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청와대에선]-패스트트랙·‘조국 정국’에 탄력근로제·빅데이터3법 등 처리 난망…시행령 개정 등 검토

국회 법안 처리 어려움에 우회로 찾는 청와대
[김형호 한국경제 기자] “국회 사정상 법률 개정이 여의치 않으니 하위 법령을 통해 좋은 성과를 내고자 하오니 많은 도움 부탁드립니다.”

경제4단체장들은 10월 4일 한 통의 문자 메시지를 받았다. 청와대 김상조 정책실장이 발신인이었다.

“네 분 회장님들께서 공통적으로 지적하신 시급한 사안 중 하나가 시행령 시행규칙 등 행정부 조치로 할 수 있는 경제 활력 제고와 혁신 성장 과제들을 속도감 있게 추진하는 것입니다. 보완 작업을 거쳐 최대한 반영하겠습니다.”

문재인 대통령과 손경식 한국경영자총연맹 회장, 박용만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김영주 한국무역협회 회장, 김기문 중기중앙회장 등 4단체장과의 비공개 오찬 회동이 끝난 직후였다.

언론 보도로 외부에 알려졌지만 당초 이날 오찬은 경제 현안에 대한 경제 단체들의 의견을 듣기 위한 비공개 자리로 마련됐다. 4단체장만 초청한 것도 경제 현황과 산업 현장의 목소리를 상세히 듣기 위한 차원이었다는 게 청와대의 설명이다.

이날 김 실장이 보낸 메시지 내용 가운데 ‘법률 개정이 여의치 않으니’라는 대목이 특히 눈길을 끌었다. 꽉 막힌 현 국회 상황에 대한 청와대의 인식을 보여준다.

탄력근로제 등 산업 현장에서 주52시간 근무제의 보완책으로 요구하는 법안들의 국회 처리가 사실상 어렵다고 판단하는 게 아닌가 하는 관측이 나왔다. 이날 4단체장들이 청와대 오찬에서 “국회 입법만 바라볼 수 없으니 정부가 할 수 있는 자체 방안을 마련해 달라”고 당부한 것도 국회 상황이 녹록하지 않다는 판단에서다.

◆ 문 대통령 “만에 하나 입법 안 될 경우 대비해야”

문 대통령이 10월 8일 국무회에서 이와 관련해 ‘플랜B’를 준비하라고 지시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풀이된다.

문 대통령은 “노동시간 단축이 300인 이상 기업에선 비교적 성공적으로 안착한 것으로 보이지만 내년도 50인 이상 기업으로 확대 시행되는 것에 대해서는 경제계의 우려가 크다”며 “탄력근로제 등 보완 입법의 국회 통과가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도 “만에 하나 입법이 안 될 경우도 생각해 두지 않으면 안 된다”고 당부했다. 국회 입법 상황이 어려울 수 있다는 판단 아래 정부 부처에 대응책 마련을 직접 지시한 것이다. 탄력근로제뿐만 아니라 현 정부가 대표적 규제 혁신 법안으로 꼽는 ‘빅데이터 3법’ 역시 국회에 발목이 잡혀 있는 현실을 우회적으로 지적하기도 했다.

문 대통령은 “빅데이터 3법 등 핵심 법안의 입법이 지연되고 있는 상황이 안타깝지만 법률 통과 이전이라도 하위 법령의 우선 정비, 적극적 유권해석과 지침 개정 등을 통해 실질적 효과를 창출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해 줄 것을 특별히 당부한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이 언급한 탄력근로제나 빅데이터 3법은 여야 간 이견이 큰 법안은 아니지만 국회에 발목이 잡혀 장기간 표류하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탄력근로제는 주52시간 근무제를 보완하기 위해 산업계에서 강력하게 요청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에서 논의조차 진행되지 않고 있다.

탄력근로제는 현재 3개월이 시한인 탄력근로 단위 기간을 최소 6개월로 늘리는 게 핵심이다. 업무가 많을 때는 특정 근로일의 노동시간을 연장하는 대신 업무가 적을 때는 다른 근로일의 노동시간을 단축하는 유연근무제의 일종이다.

최대 6개월 기간 이내에서 평균 노동시간을 법정 노동시간(주당 최대 52시간=기본 40시간+연장근로 12시간)에 맞춰 자유롭게 조정하는 제도다.

계절적으로 일감이 몰리는 건설 업종을 비롯해 정보기술(IT) 분야 등 다양한 산업 현장에서 조속한 법 개정을 요구하고 있는 실정이다. 빅데이터 3법은 개인정보보호법,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 신용 정보의 이용 및 보호에 관한 법 개정안 등을 통칭한다. 일명 ‘빅데이터 3법’으로 불린다.

