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전과 변화가 공존할 때 살아있는 전략이 가능
최악의 상황에서 답을 찾는 것이 ‘현실 경영’
[박찬희 중앙대 경영학부 교수] 그럴듯한 미래 비전에 더해진 현란한 전략 기법들, 거기에서 도출된 치밀한 운영 계획 등 책상머리에서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세계 최고의 컨설팅 회사에 맡겨 브랜드를 빌리고 세계 유명 석학의 심사평까지 붙여 전략을 도출하는 작업은 돈만 들이면 언제든 가능하다.

하지만 현실의 경영은 동화책 속의 얘기가 아니다. 아무리 치밀하게 전략을 구성해도 예상대로 되는 일은 거의 없다. 억울하고 치사한 일들로 가득하다. 바로 눈앞의 과제들에 치여 허우적거리다 보면 애초 세웠던 비전과 계획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유능한 전쟁 지휘관은 피와 살이 튀는 아수라장에서 실시간으로 전략의 기본 방향을 살피고 구체적인 전쟁 방향과 작전 내용을 바꿔 나간다.

원래 정한 작전이라고 무작정 밀어붙이면 군대는 흩어져 버리거나 아예 반란을 일으킨다. 현실의 경영 전략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 상황이 어려워졌다고 쩔쩔매며 전략을 포기해 버리는 무능한 경영자, 무작정 원래 정한 일이라며 우겨대는 무지한 경영자는 회사를 망치고 나아가 나라를 멍들게 한다.

◆언제나 ‘실전’은 ‘연습’과 달라


체육관에 돈을 내고 배운 수준의 권투로는 실전에서 직접 주먹을 맞으며 단련된 프로 선수에게 절대 이길 수 없다. 아무리 운동 능력이 뛰어나고 체력이 좋아도 못 이긴다. 구기 종목도 다르지 않다. 제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도 사회인 야구 선수는 위협구라도 한 번 맞으면 금방 움츠러들기 마련이다. 반대로 인생을 걸고 뛰는 프로 선수는 위협구를 맞은 이후에도 죽기 살기로 자기 스윙을 한다.

맷집이 없는 화려한 기술은 아름다운 태권도 품새 시범에 불과하다. 품새는 동작을 숙달하는 연습으로 중요하지만 실전 싸움을 품새대로 할 수 없고 두들겨 맞아 다치고도 자기 실력을 발휘하려면 험난한 실전 속에서 참고 견디며 힘을 보존하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 뛰어난 복싱 기술과 스피드, 강한 펀치를 자랑하던 유망주가 맷집이 없어 허무하게 무너진 일들은 무수히 많다.

맷집의 뿌리는 불굴의 투지, 바로 정신력이다. 그래서 ‘근성(根性)’이라는 말도 쓴다. 물론 미련한 투지만으로는 절대 게임에서 이길 수 없다. 무지와 무능을 투지와 근성으로 포장하는 눈가림도 등장한다.

운동 능력과 체력이 안 되면서 들이대는 무모한 투지는 더러우면 피해 가는 동네 싸움에서는 통할지 몰라도 인생을 건 싸움에서는 결코 통하지 않는다. 1980년대 초반 현직 폭력 조직원임을 내세운 ‘전승 KO의 살인 펀치’로 유명한 권투 선수가 있었다. 경기마다 초반에 수비도 없이 얻어맞으며 투혼을 자랑했던 그는 같은 체급에서 키가 20cm 더 크고 마치 댄서처럼 움직이는 세계 챔피언에게 딱 한 대 맞고 KO돼 실려 나갔다.

기본 실력이 없는 삭발 투혼은 ‘할 만큼 했다’는 변명거리일 뿐이다. 제법 오래전에 국내 프로야구 팀들이 정신력 훈련을 한다며 전원 삭발하고 얼음물 깨고 들어가는 장면이 외국 TV에 웃음거리로 소개된 일이 있다.

당시 취재진은 기본적 경기력 훈련이 부족한 점을 같이 지적했다고 하는데 야구를 잘 모르는 ‘모기업’이나 구단 최고위 층에게는 이런 보여주는 투혼이 훨씬 더 호소력이 크다는 계산도 있었는지 모르겠다.

계획과 다르게 전개되는 상황, 도저히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던 위협들에 직면해 맥없이 넋을 잃어버리는 경영자는 맷집이 없는 권투 선수, 위협구에 주눅이 든 아마추어 야구 선수와 다를 바 없다.

