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정치판에선]- 여야, 곳곳에서 ‘이에는 이’식 맞대응- 선거 바람몰이 노릴 수 있지만, 실패 땐 거센 ‘역풍’
또 횡행하는 ‘자객 공천’의 역설…양날의 칼 될 수도
[한경비즈니스 = 홍영식 대기자] 선거에서 ‘자객(刺客) 공천’이란 으스스한 단어가 처음 회자된 것은 2005년 9월 일본 중의원 선거 때다. 당시 자민당 소속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는 공공 개혁의 일환으로 우정 민영화를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었다. 우정 민영화에 대해 야당은 물론 자민당 내 일부 의원까지 반대하자 중의원을 해산하고 선거를 치렀다. 고이즈미 총리는 우정 민영화에 반발해 자민당을 탈당해 출마한 ‘반란 의원’ 지역구에 미모의 여성 또는 중량급 정치인을 공천했고 일본 언론들은 이를 ‘자객 공천’이라고 이름 붙였다. 대부분이 효과를 거둬 자민당은 압승했다.

그 뒤 한국 정치권에도 ‘자객 공천’이란 용어가 통용돼 왔다. 물론 우리 정치권에서도 그 이전부터 특정 후보를 떨어뜨리기 위한 ‘표적 공천’이나 ‘저격수 공천’이란 단어가 널리 쓰여 왔다. ‘자객 공천’과 표현만 다를 뿐 의미는 같다. 정당들이 대선 주자 등 다른 당의 거물을 꺾기 위해 또 다른 거물급 정치인 또는 인지도가 높은 젊고 참신한 이미지의 신인을 내세워 ‘자객·표적·저격수 공천’을 채택하는 것은 긍정적 효과 때문이다. 유권자들의 주목도를 높여 선거 흥행과 바람몰이를 일으키고 변화에 부응해 세대교체 요구를 충족한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다. 낙선시키고 싶은 상대가 거물 정치인으로 클 가능성을 차단하는 효과도 있다.

역대 총선에서 ‘자객·저격수 공천’ 사례는 많다. 공천된 후보가 당선돼 정치적 체급이 높아진 경우도 있다. 하지만 실패한 사례도 적지 않다. ‘자객·저격수 공천’ 사례들이 본격 등장한 것은 1996년 15대 총선 때다. 김대중 전 대통령 핵심 측근인 박지원 새정치국민회의 의원(당시 전국구)이 경기 부천소사에 출마하자 신한국당은 노동운동가 출신의 김문수 후보를 내세웠다. 결과는 김 후보의 당선. 16대 총선(2000년) 때는 새천년민주당이 한나라당 중진 이세기 의원(서울 성동)에 맞서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의장 출신 임종석 전 대통령 비서실장을 출마시켜 승리했다. 민주당은 또 이른바 ‘DJ(김대중) 저격수’로 불린 한나라당의 김문수·정형근·이규택·이신범·이사철 의원 지역구에 자객 공천했지만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배기선 후보가 경기 부천 원미을 지역구에서 이사철 후보를, 서울 강서을에서 한겨레 신문 기자 출신 김성호 후보가 이신범 후보를 저격하는 데만 성공했다.


◆광진을·구로을·동작을·강서을 등에서 표적 공천

2004년 17대 총선 땐 열린우리당은 부산 북·강서갑에 정형근 한나라당 후보에 맞서 이철 후보를 출전시켰으나 패배했다. 4년 뒤 18대 총선 땐 서울 동작을이 화제의 중심이 됐다. 정동영 의원이 동작을에 출마하자 한나라당은 울산에서 5선을 한 정몽준 의원을 끌어올려 출마시켰다. 정몽준 의원이 승리해 이곳에서만 재선에 성공했다. 18대 총선 때 서울 은평을도 주목받았다. 이명박 정부 실세로 불린 이재오 당시 한나라당 의원의 대항마로 문국현 창조한국당 대표가 출마하면서다. 문 대표가 승리했다. 하지만 2009년 공천 헌금 수수 혐의로 기소돼 당선 무효형 판결을 받아 의원직을 상실했고 이듬해 보궐선거에서 이 의원이 당선됐다.

2012년 19대 총선 땐 새누리당이 부산 사상에 당시 야권 유력 대선 주자인 문재인 후보에게 맞서 20대 손수조 후보를 ‘자객’으로 내세웠으나 실패했다. 민주통합당은 전재희 한나라당 후보가 내리 3선을 한 경기 광명을에 30대 변호사 이언주 후보를 전략 공천했다. 이 후보가 전 후보에 승리를 거머쥐면서 일약 스타가 됐다. 2014년 7·30 보궐선거에선 서울 동작을에 나경원 새누리당 후보가 출마하자 당시 야권은 단일 후보로 노회찬 정의당 후보를 저격수로 출전시켰으나 패배했다.