개인 정보 보호에 관한 법이 소관 부처별로 나뉘어 있기 때문에 생긴 불필요한 중복 규제를 없애 4차 산업혁명에 맞춰 개인과 기업의 정보 활용의 폭을 넓히는 게 핵심이다. 이 역시 여야 간 이견이 크지 않고 IT 등 관련 분야에선 시급하게 개정을 요구해 온 법안들이다. 2018년 11월 발의됐지만 1년 가까이 진척이 없다.

◆ “시행령 개정이 궁극적 해결책 될 수 없어”

청와대는 이번 정기국회에서 주요 법안의 국회 통과가 여의치 않다고 보고 있다. 일각에선 “법적으로 처리 기한이 정해진 내년도 예산안을 제외한 주요 법안들은 사실상 국회 처리가 어렵지 않겠느냐”는 회의적 전망까지 나오고 있다.

지난 4월 말 선거법 개정안 등의 패스트 트랙(신속 처리 안건) 지정 이후 파행을 빚고 있는 가운데 8월부터 조국 법무부 장관을 둘러싼 여야 간 대립이 격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내년 4월 총선을 앞두고 지지층 결집을 위한 여야의 ‘강대강’ 대결 고착화, 공천권 확보를 위한 여야 의원들의 선명성 경쟁까지 가세해 여야 모두 협상파들이 설 공간이 줄어들고 있는 상황이다.

전·현직 여야 원내대표 간 협상 결과에서도 달라진 정치 환경이 확연히 나타난다. 홍영표 더불어민주당 전 원내대표와 김성태 자유한국당 전 원내대표는 임기가 겹치는 지난해 하반기 6개월 동안 갈등 속에서도 총 10차례의 합의문을 이끌어 냈다.

당시 여야 원내대표들은 ‘드루킹 특검’, ‘인터넷전문은행법’등 첨예한 쟁점 현안들을 풀어냈다. 반면 지난 5월 들어선 이인영 민주당 원내대표와 나경원 한국당 원내대표는 지난 5개월 동안 쟁점 법안 처리를 위한 합의를 단 한 건도 도출해 내지 못했다.

최근 서울 서초동과 광화문에서 잇단 대규모 집회가 열린 이후 ‘여의도 정치’ 실종에 대한 질타가 쏟아지자 여야가 다시 협상 테이블에 앉는 시도를 하고 있지만 회의적인 시각이 지배적이다.

문희상 국회의장이 패스트 트랙으로 지정된 사법 개혁 법안이 10월 말 국회 본회의에 상정할 수 있다고 압박하고 있음에도 여야의 태도는 요지부동이다. 선거법 개정안 등의 패스트 트랙 지정과 이를 둘러싼 여야 간 고소 고발전까지 난마처럼 얽혀 있는 국면을 여야가 협상력을 발휘해 풀어내기 쉽지 않다는 지적이 나온다.

청와대도 여야 협상에 큰 기대를 걸지 않는 분위기다. 청와대 관계자는 “민생 법안·규제 혁신 법안과 정치적 쟁점 법안을 분리해 논의하면 풀어갈 수 있을 것 같은데 패스트 트랙 사태 이후 여야 간 정상적인 협의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토로했다.

문 대통령이 직접 법안 처리 이외의 적극적 대응책을 주문함에 따라 당분간 청와대와 관련 정부 부처의 ‘우회로 찾기’ 행보가 분주해질 것으로 보인다. 시행령 개정 등 정부 차원에서 해법을 모색하겠지만 궁극적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게 문제다.

일례로 탄력근로제 확대가 연말까지 도입되지 않으면 내년 50인 미만 사업장에 대한 주52시간 근무제 도입 이후 형사처분 기간을 유예하거나 계도 기간을 늘리는 미봉책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다.

11월 임기 반환점을 도는 문재인 정부로서는 입법 지원이 없는 공백 사태가 장기화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정기국회가 소득 없이 끝나면 내년 1분기도 여야 정당 내부의 공천 경쟁으로 정상적인 국회 운영이 어려울 가능성이 높다.

4월 국회의원 총선이 끝나더라도 21대 원 구성까지는 약 2개월의 추가 시간이 필요하다. 자칫 입법 공백 사태가 최장 8개월 정도 이어질 수 있다는 얘기다. 여권 일각에서 민생 법안과 규제 개혁 법안 처리를 위한 정치적 해법 모색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chsan@hankyung.com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246호(2019.10.14 ~ 2019.10.20)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