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조 레이더] 노동자임을 증명하려면 상시출근·4대 보험 관련 정황 반드시 남겨야
무늬만 ‘부사장’도 사실상 '노동자' 판결...法 "퇴직금 줘라"
17년 전 모 회사에 취업한 A 씨는 처음엔 프리랜서로 일했다. 2년 뒤부터 정해진 시간에 출퇴근했다. 매달 일정한 월급도 받았다.

이후 회사의 지분을 일부 갖기도 했다. 이에 따라 회사에선 ‘부사장’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실제로 경영에 참여하지는 않았다.

여기까지는 별 탈이 없었다. 문제는 회사를 그만둘 때였다. A 씨는 본인이 일반 직원과 똑같은 대우를 받으며 일했기 때문에 직원들처럼 퇴직금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회사의 생각은 달랐다.

A 씨도 경영진이라고 볼 수 있으므로 퇴직금을 줄 수 없다고 했다. 결국 소송으로 맞붙었다. 이 사건은 대법원까지 가서야 결론이 났다.

A 씨처럼 이름뿐인 임원진은 법적으로 사용자일까, 직원일까. 회사에서는 ‘부사장님’이라고 불렸어도 실제로는 직원 대우를 받았다면 일반 직원과 똑같이 퇴직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지난 6월 22일 대법원 1부(주심 권순일 대법관)는 보험계리사 A 씨가 회사를 상대로 낸 퇴직금 청구 소송 상고심에서 원고 패소 판결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돌려보냈다고 밝혔다.
◆1심 “실제론 노동자…퇴직금 줘라”

A 씨와 회사 간 법적 다툼은 2017년 시작됐다. A 씨가 14년간 일한 회사를 떠나면서 ‘퇴직금을 받을 수 있느냐 없느냐’ 문제를 두고 의견이 갈라지면서다.
A 씨가 보험계리법인인 B사에 입사한 것은 2003년이다. 25년간 보험사에서 일한 경력을 살려 보험계리사로 취업했다. 2007년 열린 사원 총회에서 회사 전체 출자 계좌 2만1000여 계좌 중 2000계좌를 획득했다. 약 10%의 지분을 보유하게 된 셈이었다.

A 씨는 이후 2010년 다른 회사 구성원에게 모든 출좌 계좌를 넘겼다. B사는 2014년 주식회사로 변경됐다.

회사의 지분을 보유하게 됐지만 A 씨는 회사의 실제 경영에는 관여하지 않았다. A 씨는 2017년 퇴사하면서 퇴직금 약 6570만원을 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B사는 A 씨가 근로기준법상 노동자가 아니라며 ‘노(NO)’를 외쳤다.

이렇게 A 씨와 회사는 재판장에 마주 서게 됐다. 서울서부지법은 1심에서 A 씨가 사실상 임금을 목적으로 종속적인 관계에서 노동을 제공하는 노동자였다며 퇴직금 3300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원고는 사무실로 정시 출퇴근했고 회사 법인등기부에 대표이사나 감사로 등록된 바 없다”고 판단했다.

다만 A 씨가 B사의 지분을 보유해 사원 총회 등에서 의결권을 행사한 기간은 회사에 종속된 노동자가 아니라고 보고 퇴직금 산정 기간에서 제외해야 한다고 봤다.

◆2심 “스스로 급여 줄였다면 ‘경영진’”

사측은 1심의 판결에 불복했다. 재판은 이어졌다. 2심은 1심의 판결을 뒤엎고 회사의 손을 들어줬다. A 씨를 노동자가 아닌 ‘관리자’라는 판단을 내린 것. A 씨를 노동자로 인정한 1심 판결을 취소하고 그의 청구를 기각했다.

2심 재판부는 A 씨를 일반적인 노동자가 아니라고 봤다. 주요 이유로 우선 A 씨가 회사에서 ‘부사장’이라고 불렸다는 점을 들었다.

또 A 씨의 월급이 근로 소득이 아니라 ‘사업 소득’ 형식으로 지급됐다는 점도 A 씨를 경영진으로 볼 수 있는 근거로 판단했다. 일반 직원들과 달리 4대 보험에 가입하지 않은 것도 2심 재판부의 논리를 뒷받침해 줬다.

결정적으로 회사의 경영이 어렵다는 이유로 급여를 스스로 낮춘 점도 꼽혔다. 재판부는 “원고 A 씨가 사측의 경영 사정을 이유로 2010년 4월부터 이전 월급 450만원보다 150만원이나 줄어든 300만원만을 지급받기도 했다”면서 “이는 일반적인 노동자로 보기 어렵다”고 했다. 주어진 업무 외에 근태 및 급여 등의 회사 서무를 담당하는 관리자의 역할을 수행했다는 점도 짚었다.
2심 재판부는 이에 따라 “입사 초기부터 일반 노동자가 아닌 피고의 관리자로 근무했다고 볼 사정이 충분하다”며 “A 씨가 임금을 목적으로 종속적인 관계에서 회사에 속해 일했다고 단정하기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다시 바뀐 대법원 판결…“호칭은 형식일 뿐”
A 씨는 억울했다. 2심의 판결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재판은 대법원에서도 이어졌다. 대법원은 다시 항소심의 판결을 뒤집었다. A 씨를 노동자로 인정한 것이다.