2016년 20대 총선 때 최고 관심 지역구는 서울 노원병이었다. 대선 주자인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의 지역구에 새누리당은 31세의 이준석 후보를 출마시켰다. 이 후보는 “불곰을 잡는 연어가 되겠다”고 다짐했지만 안 대표를 넘지 못했다. 더불어민주당은 광주 서을 지역구에 천정배 국민의당 공동 대표 대항마로 양향자 전 삼성전자 상무를 투입했지만 실패했다. 또 더불어민주당은 광주 광산을에 권은희 국민의당 의원의 저격수로 이용섭 전 의원을 내세웠지만 패배했다. 한나라당은 오세훈 전 서울시장을 정세균 현 국무총리 대항마로 서울 종로에, 안대희 전 대법관을 노웅래 더불어민주당 의원을 표적 삼아 서울 마포갑에 각각 전략 공천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이번 21대 ‘4·15 총선’에서도 ‘자객·표적·저격수 공천’이 어김없이 등장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은 미래통합당의 오세훈 전 서울시장이 출전한 서울 광진을에 고민정 전 청와대 대변인을 내세웠다. 광진을은 추미애 법무부 장관의 지역구다. 민주당은 추 장관이 5선을 한 이 지역구를 내줄 수 없다며 문재인 대통령의 입 역할을 한 고 전 대변인을 출마시켰다. 그런 만큼 여당의 야당 심판론과 미래통합당의 정권 심판론이 첨예하게 부딪치는 지역이다. 민주당 텃밭으로 여겨져 온 이곳에서 고 전 대변인이 패배한다면 정권 심판론이 먹혀들었다고 볼 수 있다. 반면 오 전 시장이 낙마하면 그의 대선 가도에 가시밭길을 예고하는 것이다.

박영선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의 지역구인 서울 구로을엔 민주당에서 문 대통령의 복심으로 꼽히는 윤건영 전 청와대 국정기획상황실장이 표밭을 갈고 있다. 이에 통합당은 서울 양천을에서만 내리 3선을 한 김용태 의원을 윤 전 실장의 ‘자객’으로 데려와 ‘표적 공천’했다.

민주당의 윤 전 실장 공천은 고 전 대변인과 마찬가지로 여권으로선 ‘양날의 칼’이 될 수 있다. 문 대통령 측근이라는 점에서 당선된다면 중진급 초선 의원으로 힘이 실릴 수 있지만 낙선 땐 정권 심판을 받은 것으로 평가될 수 있기 때문이다. 청와대 참모들의 성적표는 곧 현 정부 국정 운영에 대한 평가로 연결된다는 의미여서 문 대통령에겐 상당한 부담일 수밖에 없다. ‘자객 공천’의 역설이다.
또 횡행하는 ‘자객 공천’의 역설…양날의 칼 될 수도
◆여당 후보들 패배 땐 정권 심판론 먹혀들 수도

‘문재인 호위무사’로 불리는 민주당 소속 진성준 전 청와대 정무기획비서관에 맞서 통합당이 ‘청와대 민간인 사찰 의혹’을 제기한 김태우 전 청와대 특감반원을 자객 공천한 서울 강서을도 주목받는 선거구다. 통합당은 또 서울 송파갑에 ‘검사내전’ 저자인 김웅 전 부장검사를 전략 공천했다. 김 전 부장검사는 검찰 개혁과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설치에 대해 날선 비판을 해오고 있다.

경기 남양주병도 ‘이에는 이’ 식의 대결이 펼쳐지고 있다. 민주당은 주광덕 통합당 의원에 대항해 김용민 변호사를 저격수로 내세웠다. 검사 출신의 주 의원은 문재인 정부의 검찰 개혁에 대해 통합당의 공격수 역할을 해 왔다. 반면 김 변호사는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시절 법무·검찰 개혁위원으로 활동하면서 검찰 개혁을 옹호해 왔다. 나경원 통합당 의원 지역구인 서울 동작을에 민주당이 누구를 자객으로 투입할지도 주목 받았다. 민주당은 이수진 전 판사를 공천했다. 판사 대 판사 대결이 펼쳐지게 됐다. 통합당이 김현미 국토교통부장관 지역구인 경기 고양정에 부동산 정책 전문가인 김현아 의원을 투입한 것은 정부의 부동산 정책 실패를 부각하기 위한 전략이 담겨 있다.

‘자객·표적·저격수 공천’에 대한 비판도 제기된다. 죽기 아니면 살기 식의 극단적인 대결은 증오의 정치 문화를 키울 수 있다. 지역 민심을 무시하고 ‘명성’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 지역과 아무런 상관없는 후보를 ‘낙하산’으로 데려오는 것은 정치 발전과도 거리가 멀다. yshong@hankyung.com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266호(2020.02.29 ~ 2020.03.06)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