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 리포트Ⅰ] -5년 새 77.5% 성장, 고령화 시대에 맞는 자산 관리 솔루션…정부도 시장 육성 나서
‘1000조 시대’ 맞는 신탁 산업 대해부
[한경비즈니스=이정흔 기자]국내 신탁 산업이 전환점을 맞고 있다. 신탁은 저금리·고령화 시대에 필수적인 종합 자산 관리 서비스로 기대를 모으며 최근 몇 년간 급격히 성장했다. 이 와중에 ‘해외 금리 연계 파생결합펀드(DLF) 사태’의 여파로 성장세에 제동이 걸리는 듯 보였다. 하지만 오히려 이 같은 위기가 국내 신탁 시장에 다양성을 불어넣는 기회가 될 것이란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지금까지 신탁 시장의 가파른 성장세를 이끌어 온 게 특정금전신탁이었다면 향후에는 부동산을 비롯한 재산신탁에 조금 더 힘이 실릴 것으로 전망된다. 금융 당국 또한 신탁 시장을 활성화하기 위해 3년 만에 다시 제도 개편에 나섰다. 국민의 노후 대비, 생활 안정을 위한 종합 자산 관리 제도로 육성한다는 방침이다.

지금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의 고령화가 진행 중이다. 지난해 통계청의 ‘세계와 한국의 인구 현황 및 전망’에 따르면 2045년 한국의 65세 이상 고령 인구 비율은 37%로 일본을 넘어서게 된다. 2018년만 해도 일본보다 고령 인구 비율이 낮았던 것을 감안하면 불과 30년도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일본을 역전할 만큼 고령화 속도가 빠른 셈이다. 문제는 기대 수명의 상승과 함께 노년 부양비 또한 크게 증가할 것으로 전망된다는 점이다. 실제 한국의 노년 부양비는 주요 국가들과 비교해도 그 증가세가 매우 가파르다. 한국의 노년 부양비(생산연령인구 100명당 고령 인구 비율)는 2020년 22명에서 2065년 88.1명까지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처럼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급속한 속도로 고령화 사회(65세 이상 고령 인구가 총인구의 7% 이상인 사회)에 진입하게 되면서 재산 승계 등 ‘부의 이전 수단’이자 노후 대비를 위한 ‘종합 자산 관리 수단’으로 더욱 주목 받고 있는 금융 서비스가 ‘신탁’이다.
‘1000조 시대’ 맞는 신탁 산업 대해부


◆용어도 낯선 ‘신탁’, 도대체 뭐기에

신탁은 쉽게 말해 ‘믿고 맡긴다’는 의미다. 금전·유가증권·부동산 등 본인이 소유하고 있는 재산을 신뢰할 수 있는 대상에 그 관리와 처분을 의뢰하는 것을 말한다. 이때 맡기를 사람을 ‘위탁자’라고 하고 이 신탁을 맡아 운용·관리·보관하는 재산 관리 기구를 ‘수탁자’라고 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재산이나 수익을 지급받는 이를 ‘수익자’라고 한다. 수익자는 위탁자가 지정하는데 위탁자 본인이 될 수도 있고 또는 제삼자가 될 수도 있다. 다시 말해 위탁자·수익자·수탁자가 서로의 ‘믿음’을 바탕으로 재산 관리 또는 재산 증식을 목적으로 가입하는 금융 상품이 바로 신탁이다. 이를 위해 중요한 것은 ‘믿고 맡길 수 있는 기관(수탁자)’인데 현재 국내에서는 이 역할을 은행·증권·부동산신탁회사와 같은 금융회사들이 맡고 있다.


