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건희 회장 일대기① 1942~1992
- 20년간의 경영 수업…‘경청(傾聽)과 목계(木鷄)의 교훈’
[이건희 일대기]말없는 소년, 한국 최대 그룹 총수가 되다
[한경비즈니스=이홍표 기자] 이건희 회장의 유년 시절은 6·25전쟁 전후의 복잡한 사회상을 그대로 보여준다. 아버지가 아무리 부유한 사업가라고 할지라도 시대를 피해갈 수는 없었다.

이 회장은 1942년 1월 9일 대구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날 당시 부친 이병철은 대구 서문시장 근처에서 삼성상회를 경영하고 있었다. 그 무렵 대구에는 이 회장 위로도 6명의 자녀들이 있었다. 어머니는 어린 이건희를 돌보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 때문인지 어머니 박두을 여사는 이 회장이 젖을 떼자마자 의령의 시어머니 댁으로 보낸다. 의령의 친가로 보내진 이 회장은 친할머니를 어머니라고 부르며 유모의 손에서 컸다.

네 살 무렵 그는 대구로 돌아온다. 어머니를 처음 보았을 때 이 회장은 혼란스러웠던 모양이다. 할머니를 어머니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 어머니에게 누구냐고 묻기까지 할 정도였다. 형과 누나도 그 무렵 처음 봤다.

대구에서 사업을 하던 이병철 선대 회장은 사업을 키우기 위해 1947년 상경했다. 종로구 혜화동 163의 25에 198㎡(60평)짜리 집을 사서 자리를 잡고 이듬해엔 종로2가에 무역회사인 삼성물산 공사를 차렸다. 당연히 이 회장도 상경해 종로의 혜화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이 회장이 2학년 때 6·25전쟁이 터졌다. 미처 피란을 가지 못한 이 회장 일가는 고초를 겪었다. 이병철 선대 회장이 북한에 ‘자본가’로 지목 당했기 때문. 불안한 나날을 보내던 이 회장 일가는 1950년 서울 수복과 동시에 마산으로 내려갔다.

여기서 이 회장 일가는 대구로 거처를 옮긴다. 물론 대구 생활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이병철 선대 회장이 부산의 동광동으로 자리를 옮겨 고철 수집업, 설탕과 비료 수입업 등을 했기 때문이다. 부산에서는 두 번 전학했다. 합쳐 보면 이 회장은 초등학교 시절에만 다섯 번 전학을 다녔다.

“건희가 당시로서는 구경하기도 힘든 신기한 장난감을 가져와 함께 놀던 생각은 나는데, 말이 없고 장난도 잘 치지 않는 아이라 별다른 기억은 거의 없다.” 부산사범부속초 시절 4~5학년을 함께 다녔던 권근술 전 한겨례 신문 사장의 회고다.

◆ 유독 눈에 띈 ‘마니아 기질’
[이건희 일대기]말없는 소년, 한국 최대 그룹 총수가 되다
당시부터 이건희 회장은 독특한 취미를 가지고 있었다. 다른 어린아이들이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데 골몰했다면 그는 ‘뜯어보는데’ 힘을 기울였다. 이런 취미는 어른이 돼서도 이어졌다.

그는 카메라는 물론 VTR, 심지어 자동차 까지 뜯었다가 조립할 줄 알았다. 그가 어떤 것에 몰두하면 ‘끝을 보고야 마는’ 마니아적 기질을 가지고 있는 것은 이미 유명하다.

이 회장은 부산사범부속초등학교 5학년 때인 1953년 도쿄로 유학을 떠났다. “선진국을 배우고 오라”는 아버지의 지시 때문이었다. 당시 일본은 라디오 시대를 지나 TV 시대로 접어드는 시기였다. 또 세탁기와 냉장고 등 가전이 급속도로 보급되기 시작했다.

이 회장은 이 시대에 일본에 처음 발을 디뎠다. 훗날 그의 전자 산업에 대한 관심은 일본 전자 제품에 대한 ‘충격’ 때문으로 보는 해석이 많다.

이 회장은 처음 1년 동안 일본어를 배우느라 고생이 많았다. 또 다섯 군데의 학교를 다니느라 딱히 공부에 대한 기초도 없었다. 말도 통하지 않고 공부로 인정받기도 어려웠다는 의미다.

더군다나 당시 일본은 한국인에 대한 차별이 매우 심한 나라였다. 당연히 별다른 친구도 없었다. 부모님은 떨어져 살았고 함께사는 둘째 형은 아홉 살이나 차이 나는 어려운 사람이었다.

