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한국의 AI 프런티어들에게 듣는다]- 박상규 ETRI 부원장
“AI는 ‘플랫폼 경쟁’… 승자 독식 시장에서 이겨야 한다”
[한경비즈니스=이현주 기자] 인공지능(AI)의 역사에는 두 번의 ‘겨울’이 있었다. 1980년대 AI의 1차 산업화 시도 이후 의사들의 질병 진단 지식을 규칙 형태로 프로그래밍해 컴퓨터에 넣고 이를 이용해 병을 진단하는 전문가 시스템이 있었다. 곧 한계가 드러나면서 고전적 AI 기술은 겨울을 맞이하게 된다.

‘알파고 열풍’이 불기 전까지 AI 연구를 한다는 것은 모험에 가까운 선택이었다. 많은 연구자들이 AI에 열광하다가 ‘곁길’로 빠졌다. 다양성 연구에 강한 미국을 제외하고 전 세계적으로 AI의 저변이 넓지 않은 것은 이 때문이다. 최근 몇 년 사이 정부 지원을 등에 업은 중국이 제2의 AI 강국으로 떠오르는 가운데 일본과 한국이 후발 주자로 그 뒤를 추격하고 있다.

‘한국판 왓슨’ 만들다
AI의 겨울 시절에도 국내에서 활발히 AI 연구에 천착해 온 곳이 있다.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이다. 박상규 ETRI 부원장은 1998년 기계 번역 과제를 시작한 이후 연구원에서 AI 연구에 몰두해 왔다. 그는 음성·언어 처리와 빅데이터 기술 분야에서 국내 최고 수준의 연구자로 평가받고 있다.

박 부원장은 “알파고 이전에도 2011년 IBM의 ‘왓슨’이 퀴즈쇼에서 인간 챔피언을 물리치고 우승을 차지했고 그 무렵 애플에서 ‘시리’를 출시하는 등 시장에 변화가 감지되기 시작했다”며 “우리도 AI 연구를 확대해야 한다면서 ‘지니톡’과 ‘엑소브레인’ 과제를 시작했고 알파고 이후 AI이 붐이 불면서 투자가 더욱 확대됐다”고 말했다.

박 부원장은 특히 ‘한국판 왓슨’으로 불리는 엑소브레인 프로젝트를 총괄하며 이 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끈 바 있다. 엑소브레인은 ‘내 몸 밖에 있는 인공두뇌’라는 뜻이다. 엑소브레인 프로젝트는 기계와 인간 사이 지식 소통을 가능하게 하고 의사·변호사 등 전문가 수준의 의사결정을 지원하는 인공두뇌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연구다.

엑소브레인을 개발하던 당시 자연어 질의응답 기술 개발을 위한 글로벌 경쟁이 시작되고 있었다. 박 부원장은 자연어 질의응답 기술 개발이 AI 분야의 난제이지만 성공시킨다면 수익성이 높은 미개척 분야라고 내다봤다.

“2013년부터 개발을 시작했습니다. 왓슨을 가져와 연구한 게 아니라 처음부터 순수 우리 기술로 쌓아 올렸죠. 국산 AI 자주권 확보 가능성을 입증했다는 의미가 컸습니다.”

엑소브레인의 핵심이 되는 AI는 텍스트의 문법과 의미를 분석할 수 있는 한국어 분석 기술, 방대한 텍스트에 기술된 지식을 학습하고 저장하는 지식 학습과 축적 기술, 문장으로 구성된 질문을 이해하고 정답을 추론하는 자연어 질의응답 기술 등이다.

2016년 11월 EBS ‘장학퀴즈’에 엑소브레인이 참가해 ‘장학퀴즈’ 상·하반기 우승자와 수능 만점자를 제치고 우승하면서 이름을 알렸다. 2017년에는 엑소브레인 과제에서 개발한 한국어 분석 기술 14종을 오픈 API로 보급하기도 했다.

