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기업 발목 잡는 지뢰밭 규제 걷어 내자]-기업 커질수록 빠르게 늘어 가는 규제들
-‘새로운 시도’ 이어 갈 수 있는 환경 만들어야
‘도대체 왜 기업해야 합니까?’ 규제에 꺾인 기업가 정신
[한경비즈니스=이정흔 기자]“지금은 모든 것을 원점에서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새 틀을 만들어야 할 시기입니다. 낡은 규제를 과감히 버리고 새로운 길을 터줄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해야 합니다.”


허창수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회장이 2020년을 시작하며 가장 먼저 강조한 내용이다. 기업들의 경영 환경이 어려워지는 상황에서 위기를 극복하고 기업의 성장을 이뤄내기 위해서는 ‘기업가 정신’을 되살리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이다.


절실함을 담아 ‘기업가 정신의 부활’을 외친 이는 허 회장뿐만이 아니다. 손경식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 회장은 “민간 실물 경제가 부진한 데는 국내 정책이 기업에 부담을 주는 방향으로 가면서 기업의 심리가 위축된 영향이 있다”면서 “기업의 활력을 높이는 방향으로 정책 기조를 전환해야 한다”며 기업들이 자유롭게 혁신을 시도하고 투자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또 강호갑 중견기업연합회 회장은 “한국 기업인에게는 최단기간에 민주화와 산업화를 이뤄낸 역량과 가능성의 DNA가 있다”며 “한국적 기업가 정신을 살려야 한다”고 말했다. 이처럼 국내 주요 경제단체장들이 한목소리로 ‘기업가 정신의 부활’을 외치고 나선 데는 그만큼 불필요한 규제들이 국내 기업들의 혁신과 도전을 가로막고 있다는 절박함이 밑바탕에 깔려 있다.


기업가 정신의 부활을 위해서는 스타트업과 중소기업이 중견기업으로, 또 중견기업이 대기업으로 자연스럽게 올라설 수 있는 ‘성장 사다리’를 탄탄하게 구축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 하지만 국내의 현실은 정반대다.


◆중소기업, 성장 거부하는 ‘피터팬 증후군’


중소벤처기업부는 지난해 11월 ‘기업 단위 중소기업 기본 통계’를 첫 발표했다. 이에 따르면 2017년 말을 기준으로 국내 약 630만 개 기업 가운데 중소기업의 비율은 전체 기업의 99.9%에 달한다. 소상공인(93.7%)과 소기업(4.8%), 중기업(1.5%)을 뺀 중견·대기업 수는 전체의 0.1%(4801개)에 불과하다. 지난 20년간 대기업군(자산 규모 10조원 이상)에 진입한 중견기업은 네이버·카카오·하림 등 3개에 불과하다. 국내 기업들의 ‘성장 사다리’가 끊어져 있다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기업에 성장은 숙명이다. 하지만 국내 기업들이 제때 중견기업으로 올라서지 못하고 성장이 정체돼 있는 데는 ‘규제’가 거대한 장벽으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경제연구원(한경연)이 지난해 9월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현행 법령상 기업의 규모를 기준으로 적용하는 ‘대기업 차별 규제’는 47개 법령에 총 188개에 달한다. 법률별로는 금융지주사법(41개, 21.8%)과 공정거래법(36개·19.1%)에 많았고 내용별로는 소유·지배 구조 규제가 65개(34.6%)로 가장 많고 그 뒤를 이어 영업 규제가 46개(24.5%), 고용 규제가 26개(13.8%), 진입 규제가 20개(10.6%)로 나타났다.

한경연의 분석에 따르면 결과적으로 중소기업이 대기업 집단 중에서도 최상단에 자리한 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으로 성장하기까지는 모두 9단계의 규제 장벽을 넘어야 한다. 특히 이와 같은 규제 허들이 높아지는 시기가 기업의 자산 총액 5000억원을 기준으로 하는 ‘중견기업’이다. 자산 총액 5000억원 미만의 기업에는 30개의 규제가 적용되지만 ‘중견기업’에 속하게 되면 81개 증가한 111개의 규제를 적용받게 된다. 공정거래법과 금융지주사법상 대기업 규제가 자산 총액 5000억원을 기준으로 삼은 때문이다. 기업들이 성장을 거부하고 중소기업에 머무르고 싶어 하는 ‘피터팬 증후군’이 나타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유환익 한경연 혁신성장실장은 “이와 같은 규제의 대부분은 과거 폐쇄적 경제 체제를 전제로 도입된 것이 대부분인데 이미 20년이 지나 글로벌 업체들과 경쟁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그대로 유지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며 “글로벌 기준에 맞게 제도를 개선하고 신산업을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제로 베이스에서 이와 같은 규제들을 전면 재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과도한 상속세, 글로벌 경쟁력 갉아먹는다


중소·중견기업의 원활한 가업 승계 규제 완화 또한 ‘기업가 정신의 부활’을 위해 손봐야 할 대표적인 규제로 거론된다. IBK경제연구소가 지난해 5월 발간한 ‘우리나라 가업 승계 현황 분석’에 따르면 창업자가 최고경영자(CEO)인 중견·중소기업 5만1256개 중 잠재적인 가업 승계 기업으로 볼 수 있는 CEO가 60세 이상인 기업은 1만7201개로 약 3곳 중 1곳(33.2%)꼴로 나타났다.


