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정양호 한국산업기술평가관리원 원장…“산업 난제에 도전하는 ‘알키미스트 프로젝트’ 시동”
[한경비즈니스=이현주 기자] “연구·개발(R&D) 지원의 최종 목표를 ‘기술 경쟁력 강화’에 두지 않고 ‘기술 경쟁력 강화를 통한 국민 삶의 질 향상’에 두고 있습니다. 실질적으로 국민의 삶을 바꾸는 데 기여하는 도전적이고 혁신적인 R&D가 많이 이뤄져야 하는 이유입니다.”
“100m 7초에 뛰는 로봇 연구…퍼스트 무버형 R&D 키울 겁니다”
서울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지난 11월 18일 만난 정양호 한국산업기술평가관리원(이하 산기평) 원장은 산업 기술 R&D 지원의 체질 개선에 대해 수차례 강조했다. 산기평은 산업통상자원부 산하 연구 지원 기관으로 국가 기술 개발 과제를 기획·평가·관리한다.
정 원장은 한경비즈니스와의 인터뷰에서 “향후 5년, 10년의 미래 먹거리를 위해 제도적 기반 조성에서부터 국내외 협업의 장을 만드는 데까지 솔선수범할 계획”이라며 “기업 역량 강화와 일자리 창출을 이끄는 조력자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겠다”고 밝혔다.

원장 취임 이후 8개월 가까이 흘렀습니다. 한 해 동안 어떠셨는지요.
“크게 세 가지 방향성을 추구해 왔습니다. 먼저 경제 성장 단계에 따라 추격형 R&D에서 벗어나 퍼스트 무버(선도형)로서 도전적이고 혁신적인 R&D가 이뤄지도록 제도와 시스템을 바로잡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산기평의 역할을 산업 기술 분야의 ‘과제 관리자’의 역할을 넘어 ‘퍼실리테이터(facilitator)’로 재정의하고 기술 개발의 각 단계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해 주는 역할을 담당하려고 했습니다. 이와 함께 ‘협력 시스템 구축’에 힘을 쏟았습니다. R&D 지원을 통해 기업들의 역량을 강화하고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도록 관련 여러 기관과 힘을 모았죠. 취임 이후 8개월여간 20번의 업무협약(MOU)을 체결하고 180여 기관과 협력을 도모했습니다.”

산기평이 설립된 지 10년이 다가옵니다. 미래를 여는 새로운 미션은 무엇입니까.
“큰 틀에서는 ‘세계 최고 수준의 산업 기술을 선도하는 R&D 지원 글로벌 리더’가 되자는 비전을 가지고 있습니다. 향후 10년, 다시 한 번 대전환해야 하는 시점에서 새롭게 제시한 미션이 있다면 실질적인 변화를 이끄는 조력자가 되자는 것입니다. 올해 예산으로 보면 연간 1조5000억원이 R&D 지원에 투입되고 있습니다. 공정하게 선발하고 기술 개발 과제 관리를 잘하는 것이 기존의 주된 역할이었다면 그에 앞서 ‘왜 지원을 하는지’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기술 경쟁력 강화를 통해 종국적으로는 국민이 행복해지고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데 기여할 수 있어야 합니다. R&D를 통해 어떤 결과물을 창출하고 효과를 불러 일으켰는지 국민과 소통하고자 합니다.”

산업 기술 R&D에서 특히 주력해 온 과제는 무엇입니까.
“제조업으로 보면 경쟁력이 있는 분야와 미래 먹거리를 만드는 분야를 다 같이 지원하는 풀 세트형 지원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지향점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미래 핵심 산업군으로 5대 영역 25대 전략 분야를 선정했고 그중에서도 100대 핵심 기술을 집중 지원하고 있습니다. 미래 메가트렌드를 반영해 수립한 ‘산업 기술 R&D 투자 전략’입니다. 5대 분야는 ‘편리하고 안전한 미래 수송(자율주행차 등)’, ‘개인 맞춤형 스마트 건강 관리(디지털 헬스케어 등)’, ‘스마트하고 편리한 생활(스마트 홈 등)’, ‘쾌적하고 스마트한 에너지·환경’이 있습니다. 이와 함께 ‘수요자 맞춤형 스마트 제조’로 공장 자동화 분야에서 하부 전략들을 수립하고 있죠. 기업 규모로 보면 전체 예산의 약 73%가 중견·중소기업에 돌아갑니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특히 주목하는 키워드는 무엇입니까.
“혁신 성장의 핵심인 DNA(Data·Network·AI) 분야, BIG3(시스템반도체·바이오헬스·미래차)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DNA 기술은 주력 산업과 융합을 통해 기존 산업의 경쟁력을 획기적으로 향상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합니다. BIG3는 양질의 일자리 창출이 가능한 차세대 대형 신산업 분야로, 글로벌 주도권 확보를 위해 R&D 예산의 집중적 투자가 필요한 분야입니다.”

R&D 지원을 통해 특히 앞선 부분이 있나요. 대표적인 성과를 소개해 주세요.
“반도체·디스플레이·스마트폰·2차전지 등 부문은 우리가 세계 최고 수준입니다. 정부의 R&D 지원이 씨앗이 돼 기업들이 투자하고 노력을 기울인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디스플레이 부문은 기술력과 시장 점유율 모두 세계 1위이고 또 스마트폰 부품 중 약 40%를 중소·중견기업이 공급하고 있죠. 지금까지 양적 성장을 하는 동안 수익성 있는 부문을 키우다 보니 상대적으로 핵심 소재 부품과 같이 시장 규모가 작은 분야는 크게 주목하지 못했습니다. 최근 이 부문에 자원을 집중하고 있습니다.”