조금 해보다 안 되면 정부 규제, 노동 정책을 들먹이며 세상 탓이 앞서는 경영자, 실적 나빠지면 앞뒤 생각 없이 투자를 포기하고 비용을 후려치면서 그럴듯한 홍보 기사로 눈가림부터 하려는 경영자는 삭발에 극기 훈련으로 투혼을 강조하면서 사실은 변명거리를 찾는 셈이다.

전략은 어려움 속에서도 꼭 해야 할 일과 방법을 제시할 때 의미가 있다. 한번 정한 전략이라며 무작정 우겨도 망하고 시도 때도 없이 호들갑 떨며 움츠리며 바꿔도 망한다. 비전은 아무리 어려워도 잊지 말고 추구해야 할 전략의 방향을 의미한다. 어디로 갈지 알아야 참고 기다리든 힘을 모으든 할 것 아닌가.

원거리 항해를 생각해 보자. 배는 ‘조류’와 바람에 맞춰 움직인다. 최신예 항공 모함도 마찬가지다. 유능한 선장은 조류와 바람에 따라 항로를 수정하고 배도 다르게 운영한다.

거센 바람으로 파도가 높아진다고 겁을 먹고 항해를 포기하는 맷집 없는 선장은 목적지까지 갈 수 없다. 미련하게 원래 항해 계획만 고집하는 선장은 태풍을 무시하고 키를 잡다가 배와 승무원들을 바다에 빠뜨리고 만다.

항해에 대한 확실한 비전은 어려움 속에서도 선장과 승무원들이 항해의 목적과 일정을 잊지 않고 최선을 다하도록 이끈다. 대항해 시대의 기록들은 선장과 승무원들의 인생을 건 도전과 이에 대한 보상, 함께 살아남으려는 공동체적 결속이 극한의 어려움과 공포 속에서도 구성원들의 숨은 능력을 이끌어 낸 사례들을 보여준다.

비전·리더십·동기부여는 그럴듯한 말로 회사 일을 몽롱하게 포장하는 암기용 지식이 아니라 험한 세상에서 수시로 부닥치는 어려움을 이겨내고 힘을 모으는 절실한 과제들이다.

현실의 경영자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최선의 가능한 답을 찾아내야 한다. 최악이라도 면해 보려는 ‘차악(次惡)’의 선택일 수도 있다. 전략 목표 자체를 바꿔야 할 수도 있다.

최선의 상황을 가정한 전략만 고집하면 허망하게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은 가혹하고 사람의 마음은 약하다.

◆유능한 선장은 수시로 항로를 바꾼다


전쟁사에는 극한의 어려움에 직면한 국가 지도부가 막연한 환상을 논하며 현실에 눈을 감아버리는 장면이 나온다. 절대적으로 몰린 상황에서 그나마 가능한 답을 찾기보다 될 대로 되라는 식의 무책임한 돌격이나 탈주로 흘러가 버린 경우도 있다.

전후의 권력 다툼과 책임 회피를 위한 정치 게임도 숨어 있겠지만 그런 정치 게임이 통하는 것은 사람들의 나약한 마음 때문이다.

군의 작전참모 과정에서는 다양한 상황에서 신속하게 전략을 수립하는 훈련을 부여한다. 특히 극도로 불리한, 치명적 손실이 불가피한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그나마 나은 답을 보다 이른 시간에 찾도록 요구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생각할 점들을 빠르게 검토해 대안을 만들고 그 실행 계획을 짜는 ‘생각의 습관’을 만들기 위해서다.

가혹한 상황에서 신속하고 과감한 결정을 하려면 전쟁의 목적과 가치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있어야 하고 제아무리 힘든 일도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눈치와 뒤통수가 판치는 또 다른 전장에서 벌어지는 위선적 음해와 트집 잡기를 생각에서 털어버릴 수 있다.

‘삼국지’에서 유비는 여러 번 전쟁에 지고 군대가 흩어져 버리지만 결국 고생 끝에 촉(蜀)에 자신의 정권을 세운다.

유비의 군대가 맥없이 깨져버린 것이 아니라 이길 수 없는 상황에서 흩어졌다 헤쳐 모이는 전략을 택했다는 설이 있는데 중국 작가 진순신은 조자룡이 유비의 아들을 품고 조조의 대군을 돌파했다는 장판파 전투를 사례로 들고 있다.

