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스크 관리 ABC]
-여러 공간으로 나뉘어 폭발 시 주변으로 퍼지지 않아…‘인프라’ 유지하며 ‘관리’해야
초대형 유조선에도 적용되는 리스크 관리의 원칙 [장동한의 리스크 관리 ABC]
[장동한 건국대 국제무역학과 교수·한국보험학회 회장] 뉴스에 가끔 등장하는 유조선은 실로 엄청나게 크다. 전형적인 대형 유조선은 무게가 25만 톤, 원유를 가득 실으면 150만 배럴(120만 드럼)이나 된다. 필자가 1980년대 중반 S정유사에 근무할 당시 원유 1배럴의 시장 가격은 100달러였고 1달러 환율이 1000원이었으니 원유를 가득 실은 대형 유조선의 재산 가치는 실로 어마어마하다.

그때는 또 중동 정세가 몹시 불안해 한국행 유조선이 무사히 호르무즈 해협을 빠져 나오는지가 정유사의 큰 관심사였다. 정유사에 근무하던 문과 출신의 필자에게 큰 의문 중 하나는 유조선의 내부 구조였다. 만약 미사일이 공격하면 원유를 가득 실은 유조선 자체가 엄청난 폭탄이 되는 셈이 아닐까. 실로 불 난 집에 기름 붓는 격일 것이다.

실제는 그렇지 않다. 리스크 관리 차원에서 유조선의 내부 공간은 여러 공간으로 격리 처리돼 있다. 이에 따라 특정 공간의 폭발이 쉽게 주변으로 퍼지지 않는다. 리스크 분산의 지혜가 유조선 내부 공간에도 적용되는 것이다.

만약 경비 절감과 효율성 제고 차원에서 벽을 허물고 유조선 내부 공간을 하나로 합치면 어떨까. 훨씬 싸게 유조선을 만들어 쉽게 원유를 채우거나 뺄 수 있고 운항 시간도 크게 줄일 수 있을 것이다. 반면 만약 미사일 공격 등을 당하게 되면 한꺼번에 배와 원유를 잃을 수도 있다. 고위험·고수익 원칙이 유조선 운영에도 적용되는 것이다.

2008년 미국발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 담보 대출) 부실 사태와 글로벌 금융 위기가 바로 미사일 공격을 받고 일거에 침몰한 대형 유조선과 같았다. 싸게 빨리 쉽게 돈을 굴려 고수익을 챙기려고만 했지 자신들이 타고 있던 배의 구조적 리스크와 외부 리스크를 감안하지 않았거나 못 했다. 비즈니스의 구조적 문제를 관리 감독하는 법과 규제도 엉망이었고 비즈니스 리스크를 관리 감독해야 할 당국도 부실하기 짝이 없었다. 비즈니스 운영 상황을 객관적으로 평가한다는 신용 평가사도 고객에게서 평가 서비스 대가를 받으니 제대로 된 평가를 할 수 없는 구조다. 실로 ‘토털 리스크’ 상황으로, 언젠가 사고가 날 수밖에 없는 구조였던 것이다.

많은 이들이 비판·비난하는 것처럼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는 리스크 관리의 실패 때문일까. 전반적으로 옳은 지적일 수 있지만 전적으로 동의할 수는 없다. 리스크 관리 시스템 자체의 문제라기보다 리스크 관리를 제대로 운용하지 못한 이들의 탓이다. 저금리·고수익에 혈안이 된 투자자들, 이들을 부추긴 부동산 업자들과 금융회사, 부동산 파생상품 거래자들, 남의 파산 가능성을 대상으로 돈 거래를 하면서 첨단 금융 사업으로 위장한 도박꾼들의 탐욕, 해야 할 말을 제대로 하지 않거나 못한 지식인들, 시장 효율성 제고와 금융 국제화에 눈 먼 정치인들, 시장주의자들이 득세한 관리 감독 기구, 신용 평가사들의 부실 평가 등등….

속도 제한이 없다는 독일의 고속도로 아우토반에선 자동차 사고가 왕왕 나고 그만큼 대형 사고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고 아우토반을 없애자는 주장은 하지 않는다. 문제가 있더라도 주어진 훌륭한 인프라를 그냥 없애는 것이 아니라 리스크를 관리하는 데 신경 써야 마땅하다.
투기 리스크 논란의 주된 공격 대상인 파생 금융 상품은 인류 문명의 귀중한 자산으로, 문제가 있다고 해서 함부로 손볼 대상은 아니다. 귀한 금융 인프라의 프레임을 잘 유지하면서 리스크 관리에 더욱 힘쓰는 것이 옳다. 최근 저금리에 유동성이 넘쳐 나고 레버리지 투자가 과열 양상인 한국 금융 시장의 리스크 관리는 더없이 중요하다.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290호(2020.08.17 ~ 2020.08.23)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