신탁 상품은 크게 금전 자산을 관리하는 ‘금전신탁’과 부동산 등의 자산을 관리하는 ‘재산신탁’, 이 둘을 모두 포함하는 ‘종합재산신탁’으로 나눠볼 수 있다. 그중에서도 ‘금전신탁’은 위탁자가 투자 대상을 정하고 수탁자에게 돈을 맡기는 방식인 ‘특정금전신탁’과 수탁자가 자유롭게 위탁자의 자금을 운용하는 ‘불특정금전신탁’으로 나뉜다. 수시입출금식형신탁(MMT)·주가연계형신탁(ELT)·파생결합형신탁(DLT) 등이 대표적인 특정금전신탁이다. 불특정금전신탁은 펀드와의 유사성 때문에 2004년 이후 발급이 금지되고 2009년 해제된 뒤에도 연금저축신탁 외엔 활용되지 않고 있다.


고령화 시대 자산 관리 솔루션으로 신탁이 유독 각광받는 데는 이유가 있다. 신탁은 말하자면 고령화 시대 ‘최소한의 안전핀’이자 가족들 간의 ‘분쟁을 최소화’해 주는 데도 큰 효과를 발휘한다. 배정식 하나은행 리빙트러스트센터장은 “가장 쉽게 비교한다면 유언장은 본인의 사망 직후 수익자에게 소유권이 넘어가게 되는데 이와 비교해 신탁은 자신의 노후 동안에도 자산을 관리하면서 이후 수익자에게도 ‘연속성 있는 재산 관리’가 가능하다”는 것을 강점으로 꼽았다. 특히 수익자가 스스로 재산을 통제할 수 없는 미성년자라면 신탁이 재산을 지켜주는 안전핀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가족들 간의 분쟁을 최소화한다는 점도 중요한 사회적 기능으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국내에서도 가족을 구성하는 형태와 관계가 복잡해지면서 재산을 소유한 자가 유언장 없이 세상을 등지게 되면 남은 가족들 간의 분쟁이 일어나는 경우가 점점 더 늘고 있다. 부모가 갑작스레 치매에 걸렸을 때 부모의 자산을 두고 자식들이 재산 싸움을 벌이는 것도 대표적인 케이스다. 배 센터장은 “신탁은 공신력 있는 제삼자(은행)가 상속을 집행하기 때문에 갈등 구조를 미연에 방지하는 효과가 있다”고 설명했다.


◆가족 간의 분쟁 최소화하는 것도 매력

고령화 추세에 저금리 기조와 맞물리며 최근 몇 년간 국내의 신탁 시장은 눈부신 성장세를 보여 왔다. 금융감독원이 3월 3일 발표한 ‘2019년 신탁 관련 통계‘ 자료에 따르면 2019년 말 기준 금융회사에 맡겨진 신탁 재산은 총 968조6000억원 규모다. 이는 2018년 말(873조5000억원)보다 10.9% 증가한 것으로 2014년 말 약 545조원 규모였던 것을 감안하면 5년 새 77.5% 정도 성장했다. 금융 권역별로 살펴보면 이 중 은행이 480조4000억원으로 전체의 절반에 가까운 49.6%를 차지한다. 증권사와 부동산신탁사가 각각 237조2000억원(24.5%), 230조6000억원(23.8%)으로 뒤를 잇고 있고 보험사는 20조4000억원(2.1%)으로 나타났다.
‘1000조 시대’ 맞는 신탁 산업 대해부
신탁 재산별 수탁액 현황을 살펴보면 금전신탁(483조9000억원)과 재산신탁(484조5000억원)이 비슷한 비율을 나타냈다. 눈에 띄는 점은 2018년 금전신탁 437조3000억원, 재산신탁 436조1000억원으로 금전신탁의 비율이 높았지만 2019년 들어 재산신탁이 금전신탁의 비율을 앞질렀다는 것이다. 이는 최근 큰 파장을 일으키고 있는 ‘DLF 사태’와도 연관이 깊다. 국내 신탁 시장의 성장을 이끌어 온 은행들을 중심으로 신탁 사업에 대한 패러다임이 전환되고 있는 것이다.


