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코인 A to Z]-암호화폐 본질 가치 분석 위해 필수…민간 노력 이어지나 법 제도 뒷받침돼야
암호화폐의 미래를 위한 또 다른 과제 ‘공시’
(사진) 최초의 주식회사인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깃발.
[이케빈 해시드 심사역] 블록체인 기반 암호화폐의 가장 큰 특징이자 장점은 정부나 은행과 같은 중앙화한 주체의 보장 없이 구축할 수 있는 신뢰다.
이 신뢰를 기반으로 세워진 프로토콜 경제 안에서는 누구나 국경을 넘어 자유롭게 거래하고 위·변조가 불가능한 분산 원장에 거래 내역을 기록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참여자들은 스마트 콘트랙트와 같은 기능을 사용해 탈중앙화한 방식으로 지금까지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방법으로 교류하고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블록체인의 순기능이 가진 잠재력은 기술적 한계와 더딘 법제화로 아직 대중에게 큰 영향을 끼치지 못하고 있다. 이 때문에 2019년 현재 암호화폐는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막연한 투자 혹은 투기의 대상이거나 가치가 모호한 가상의 금융 상품으로 각인돼 있다.
실제로 대부분의 암호화폐는 사용처나 분명한 펀더멘털 없이 철저하게 시장의 수급에 의해 가격이 형성되고 거래된다. 이러한 화폐 혹은 증권형 상품들은 자연스럽게 투기 세력에 쉽게 노출되고 예측하기 힘든 변동성으로 시장의 불안정성을 증폭시킨다. 반복되는 악순환 속에서 개인 투자자들은 영문도 모른 채 막대한 손해를 보기도 한다. 이성적인 투자자들과 기관이 본격적인 투자를 꺼리는 이유다.
◆수백년간 발전해 온 주식회사 시스템
국내에서는 누구나 쉽게 암호화폐 시장에 참여할 수 있다. 업비트나 빗썸과 같은 거래소에 계좌를 만들고 신원 확인(KYC : Know Your Customer)을 거치면 바로 수십 종의 암호화폐를 거래할 수 있다. 마치 유가증권시장과 같은 주식시장과 흡사하지만 큰 차이점이 있다.
먼저 장이 24시간 멈추지 않고 돌아간다. 그리고 거래되는 상품의 본질적인 가치와 펀더멘털을 판단할 수 있게 하는 표준화된 공시 제도가 없다. 어느 국가든 외부 투자자를 상대로 주식을 공개하거나 투자신탁을 운용할 때는 해당 규제 당국의 공시 기준을 준수해야 한다.
최근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의 방침을 정리해 보면 미국은 비트코인과 같은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암호화폐를 증권으로 간주하고 증권법으로 규제하고 있다. 이미 수십 년 전 생겨난 미국 증권법은 주식과 채권 투자자를 보호한다는 사명 아래 공모 과정에서 철저한 등록 절차와 공모 후 정기적이고 경우에 따라 수시 공시를 의무화하고 있다. 현재 SEC는 다양한 성격의 암호화폐를 정의, 분류하고 있고 기존 규제의 틀을 유지한 채 상황에 대응하고 있다.
기존의 공시 제도에는 다양한 필수 요건들이 있지만 핵심은 단연 재무제표와 관련 지표들이다. 회사의 가치나 금융 상품을 평가할 때 재무 정보는 가장 중요하고 확실한 길잡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현재의 공시 시스템과 이에 근간이 되는 회계학은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진화하고 발전해 왔다.
통상적으로 인류 최초의 주식회사는 대항해시대이던 17~18세기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로 본다. 당시 인도와의 교역이 큰 규모로 성장하며 등장한 무역 상단은 개인이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의 자금이 필요했고 이를 많은 투자자에게 조달한 뒤 나중에 이윤을 배분하는 형식으로 운영됐다.
이 시기에 지금도 기초가 되는 회계 개념이 처음 정립됐고 이해 당사자들에게 공시됐다. 이는 수백 년을 거치며 더욱 복잡하고 정교한 기록 체계로 발전하며 가치를 평가하고 미래를 예측, 리스크를 관리할 수 있는 수준에 다다랐다.
2000년대 미국에서 연쇄적으로 터진 월드컴과 엔론의 역사적인 분식회계 사건은 현대 공시 제도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굴지의 통신사였던 월드컴은 현금흐름표를 조작해 회사의 수익을 높게 잡는 분식회계로 재무 정보를 조작했다. 그리고 얼마 후 당시 역대 최대 규모인 1000억 달러(약 117조4000억원) 수준의 파산에 이르렀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소액주주들과 회사의 주식을 노후 자금으로 보유하던 임직원들에게 돌아갔다.
천연가스 기업이던 엔론은 100조원 이상의 매출을 내는 거대 기업이었지만 위와 비슷한 방식으로 회계법인의 도움을 받아 지속적으로 매출을 조작했고 결국 파산하며 막대한 피해를 양산했다. 이를 계기로 미국을 비롯한 각국은 투명하고 정확한 재무 정보를 공개하기 위해 강력한 규제를 연달아 내놓으며 정보의 비대칭성과 경영진의 도덕적 해이를 원천적으로 차단하려고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암호화폐의 미래를 위한 또 다른 과제 ‘공시’
(사진) 암호화폐 공시플랫폼 '앰버데이터'의 대시보드
◆‘신뢰’가 무너지면 블록체인도 없어
재무회계는 늘 새로운 비즈니스와 서비스의 등장과 함께 끊임없이 진화하고 있고 전 세계 석학들은 머리를 맞대고 어떤 공식과 계산이 객관적인 정보를 제공하는지 연구하고 그 결과를 업계에 수혈한다. 이는 현재의 공시 시스템이 제공하는 다양한 정보가 투자 의사결정에 절대적인 역할을 할 수 있게 한다. 이렇듯 현재 자본주의는 수백 년을 걸쳐 다양한 실패를 경험했고 거기에서 얻은 교훈으로 발전하며 촘촘한 안전망을 구축할 수 있었다.
현재 블록체인과 암호화폐는 창의적인 혁신과 무궁무진한 잠재력으로 촉망받지만 동시에 그 누구도 보호받지 못하는 영역이다.
국내에서는 거래소와 연합해 각 암호화폐 발행 주체들이 감사를 받고 투자 결정에 필수적인 정보를 공개하도록 유도해 종합적인 공시 시스템을 만드는 크로스앵글(Cross Angle) 프로젝트가 선구자 역할을 하고 있다.
북미에서는 앰버데이터(Amberdata)나 메사리(Messari)와 같은 블록체인 데이터 표준화 및 지표 정보와 프로젝트별 소식을 엮어 제공하는 플랫폼이 등장하는 등 문제의식을 가진 민간 기업의 노력이 줄을 잇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들이 수포로 돌아가지 않게 하기 위해선 각국 규제 당국의 능동적인 대처와 확실한 가이드라인에 입각한 프로세스 구축이 필수적이다.
블록체인의 핵심 가치는 신뢰다. 블록체인에 투명하게 기록된 정보는 그 누구에게나 정확하고 완전한 상태로 주어지고 평등한 가치 창출 기회를 제공한다. 이는 기존의 주주 자본주의가 가진 불공평과 양극화 등의 취약점을 넘어 기존에 불가능했던 정의를 조금이나마 실현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한다. 하지만 제도의 부재로 오히려 비상식과 불공정한 환경이 지속되는 아이러니는 피해야 한다. 할 일이 많다.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248호(2019.10.28 ~ 2019.11.03)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