교란한 혐의를 받아 온 메릴린치에 대한 제재안을 최근 확정하면서 주범으로 지목된 시타델증권에 대한 금융 당국의 조사 결과에도 관심이 쏠리고 있다.

고빈도 매매는 미리 정해 놓은 특정 조건이 충족되면 컴퓨터 매크로를 통해 빠른 속도로 주문을 수천 번 반복하는 거래 방식이다. 투자자는 시장 등락과 무관하게 수익을 얻을 수 있다.
한국 주식시장은 그동안 고빈도 매매의 ‘무풍지대’로 통했다. 시장에서는 이번 사태를 계기로 고빈도 매매 규제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개미 투자자 울리는 ‘초단타 매매’…한국은 규제 사각지대
◆메릴린치, 6000건 이상 허수성 주문 수탁

한국거래소 시장감시본부는 7월 16일 미국 초대형 헤지펀드 그룹 시타델의 위탁 증권사인 메릴린치의 제재안을 심의하는 네 번째 시장감시위원회를 열고 회원 제재금 1억7500만원을 부과하기로 의결했다.

메릴린치가 시타델증권의 허수성 주문 수탁을 금지하는 시장 감시 규정(제4조 제3항)을 위반했다는 게 거래소의 설명이다. 시장 감시 규정 4조(공정거래 질서 저해 행위 금지)에서는 ‘과도한 거래로 시세 등에 부당한 영향을 주거나 오해를 유발하게 할 우려가 있는 호가를 제출하거나 거래하는 행위’를 금지하고 있다.

거래소는 메릴린치가 시타델증권의 알고리즘 고빈도 거래를 통해 6000건 이상의 허수성 주문을 수탁한 것으로 결론지었다. 알고리즘 매매는 일정 가격이 되면 자동 주문을 내도록 컴퓨터 프로그램을 짜 매매하는 거래 방식이다.

시타델증권은 코스닥시장을 중심으로 80조원 규모의 거래를 일으키면서 투기 성향의 투자자를 유인해 2000억원 이상의 차익을 올렸다는 게 거래소의 설명이다. 이 과정에서 손실을 본 개인 투자자들이 청와대 국민청원을 통해 연이어 불공정 거래 의혹을 제기했다. 거래소는 지난해 말 감리 조사를 마치고 제재에 나선 지 8개월 만에 이 같은 결론을 내렸다.

거래소는 지난해 말 시타델증권의 2017년 10월~2018년 5월의 거래를 집중적으로 들여다봤다. 이 기간 메릴린치는 시타델증권으로부터 약 80조원의 거래를 수탁했다. 이 가운데 430개 종목에서 6220회(900만 주, 847억원)의 허수성 주문이 있었다는 게 거래소의 설명이다.
개미 투자자 울리는 ‘초단타 매매’…한국은 규제 사각지대
거래소 관계자는 “허수성 주문은 일반 매수세를 유인해 높은 가격에 자신의 보유 물량을 처분한 뒤 해당 매수 주문을 취소하는 전형적인 공정거래 질서 저해 행위”라고 설명했다.

시타델증권은 특정 종목의 최우선 매도 호가 잔량을 소진해 호가 공백을 조성하고 일반 매수세를 유인해 시세 차익을 얻은 뒤 기존 매수 주문을 취소하는 방식을 반복한 것으로 드러났다. 한 종목의 주가 1만원에 1만 주 매수 주문을 넣은 뒤 추격 매수세가 유입돼 가격이 1만200원 수준까지 오르면 보유 물량을 처분하고 빠르게 기존 매수 주문을 취소했다. 거래소는 1만원에 매수를 걸어 놓았다가 취소한 1만 주 주문을 허수성 주문으로 판단했다.

시타델은 인공지능(AI) 기술을 활용한 매매로 유명한 세계적인 퀀트 헤지펀드다. 계열사인 시타델증권도 메릴린치 직접 주문 전용선(DMA)을 통해 밀리세컨드(1000분의 1초) 이상의 속도로 주문할 수 있는 최첨단 슈퍼컴퓨터와 네트워크를 활용해 알고리즘 고빈도 매매로 수익을 냈다. 거래소는 시타델이 감리 기간 8개월 동안 80조원을 매매해 2200억원의 차익(거래세 제외 기준)을 거둔 것으로 추정했다.
개미 투자자 울리는 ‘초단타 매매’…한국은 규제 사각지대
메릴린치는 이번 사안이 한국 주식시장에서 처음 있는 알고리즘 불공정 거래 제재 사례인 데다 거래소의 허수성 주문 판단 기준이 모호하다고 반박했다. 이번 제재로 글로벌 투자은행(IB)으로서의 평판 리스크가 추락할 가능성이 있어 행정소송에 나설 것으로 전해졌다.

◆‘양날의 칼’ 초단타…대비책 필요성 대두

글로벌 증시에서 고빈도 매매 비율은 해마다 늘고 있다. 시장에 유동성을 공급하고 불합리한 가격 괴리를 막아주는 순기능 때문이다. 각국은 대체 거래소(ATS)를 통해 고빈도 매매를 적극 유도하기도 한다. 미국 등 거래세가 없는 선진 시장에서는 관련 거래 비율이 50% 이상이다.

하지만 고빈도 매매는 주가 변동성이 커지면서 개인 투자자에게 불이익을 주는 등의 부작용도 있다. 2010년 5월 6일 미국 다우지수가 특별한 악재도 없이 거래 종료를 15분 남기고 순식간에 998.5포인트(약 9%) 폭락한 사건이 대표적이다. 모두 알고리즘에 기반한 고빈도 매매가 원인으로 지목됐다.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는 관련 부작용을 막기 위해 같은 해 11월 고빈도 매매 규제 장치를 마련했다.

2016년 개정된 유럽증권시장청(ESMA)의 ‘금융 상품 투자 지침Ⅱ(MiFID Ⅱ)’는 고빈도 매매 전략을 쓰는 거래자에게 주문과 취소 내역을 보존할 의무를 부과했다. 일정한 유형의 거래를 제한할 수 있는 권한도 갖췄다. 일본은 고빈도 거래자들의 자율 규제 기구를 통해 관리하고 있다.

반면 한국에서는 고빈도 매매 규제 방안이 전혀 없어 개인 투자자들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

김준석 자본시장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한국 주식시장에서도 거래세가 낮아지고 ATS도 생길 예정인 만큼 외국인 투자자를 중심으로 고빈도 매매 비율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며 “2000년대부터 고빈도 매매가 활발히 이뤄지고 있는 미국·유럽·일본 주식시장의 사례를 토대로 관련 대비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이번 제재를 계기로 금융 당국의 시타델증권 조사에도 속도가 붙었다. 거래소는 제재가 이례적으로 지연되자 지난 6월 관련 사안을 금융 당국에 미리 통보했다. 금융위원회 자본시장조사단은 관련 조사를 금융감독원에 내려보냈다.

증권업계에 따르면 금감원 조사기획국은 최근 이번 사태의 주범으로 지목된 시타델증권에 대한 조사에 착수했다. 메릴린치를 통해 고빈도 매매를 주도한 시타델증권 홍콩지점에 대한 현장 조사 등을 거쳐 이르면 연말께 결론을 내릴 것으로 알려졌다.

choies@hankyung.com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235호(2019.07.29 ~ 2019.08.04)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