국내에서 신탁 시장이 짧은 기간 동안 급성장할 수 있었던 데는 국내 은행들의 ‘비이자 이익 확대’ 등의 성장 전략에 힘입은 바가 컸다. 저금리 기조가 장기화되는 상황에서 새로운 먹거리로 ‘신탁 시장’을 점찍은 은행들은 최근 몇 년간 공격적으로 신탁 사업을 확장해 왔다.
그중에서도 주가연계신탁(ELT)·DLT와 같은 ‘특정금전신탁’이 신탁 부문의 성장을 이끌어 온 주역이었다. 절세 효과가 커 저금리 시대의 대안 상품으로 각광받고 있었던 데다 수수료 상한이 정해져 있는 펀드 등과 달리 신탁은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수수료를 산정할 수 있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실제 최근 몇 년간 ELT와 DLT를 비롯한 신탁 상품은 국내 은행들의 수수료 수익을 끌어올리는 데 효자 역할을 톡톡히 해왔다. 2016년 약 4500억원 규모였던 국내 4대 은행(KB국민·신한·하나·우리)들의 신탁 수수료 수익은 2017년 약 8000억원, 2018년 약 8600억원, 2019년 약 9500억원 규모로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지난해 불거진 DLF 사태로 승승장구하던 신탁 사업 부문의 성장세에 제동이 걸린 것이다. ELT와 DLT는 말하자면 주가연계증권(ELS)이나 DLF와 같은 상품을 은행이 특정금전신탁 계좌에 편입해 판매하는 신탁 상품이다. 은행들이 신탁이라는 포장지를 빌려 고위험 상품들을 손쉽게 판매해 온 것 아니냐는 비판이 제기되는 대목이다. 이에 따라 금융위원회는 지난해 12월 12일 DLF 사고 재발 방지를 위한 ‘고위험 금융 상품 투자자 보호 강화를 위한 개선 방안’을 내놓았다. 당초 고난도 사모펀드뿐만 아니라 신탁 상품도 은행에서 판매를 금지하겠다는 방침이었지만 논란 끝에 일부 신탁 상품 판매를 허용하는 최종안을 확정했다.


은행들은 새로운 수익원인 신탁 시장을 지킬 수 있게 됐다는 점에서 한숨 돌린 셈이지만 금융 소비자 보호를 위한 규제 강화가 불가피한 만큼 고심이 커질 수밖에 없다. 당장 금융위원회는 3월부터 은행권의 ELT 판매 총량을 지난해 11월 말 잔액인 34조원으로 제한하고 한 달 단위로 판매량을 점검할 방침이다. 은행들은 각 사의 지난해 11월 말 잔액 한도 내에서 ELT를 팔 수 있다. 국내 은행권의 ELT·DLT 판매 잔액은 2017년 말 26조6000억원에서 지난해 말 40조7000억원 규모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시선이 쏠리는 곳은 ‘재산신탁’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부동산신탁이 재산신탁 시장의 성장을 이끄는 중심축이 될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금융위원회가 2009년 이후 10년 만에 부동산 신탁회사 3곳(대신자산신탁·신영부동산신탁·한국투자부동산신탁)에 신규 인가를 내주며 시장의 파이가 커질 것으로 전망된다. 지난해 국내 부동산 신탁회사 11곳 모두 200억원 이상의 흑자를 기록한 것 또한 기대감을 부풀리는 요인이다. 2019년 기준 부동산신탁 수탁액은 285조8000억원으로 전년 대비(251조2000억원) 13.8%나 증가하며 다른 신탁재산에 비해 두드러진 성장세를 보였다.


◆신탁제도 개편…뭐가 달라지나


은행들에도 신탁은 ‘포기할 수 없는 시장’이다. 고령화 시대를 맞아 상속과 증여 등과 관련한 신탁 상품에 대한 수요가 지속적으로 늘어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금융 당국 또한 신탁을 국민의 노후 대비를 위한 종합 자산 관리 제도로 육성하기 위한 본격적인 제도 개선에 나서고 있다는 점도 중요한 배경 중 하나다.