소재 부품 자립화에서 산기평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내년도 예산이 2조 원으로 책정돼 전년 대비 25% 늘었습니다. 예년에는 연간 3~4% 수준의 예산이 증액됐다면 다소 파격적으로 예산이 늘어났습니다. 한국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R&D 규모는 한국이 세계 최고입니다. 정부 전체 R&D 예산의 약 7.5%가 산기평의 몫이었다면 내년에는 그 비율이 높아질 겁니다. 소재 부품의 국산화 돌파구를 R&D에서 열어줘야 한다는 정부의 의지가 반영된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퍼스트 무버가 되기 위해 한 번은 넘어야 할 산이었는데 마침 일본의 무역 규제에 따라 대기업들도 국내 중소기업들에 문을 활짝 열어놓고 있는 상황입니다. 오랜 기간 원천 기술을 축적해 온 일본과 정부의 양적 지원에 힘입은 중국을 뛰어넘기 위해서는 관련 기관들이 통합해 힘을 모으는 것밖에 방법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R&D 이후의 사업화에 대해 여러 차례 강조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구상이 있습니까.
“세부 과제에 따라 다르지만 3000여 개의 지원 프로젝트 가운데 87%가 R&D 과제로서는 성공합니다. 하지만 실제 사업화까지 성공하는 비율은 45%에 그칩니다. 그 비율을 높이겠다는 겁니다. 비즈니스 모델을 고려하지 않은 산업 기술 R&D는 사업화 단계에서 ‘죽음의 계곡’을 맞닥뜨리고 기술이 사장되는 경우가 빈번합니다. 자금 확보나 판로 개척 등에 어려움이 더 많지만 현재 정부 지원은 R&D 단계에 집중돼 있어요. 이에 따라 R&D 시작 단계부터 경쟁을 통해 비즈니스 모델이 확실한 기술 개발 아이템을 발굴해 과제로 기획하고 R&D 역량이 우수한 기관을 선정할 예정입니다. 같은 과제로 다수의 경쟁자를 선정하고 일정 시점이 지난 후 더 경쟁력 있는 곳을 키우는 경쟁형 R&D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죠. R&D가 보통 3~5년 정도 기간을 두고 진행되기 때문에 한 번에 바꿀 수는 없지만 전반적인 체질 개선을 통해 기획 시점부터 사업화를 고려한 시장 지향형 R&D를 추구합니다. 또한 도전적이고 혁신적인 R&D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알키미스트 프로젝트’를 통해 실패에서 배우는 모델을 만들 예정입니다.”

‘알키미스트 프로젝트’에 대한 향후 계획이 궁금합니다.
“연금술사를 뜻하는 알키미스트 프로젝트는 산업적으로 파급 효과가 크면서 도전적인 기술 개발에 도전하는 것입니다. 실패하더라도 그 과정에서 얻는 성과에 의미를 두고 있습니다. 올해 시범 사업으로 6개 과제를 자체 선정했습니다. 예를 들어 ‘100m를 7초에 주파할 수 있는 로봇’, ‘공기 정화용 차량’과 같은 과제입니다. 경쟁형 R&D 수행, 공개 평가 진행, 멤버십 제도 도입 등 기존 R&D 사업과 차별화된 방식으로 추진 중입니다. 국내에서 최초로 시행된 이번 프로젝트는 그간 중소·중견기업 위주의 안정적인 추격형 R&D에서 벗어나 산업 난제에 도전하는 선도형 R&D를 촉진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됩니다. 이를 위해 ‘대국민 아이디어 공모전’을 진행 중입니다. 도전적이고 혁신적인 R&D를 위해 ‘인문학적 상상력’이 필요합니다. 연금술은 실패했지만 그 과정에서 근대화학의 기본 지식이 쌓인 것처럼 국민의 삶을 바꾸는 의미 있는 R&D를 통해 다양한 정보와 지식을 얻고 공유하고 확산하는 시스템을 만들고자 합니다. 비록 실패해도 가치가 있는,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R&D 환경을 조성해 나가는 게 목표입니다.”

내년 계획은 세우셨나요.
“산업부 R&D의 가장 큰 역할은 산업이 지속적인 경쟁력을 가질 수 있도록 협업 시스템과 플랫폼을 만들어 주는 데 있다고 봅니다. 초기 단계보다 뒷단에서 산업 구조를 건전하게 튼튼하게 만드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올 한 해 180여 기관과 MOU를 맺었는데 그중에는 지식재산권, 금융 지원, 성능 검사 등 기업들의 애로 사항을 실질적으로 해결해 줄 수 있는 기관들이 참여하고 있고 공공 영역에서 조달청도 함께합니다. 판로 개척의 문턱을 낮춘 것으로, 내수와 해외 시장 개척의 발판을 마련한 셈입니다. 올해 추진한 여러 협력 시스템 내실화에 힘쓸 것입니다. 이와 함께 국민의 삶의 질과 관련해 ‘따뜻한 R&D’를 통해 국민 경제에 기여하는 게 목표입니다.”
charis@hankyung.com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252호(2019.11.25 ~ 2019.12.01)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