대법원은 “A 씨는 이전까지 프리랜서 형태의 보험계리사로 일하다가 2005년 4월게부터 회사에서 급여를 받으면서 상시 출근하기 시작했는데 그 무렵부터 임원으로 등기되지 않은 채 ‘부사장’으로 불렸지만 보험계리사로서의 일반적인 업무와 경영권을 가진 회장단의 지휘와 감독을 받으며 서무 관련 업무를 수행했을 뿐 보수나 처우 측면에서 다른 경력직 보험계리사들과 비교해 차별화된 우대를 받은 것도 아니었다”며 “부사장 호칭 등은 형식·명목적인 것에 불과하고 A 씨는 실질적으로 B사의 노동자 지위에 있었다고 봐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러면서 월급을 근로 소득이 아닌 사업 소득 형식으로 지급한 것도 A 씨가 반드시 경영진으로 대우받은 것은 아니라고 봤다.

재판부는 “회사가 A 씨에게 급여를 사업 소득 형식으로 준 것은 회사가 4대 보험 적용을 피하는 등의 이익을 얻기 위해 임의로 정한 것에 불과한 것으로 보인다”고 봤다.

변호사들은 퇴직금 문제를 두고 ‘노동자냐 아니냐’로 갈등을 빚는 경우가 많지만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드는 사건이라고 설명한다.

서울지방노동위원회 권리구제 대리인으로 활동했던 법무법인 주원의 김진우 변호사는 “노동자성을 판가름하기 위해서는 정기적으로 정해진 시간에 출퇴근했는지, 꾸준하게 급여를 받고 있었는지 등을 증명할 만한 기록을 확보해 둬야 한다”며 “노동자성을 판단하는 데 ‘4대 보험’ 가입 여부가 중요한 만큼 보험 가입 등을 둘러싼 갈등이 오간 정황을 문자 메시지 등으로 남겨둬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무늬만 ‘부사장’도 사실상 '노동자' 판결...法 "퇴직금 줘라"
◆[돋보기] 이런 사건도 法 “실제 주인 따로 있는 회사의 ‘바지 사장’은 노동자”

이름만 ‘사장’ 혹은 ‘대표’를 두고 노동자인지를 다투는 사건은 비일비재하다. 실제로 회사를 운영하는 사람이 따로 있다면 등기상 ‘명목상 대표’라고 봐야 한다는 행정법원의 판단도 나왔다.

지난 2월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행정법원 행정13부(부장판사 장낙원)는 A 씨의 유족이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유족 급여 등을 지급해 달라”고 낸 소송에서 유족의 손을 들어줬다.

A 씨는 커튼과 부자재 등을 제조·판매하는 회사의 대표이사로 등기돼 있던 2017년 6월 자택에서 쓰러져 사망했다.

A 씨 가족은 근로복지공단에 유족 급여를 신청했지만 거부당했다. 근로복지공단은 “A 씨가 매주 52시간 이상 근무했다는 사실은 인정되지만 회사의 대표이사이므로 노동자가 아니다”고 봤다. 결국 A 씨 유족은 공단을 상대로 소송을 냈다.
법원의 판단은 공단과 달랐다. A 씨가 대표이사로 이름을 올리긴 했지만 실제 경영자는 다른 사람이라고 봤다.

재판부는 “A 씨의 대표이사 직위는 형식적·명목적일 뿐이며 의사 결정 권한을 갖고 있는 실제 경영자는 따로 있었다”며 “이에 따라 A 씨를 산업재해보상보험법상 노동자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밝혔다.

A 씨의 명함에 찍힌 공식 직함이 ‘대표이사’가 아닌 ‘영업이사’인 점도 고려했다. 회사 직원들이 A 씨를 ‘이사님’이라고 부르며 영업 업무만 담당한 것으로 안다고 진술한 사실도 감안했다.

실제 경영자라고 여겨지는 B 씨의 진술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B 씨는 “회사를 실제 경영한 것은 자신”이라며 “A 씨의 금융 거래상 신용도가 좋아 대출에 유리해 대표이사로 등기한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또 A 씨가 회사 주식을 일부 갖고는 있었지만 이 때문에 노동자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고 재판부는 판단했다.

안효주 한국경제 기자 joo@hankyung.com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283호(2020.06.27 ~ 2020.07.03)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