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영식의 정치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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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란 말 쓰지 말라”에 통합당 잠룡들 반발
-기존 주자 배제, 새 주자 세우려는 金에 노선 투쟁 빌미로 대항
[홍영식의 정치판] 김종인 vs 홍준표·유승민·원희룡…불붙은 대선 게임
[한경비즈니스 = 홍영식 대기자] 김종인 미래통합당 비상대책위원장이 최근 펴낸 회고록 ‘영원한 권력은 없다’엔 그가 왜 보수 용어에 거부감을 나타내는지 잘 나타나 있다. 그가 2012년 19대 총선을 앞두고 한나라당(현 미래통합당) 비상대책위원을 맡았을 때다. 당시 박근혜 한나라당 비상대책위원장은 당 이름을 새누리당으로 바꾸고 정강 정책을 만드는 일을 그에게 맡겼다.

김 위원장의 회고다. “기존 한나라당의 정강 정책을 보니 보수라는 단어가 너무 많았다. 보수라는 용어를 모두 빼버리자고 했다. 당이 발칵 뒤집혔다. 보수 정당이 어떻게 보수라는 용어를 뺄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는 이런 논리로 맞섰다. “실제 행동이 민주적이지 못한 사람이 스스로 민주주의자라고 아무리 강조해 봤자 무슨 소용이 있을까. 보수주의도 마찬가지다. 보수라는 말 자체는 아무런 소용없는 허명(虛名)이다. 거기에 어떤 내용을 담고 어떻게 실천하는지가 중요하다. 아무리 보수를 자처해 봤자 보수답지 않으면 거짓 보수고 보수라는 용어를 한마디도 사용하지 않고서도 보수주의를 제대로 실천한다면 그것이 진짜 보수다.”

김 위원장은 “한동안 옥신각신했다. 박근혜까지 나서 조금만 양보해 줄 수 없겠느냐고 부탁하기에 딱 한 구절에만 보수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로 하고 모두 없애 버렸다”고 했다. 그는 정강 정책에 경제 민주화까지 넣는 것을 관철시켰다.

◆“국민은 이념에 반응 안 해” “좌파 2중대 흉내 내기”

8년이 지난 지금 통합당에서 비슷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김 위원장은 최근 “보수라는 말 자체를 좋아하지 않는다. 더는 보수라는 말을 쓰지 말고 시비도 걸지 말라”면서 그 이유를 설명했다. “당 정강 정책을 바뀐 시대정신에 맞게 손질해야 한다. 국민은 더 이상 이념에 반응하지 않는다. 진보·보수·중도라는 말을 하지 말라. 정책 개발만이 살길이다.”

하지만 이번엔 대선 주자들까지 들고일어나면서 논란이 커지고 있다. 김 위원장이 기본소득제에 이어 전일보육제, 고용보험 확대까지 잇달아 제시하면서 ‘김 위원장 대 통합당 잠룡’ 간 대결 구도는 더 가팔라지고 있다. 김종인발(發) 보수 가치 논쟁이 노선 투쟁으로 불붙는 양상이다.

통합당 안팎 대선 주자들이 김 위원장에 잇달아 반기를 드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김 위원장은 여러 차례 “당내 대선 주자가 안 보인다”고 말했다. 홍준표 무소속 의원과 유승민 전 통합당 의원,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 등에 대해선 “지난 대선에서 검증이 다 끝났다”고 선을 그었다. 그러면서 ‘새 주자 만들기’ 등을 거론한 것이 불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됐다. 보수 가치 논쟁을 고리로 당 안팎의 기존 주자를 배제하려는 김 위원장과 기존 주자들 간 본격 힘겨루기가 시작된 것이다. 보수 가치 논쟁 뒤엔 이렇게 대권 파워게임이 자리 잡고 있다.

당 안팎의 대선 주자들은 공격에 나서고 있다. 통합당 복당을 추진하고 있는 홍 의원은 “압축 성장기에 있었던 보수 우파 진영의 과(過)만 들춰내는 것이 역사가 아니듯 보수 우파의 공(功)도 제대로 평가 받아야 한다”며 “좌파 2중대 흉내 내기를 개혁으로 포장해서는 좌파 정당의 위성 정당이 될 뿐”이라고 반박했다. 유 전 의원은 “한국 보수가 망한다는 것은 무능하고 깨끗하지 못한 진보 세력에 나라 운영의 권한과 책임을 다 넘겨주는 것”이라며 “개혁 보수 노선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강조했다. 김 위원장을 정면 겨냥한 것이다.