사실이라면 유비는 비록 전쟁 역량이 부족해도 최악의 상황에서 가능한 전략을 찾고 흩어진 사람을 불러 모으는 나름의 재능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

조조의 전쟁은 전략의 큰 틀을 잡고 수시로 변하는 전쟁 상황에서 임기응변의 작전으로 승리를 만들어 낸다. 요즘 말로 ‘애자일(agile) 경영’에 해당된다. 변화 속에서는 전략을 수정해 새로운 전쟁을 만들어 내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혼돈 속에서 답을 찾는 일도 어렵지만 여러 전투 단위들이 수정된 전략을 이해하고 상황에 맞게 실천하려면 우수한 장수들과 높은 수준의 훈련이 필요하다. 삶과 죽음이 종이 한 장 차이로 엇갈리는 전쟁터에서는 정말로 어려운 일이다.

비전과 변화가 공존해야 살아 있는 전략이 되듯이 맷집과 투지는 기회를 만드는 예민한 순발력과 함께 있을 때 진정한 힘이 된다.

체력 훈련이 기술 훈련과 더해질 때 진짜 실력이 되듯이 현실의 전략은 실전을 통해 검증되고 진화한다. 그럴듯한 말로 허영심만 달래는 경영 전략, 책상머리에서 권력을 휘두르려는 사내 정치용 경영 전략은 실전에서 그 속살이 드러나게 된다.

하지만 전략 수준의 경영은 ‘잘못하면 큰일’ 나기 때문에 실전 기회가 많지 않다. 요란하게 일을 벌이고 슬쩍 떠넘기고 도망가는 신공이 널리 퍼져 검증하기는 더욱 어렵다. 그래서 경영 전략을 다루는 동네에는 그럴듯한 단어들이 둥둥 떠다닌다.

◆책상머리 전략은 권세를 위한 도구일 뿐


기업의 인재를 기른다는 연수원은 ‘수강생 만족도’가 성과 지표이다 보니 웃음 치료, 건강 관리가 주된 프로그램이 되고 창업자 일가를 신격화한 설화들을 암기시키며 나름의 충성심을 입증하려고 애쓴다.

남다른 시각으로 최악의 상황에서 최선의 답을 찾는 절박한 훈련은 행여 불만이라도 나올까 부담스러울 뿐이다.

지금 이 시간에도 전국의 기업과 정부, 공공 기관에서는 ‘인적 자원 개발’을 내걸고 무수한 과정을 열고 있지만 진짜 사업 현안을 놓고 성역과 금기가 없는 솔직한 토론을 하는 곳은 단 한 군데도 없다. 노곤하기 이를 데 없는 돈 낭비 정신 교육일 뿐이다.

회사를 생체 실험 대상으로 삼는 얼치기 전략에 비하면 노곤한 정신 교육은 그나마 낫다. 책상머리에서 여기저기 귀동냥해 만든 전략이 신성불가침의 ‘어명’이 되면 힘없는 실무자들은 어명에 현실을 거꾸로 짜 맞춘다.

비전과 전략은 어차피 말로 꾸미기 나름이니 책임은 누구도 지지 않는다. 이런 회사에서는 경영 전략은 권세를 휘두르고 책임 떠넘기는 도구일 뿐이다.

디즈니가 1950년대에 직접 손으로 그려 만든 미래 전략은 영화 제작과 배급·음반·출판·방송·캐릭터 상품에 이르기까지 망라하는 2000년대의 사업들을 구체적으로 담고 있다. 그럴듯한 용어나 분석 기법은 하나도 찾을 수 없다. 그리고 디즈니는 지난 50년에 걸쳐 전략을 실제 사업으로 실현하며 지금도 콘텐츠업계의 강자로 군림 중이다.

현실에서 치열하게 검증되지 않은 책상머리 전략은 좋은 말 먼저 쓰면 이기는 정치 투쟁으로 변질된다. 그런 판에서는 현실의 압박 속에서 온 힘을 다해 실천하는 맷집과 투지는 아무 필요가 없다.

말로는 못할 일이 없고 지극히 옳은 말만 골라 하면 맞서는 즉시 나쁜 사람이 된다. 하지만 무책임한 말이 현실을 재단하는 나라는 반드시 망한다. 회사라고 다를 리 없다.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259호(2020.01.13 ~ 2020.01.19)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