1970~1990년대 설립된 상당수의 중소·중견기업들이 세대교체기를 맞고 있지만 정작 가업 승계를 회피하려는 기업들이 적지 않다. 산업통상자원부와 한국중견기업연합회(FOMEK)가 지난 2월 설문 조사해 발표한 ‘2019년 중견기업 실태 조사’에 따르면 중견기업 1400곳 중 가업 승계 예정인 기업은 10.3%에 그쳤고 82.9%는 가업 승계 계획이 없다고 응답했다. 상속·증여세 등 과도한 규제의 영향이다. 국내 상속세의 최고 세율은 50%에 이른다. 일종의 경영권 프리미엄인 최대 주주 할증률까지 더하면 세율은 65%까지 오른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26.6%)의 2배가 넘는 세계 최고 수준이다.


‘가업 상속 공제’나 ‘증여세 과세 특례’ 등을 활용하는 것도 가능하지만 이 역시 사후 관리 기간 등 까다로운 조건이 걸려 있어 무용지물이나 마찬가지라는 비판이다. 실제로 지난해 중소기업중앙회가 업력 10년 이상 중소기업 대표와 가업 승계 후계자 5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2019 중소기업 가업 승계 실태 조사’에 따르면 가업 승계 계획이 있는 기업 넷 중 하나는 정부의 가업 상속 공제 제도를 활용할 계획이 없다고 답했다.


가업 상속 공제는 피상속인이 10년 이상 영위한 중소기업을 상속인에게 승계하는 경우 가업 상속 재산가액 중 업력에 따라 최대 500억원까지 공제해 주는 제도다. 하지만 공제받기 위해서는 연매출 3000억원 미만 기업이라는 기준에 맞아야 한다. 또 상속 후 10년 동안 지분·자산·업종·고용 등에 대한 사후 관리를 받도록 돼 있었다. 그러다 보니 ‘상속세 부담 완화’라는 취지에서 불구하고 가업 상속 공제 건수는 지난 7년간 연평균 68건에 그칠 정도로 이용 실적이 거의 없었다. 이에 따라 세법 개정을 통해 올해부터 사후 관리 기간을 10년에서 7년으로 단축하는 등 규제를 완화했지만 여전히 미흡하다는 지적이 많았다. 경총은 개편안이 발표된 직후 “기업들의 요구 사항에 비해 내용이 미흡해 규제 완화 효과를 체감하기에는 어려운 수준”이라고 실망감을 보이기도 했다.

‘가업 승계’에 이처럼 높은 세율이 매겨지게 된 데는 이를 ‘부의 대물림’으로 보는 인식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원활한 가업 승계를 위한 제도 개선을 위해서는 가업 승계를 ‘기업의 기술과 경영 노하우를 전수하고 이를 통해 지속적인 성장’을 위한 제도라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이성봉 서울여대 경영학과 교수는 “글로벌 시장에서 한국과 경쟁하고 있는 독일과 일본 같은 나라들은 이와 같은 ‘기업의 영속성’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다”며 “정부가 적극적으로 상속증여세 개편을 시행하는 등 기업의 승계를 지원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가업 승계를 위한 공제 제도를 ‘기업의 경영권 안정화를 위한 차원’에서 다룰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다.


한국과 달리 일본과 독일 등 해외 선진국들은 가업 승계를 국가 경쟁력 차원에서 접근하며 장수 기업을 육성하기 위해 법·세제, 금융 지원 등을 아우르는 종합 대책을 마련해 시행하고 있다. 일본은 2008년 ‘중소기업 경영 승계 원활화에 관한 법’을 제정했고 2009년 산업활력법에 중소기업 승계 사업 지원 계획을 신설했다.

2018년부터 향후 10년간 ‘사업 승계 실시 집중 기간’으로 정하고 정책적 지원을 강화하고 있다. 독일은 2006년 중소기업 육성 정책의 일환으로 기업 승계 조세 감면 법안을 마련했고 유럽 전역이 경기 침체에 허덕이던 2009년을 기점으로 상속세 개혁법과 경제 성장 촉진법이 시행되면서 상속 공제 제도를 강화했다.


임동원 한경연 부연구위원은 “지금과 같은 높은 상속 세율과 까다로운 가업 상속 공제 제도로는 상속 재산 감소와 경영권 승계가 불확실해지면서 기업가 정신이 약화될 우려가 있다”며 “선진국처럼 상속 세율을 대폭 낮추거나 상속세 폐지를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269호(2020.03.23 ~ 2020.03.29)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