통합당 소속 원희룡 제주도지사는 “보수의 이름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우리의 유전자”라며 “용병에 의한 승리가 아니라 우리에 의한 승리, 대한민국의 역사적 담대한 변화를 주도해 왔던 바로 그 보수 위풍(威風)의 승리여야 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역시 김 위원장의 탈보수 발언을 비판한 것이다.

반면 김 위원장의 ‘1970년대생 경제 전문가’ 발언으로 주목받은 김세연 전 통합당 의원은 기자에게 “통합당은 자생력을 잃었다”며 “김종인 비대위 체제로 차기 대선까지 간다면 제대로 승부를 걸어볼 가능성이 40~50%까지 올라갈 것으로 생각한다”며 김 위원장을 두둔했다.

당내 의원들 간에도 논쟁이 붙고 있다. 4선 중진 박진 의원은 “보수 가치는 없어지지 않는다. 이를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장제원 의원은 “‘보수가 싫다’, ‘보수라는 말을 쓰지 말라’는 어느 이방인이 내뱉는 조롱 섞인 짜증”이라고 김 위원장을 공격했다. 반면 하태경 의원은 “김종인 비대위가 들어서고 당 지지율이 오르고 민주당 지지율이 떨어진 주된 원인은 민주당은 과거사를 재탕하는 후진 세력, 통합당은 새로운 담론을 제시하는 미래 세력 이미지를 얻고 있기 때문”이라고 김 위원장을 두둔했다.

◆기본소득제 놓고 “논의에 불붙길” “사회주의 배급제”

김 위원장의 ‘좌클릭 밑밥’이 된 기본소득제는 대선 주자들을 둘로 가르고 있다. 오세훈 전 서울시장은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4차 산업혁명이 본격화하고 팬데믹(세계적 유행)이 휩쓸고 간 뒤 예상되는 일자리 대량 소실에 대한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기본소득제 논의를 시급하게 할 수밖에 없다”며 “김종인 비대위에서 기본소득 논의에 불을 붙이길 바란다”고 찬성 의사를 밝혔다. 반면 홍 의원은 “기본소득제의 본질은 사회주의 배급 제도를 실시하자는 것과 다름이 없다”고 말했다. 이어 “헌법상 보칙에 불과한 경제 민주화가 헌법상 원칙인 자유 시장 경제를 제치고 원칙인 양 행세하던 시절이 있었다”고 지적했다. 경제 민주화론자인 김 위원장을 정면 비판한 것이다.

익명을 요구한 통합당 고위 당직자는 “정당은 이념적 지향점이 뚜렷하게 있어야 한다. 통합당 정강 정책을 보면 자유 민주주의와 시장 경제, 인권과 법치, 신뢰,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 튼튼한 안보 등 보수 우파가 지켜야 할 소중한 가치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며 “이런 가치들을 제대로 실천하지 않아 문제가 돼 왔지, 이런 가치 자체에 문제가 있느니 없느니 하는 것은 소모적 논쟁”이라고 말했다.

홍 의원은 기자에게 “당이 이념적 지향점이 있어야 하는데 극좌부터 극우까지 같이 뭉쳐 있으니 통합당의 정체성을 나도 모르겠다”며 “극렬한 내부 투쟁을 통해 이념과 노선을 다시 정립하고 당의 이념과 노선에 맞지 않는 사람은 나가고 당을 새롭게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4선 중진 홍문표 의원은 “확실한 당의 좌표가 설정되면 조금 부족해도 ‘가자’ 하는 합창이 나올 수 있는데 지금 그 부분에 대해 우려스럽다”고 했다.

김 위원장은 자신에 대한 잇단 공격에 “내가 굳이 신경 쓸 게 뭐가 있겠나. 공부 좀 더해라”며 물러설 뜻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 김 위원장 공격에 나선 잠룡들도 대선 향방이 걸린 문제여서 마찬가지다. 그런 만큼 김 위원장의 마이웨이와 제동을 거는 대선 주자 간 격돌은 계속될 것으로 예상된다. 김 위원장의 좌클릭 행보가 당을 통합하는 ‘밑밥’이 될지, 보수 분열을 심화시키는 ‘촉매제’가 될지는 그의 리더십에 달렸다.
yshong@hankyung.com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281호(2020.06.13 ~ 2020.06.19)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