금융위원회는 지난 2월 19일 신탁 제도 전면 개선 등의 내용을 담은 2020년 상세 업무 계획을 공개했다. 금융위 관계자는 “신탁 제도는 다양하게 활용될 수 있는 자산 관리 수단임에도 불구하고 특정 금융 상품을 판매하는 수단으로만 활용돼 왔다”며 “국민의 노후 대비와 생활 안정을 위해 신탁 제도가 ‘종합 자산 관리 제도’로서 제대로 기능할 수 있도록 유도하겠다는 취지”라고 말했다.
‘1000조 시대’ 맞는 신탁 산업 대해부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수탁 가능한 재산 범위의 확대다. 현재는 금전·부동산 등 ‘적극 재산’만 수탁이 가능했지만 앞으로는 부채 성격의 자산인 ‘소극 재산’과 담보권 등도 수탁이 가능해진다. 부채를 포함한 예금·대출·부동산 등 재산 일체에 대해 한층 효과적인 자산 관리가 가능해질 것으로 보인다.


진입 규제를 정비해 신탁업을 할 수 있는 업종도 확대된다. 현재 국내에서는 은행·증권·보험·부동산업만 신탁을 영위할 수 있다. 금융위는 특정 부문별로 금융회사 인가를 내주는 ‘스몰 라이선스’를 활용해 전문 신탁업을 별도로 신설한다는 계획이다. 이를 통해 유언신탁·지식재산권신탁 등 특화 신탁사의 시장 진입을 촉진하기 위한 것이다.


이번 개편 안에는 자기신탁·재신탁 등 신탁법으로 허용된 운용 방식을 신탁 목적 달성을 위해 필요한 범위 내에서 허용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이 중 가장 관심을 끄는 것은 ‘재신탁’이다. 재신탁은 재산을 신탁받은 수탁자가 각 분야별 전문가들에게 이를 다시 신탁하는 것을 말한다. 구체적인 신탁 제도 개선안은 올해 하반기 발표될 예정이다.

신탁 제도 개선에 대한 논의가 이뤄진 것은 사실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정부도 오랫동안 신탁을 국민 노후 대비를 위한 ‘종합 자산 관리 서비스’로 육성한다는 목표 아래 수차례 신탁 제도 전면 개편안을 꺼내 들었지만 번번이 불발됐다. 국내 신탁법·신탁업법의 역사는 광복 이후인 196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2008년 금융 위기를 겪으며 신탁 자산의 규모가 반 토막이 날 만큼 사업이 위축됐다. 2009년 자본시장법이 시행되면서 신탁업자에 대한 규율을 담은 ‘신탁업법’이 없어지고 통합 자본시장법에 흡수됐다. 위탁자·수탁자·수익자의 관계·권리 등을 규정한 신탁법은 2011년 제정 50년 만에 처음으로 전면 개정안이 통과됐다. 하지만 ‘신탁업자’를 별도로 규율하고 있는 자본시장법에 이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면서 충돌이 계속돼 왔다. 정부는 2012년 개정된 신탁법을 반영한 자본시장 법안을 국회에 제출했지만 임기 만료로 폐기됐다. 정부는 2017년에도 신탁업법 분리를 추진했지만 무산됐다.
‘1000조 시대’ 맞는 신탁 산업 대해부
현재 신탁법은 신탁 재산에 대한 제한이 없는 반면 자본시장법은 열거주의를 택하고 있다. 자본시장법에 따르면 신탁은 펀드 등 다른 투자 상품들과 비교해 관련 영업 행위 규제가 다양하고 복잡하다. 다수의 고객을 상대로 광고·홍보를 할 수 없고 상품에 가입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금융사를 직접 찾아가도록 하고 있다. 다른 상품과 합쳐 규모의 경제를 이루는 ‘합동 운용’도 금지돼 있다. 그러다 보니 다양한 신탁 상품이 나오기 힘든 구조가 됐고 신탁 제도 자체가 유명무실해지고 있다는 비판이다.


고동원 성균관대 교수는 “유언대용신탁·치매신탁 등 고령화 시대에 신탁은 정말 필요한 종합 자산 관리 제도”라며 “이번 제도 개편을 통해 국내 신탁 시장에 다양한 신탁 업자들이 진입한다면 신탁 시장이 더욱 활성화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vivajh@hankyung.com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268호(2020.03.16 ~ 2020.03.22)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