ETRI는 최근 엑소브레인 사업에서 개발한 언어 AI 기술을 상용화하는 데 성공했다. 이에 따라 AI 비서, 자연어 질의응답, 지능형 검색, 빅데이터 분석 등 한국어를 활용한 AI 서비스 개발에 탄력이 붙게 됐다. 엑소브레인은 자연어로 기술된 키워드와 질문을 입력받아 정확한 정답을 찾아주는 자연어 심층 질의응답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이와 함께 휴대용 자동 통역기 ‘지니톡’이 대표적인 AI 성과로 꼽힌다. 지니톡은 한국어·영어·일본어·중국어 등 통역 서비스가 가능하다. 문서 번역에서 음성 인식을 더한 기술로, 2005년 특허 문서 번역기 개발에 성공한 경험을 이식해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박 부원장은 구글·마이크로소프트·아이플라이텍 등 글로벌 기업들이 자동 통·번역 기술 경쟁에 뛰어드는 것을 보면서 지니톡 개발에 착수했다고 설명했다.

박 부원장은 “연속된 자유 발화에 대해 의사소통 단위로 실시간 통역이 가능하고 쓰면 쓸수록 성능이 개선되는 지식 증강형 실시간 동시통역 원천 기술 개발에 힘썼다”고 말했다.

이 밖에 ETRI는 국내 개발자들이 손쉽게 딥러닝 연구를 진행할 AI 컴퓨팅 환경을 제공하기 위해 ‘딥러닝 대시보드’를 개발했다. 그래픽 기반의 개발 환경을 제공해 개발자들이 코드를 하나하나 입력할 필요가 없다. AI 개발에 주로 쓰이는 도구들도 지원해 대시보드에서 개발한 그래픽 모델을 학습할 수 있다.

휴대용 자동 통역기 ‘지니톡’, 음성 대화 처리 시스템 ‘지니 튜터’도 성공
음성 대화 처리 시스템 ‘지니 튜터’도 AI 연구의 결과물이다. 인간의 말을 문자로 자동 변환하는 기술이다. 동일한 화자라고 하더라도 음의 높낮이, 발성 속도, 주변 잡음의 영향 등으로 다양한 변이가 일어나기 마련이다. 또 동일한 단어라고 하더라도 화자에 따라 음색·발음·강세 등의 차이가 난다. 문맥에 따라 발성이 달라지는 음운 변화도 음성 인식의 어려운 점으로 꼽힌다. ETRI는 자유 발화형 음성 대화 처리 기술을 통해 비정형 자연어 음성 인식과 자유 대화 처리에 도전했다.

박 부원장이 생각하는 AI의 힘은 ‘플랫폼’에서 나온다. AI는 플랫폼을 통한 서비스 형태로 활용될 것이라는 설명이다. 박 부원장은 “AI 개발 경쟁은 곧 플랫폼 경쟁”이라며 “글로벌 IT 기업들은 서비스 플랫폼에서 모은 빅데이터로 AI를 빠르게 고도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박 부원장은 또한 AI를 비롯한 소트프웨어 산업의 특징을 ‘승자 독식’이라고 내다봤다. 박 부원장은 “이 시장에서는 한 번 승자가 되면 후발 주자가 따라가기 어렵다”며 “사용자 데이터를 차지하는 기업이 시장을 차지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한 “전 세계가 AI의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해 경쟁을 본격화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도 지금부터라도 팔을 걷어붙여야 한다”고 말했다.

AI 기술은 현재 ‘단일 지능’에서 ‘복합 지능’으로 진화하는 중이다. 단일 지능은 주어진 학습 데이터 안에 있는 범위에서만 응답할 수 있고 학습되지 않은 데이터로는 응답하기 어려운 게 특징이다. 사람은 유추할 수 있는 능력이 있지만 현재 AI 수준은 아직까지 가르쳐 주지 않은 분야를 유추하기에는 부족하다. 이 때문에 세계 각국은 관련 기술을 선점하기 위해 사활을 걸고 연구·개발에 나서고 있다.

박 부원장은 “승자 독식의 시장에서 우리도 핵심 요소를 가지고 기술을 개발하면서 우리만의 생태계를 만들어 가는 게 과제”라고 강조했다.

chari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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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268호(2020.03.16 ~ 2020.03.22)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