“태어나면서부터 떨어져 사는 게 버릇이 돼 내성적인 성격을 가지게 됐고, 친구도 없고, 그러니까 혼자 생각을 많이 했고, 생각을 해도 아주 깊이 하게 됐다. (…) 가장 민감한 나이에 민족 차별, 분노, 외로움, 부모에 대한 그리움, 이 모든 걸 절실히 느꼈다.” 이건희 회장이 인터뷰에서 직접 털어놓은 말이다.

◆ 생각의 지평을 넓힌 일본 유학 시절
[이건희 일대기]말없는 소년, 한국 최대 그룹 총수가 되다
그는 초등학교를 다니며 일찌감치 골프를 배우게 된다. 1950년대 초 일본에서 처음 골프를 배운 아버지 이병철 선대 회장의 권유 때문이다. 이 회장은 항상 “골프를 이해하면 세상의 이치를 알게 된다”고 말했다.

실제로 그는 자서전 ‘호암자전’에서 골프에 대한 예찬론을 펼치기도 했다. 이건희 회장도 훗날 골프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한다.

그의 일본 유학 시절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영화’다. 그는 유학 시절 1200~1300편에 이르는 영화를 봤다고 한다. 1200~1300편이면 그 무렵 일본에서 10년간 만들어진 영화 편수와 같다. 어린 시절 방과 후 대부분의 시간을 영화관에서 살았다는 얘기다.

“영화를 감상할 때면 대개 주인공에게 치중해 보게 된다. 주인공의 처지에 흠뻑 빠지다 보면 자기가 그 사람인 양 착각하기도 하고 그의 애환에 따라 울고 웃는다. 그런데 스스로를 조연이라고 생각하면서 영화를 보게 되면 아주 색다른 느낌을 받는다. 나아가 주연, 조연뿐만 아니라 등장인물 각자의 입장에서 보면 영화에 나오는 모든 사람들의 인생까지 느끼게 된다. 그저 생각 없이 화면만 보면 움직이는 그림에 불과하지만 이처럼 여러 각도에서 보면 한 편의 소설, 작은 세계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이건희 에세이집 ‘생각 좀 하며 세상을 보자’ 중에서)

중학교 1년을 마치고 귀국한 이건희 회장은 서울사대부중에 전학을 온다. 중학교 졸업 후 그는 서울사대부고를 다녔다. 고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그는 레슬링부에 들어간다. 그가 훗날 레슬링협회 회장이 된 것은 고교 시절 그가 레슬링과 맺은 인연 때문이다.

그의 레슬링부 생활은 2년 만에 막을 내린다. 웰터급 선수로 전국 대회에 나가 입상하기도 했지만 연습 도중 눈썹 근처가 찢어져 가족들이 더 이상 운동을 하지 못하도록 말렸기 때문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건희 회장은 와세다대 상학부로 유학을 간다. 1961년의 일이다. 대학 시절 이 회장은 ‘튀지 않는 학생’이었다. 자신은 공부에 정말 취미가 없어 ‘낙제점’만 면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 돌아온 3남, 첫 직장은 ‘미디어’에서
[이건희 일대기]말없는 소년, 한국 최대 그룹 총수가 되다
대신 대학 시절 그는 하나의 깨달음을 얻는다. 잘나가는 운동선수나 전과 20범의 사기꾼 심지어 야쿠자 등등 여러 부류의 사람들과 1년간 골프장에서 어울리며 얻은 깨달음이다. 바로 ‘일류’에 대한 것이다.

그는 이 시절을 회고 하며 “잘나가는(일류) 사람들을 보니 자신이나 일에 대해 철저한 사람들이고, 인간미가 넘치며, 벌을 줄때는 사정없이 벌을 주고, 상을 줄때는 깜짝 놀랄 정도로 줬다”고 말했다.

와세다대를 마치고 미국 조지워싱턴 경영대학원에 진학한다. 경제학을 전공으로 매스컴을 부전공으로 했다. 매스컴 전공은 이미 이병철 선대 회장이 “매스컴은 어떻겠느냐”라는 언질이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 시절에는 자동차에 심취했다. 그는 ‘자동차 대국’ 미국의 자동차들에 충격을 받았다. 경영대학원 재학 시절에만 차를 여섯 번 바꿨다. 그러나 ‘재벌 집 막내아들’로서의 호사스러운 취미라기보다 ‘자동차’ 자체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다.

그는 서너 달마다 중고차를 새로 사서 사들인 차는 한 번씩 꼭 뜯어보고 이를 되팔았다. 졸업 무렵에는 600~700달러가 불어나 있었고 자동차의 기본 구조에 대해 빠삭해져 있었다.

이건희 회장은 기계광이다. 그의 서가엔 경영학 서적보다 전자·우주·항공·자동차·엔진공학·미래공학 등에 관련된 책이 더 많다고 한다. 자동차는 2만 개가 넘는 부품으로 만들어진 기계공학의 꽃이다.

실제로 그는 1967~1987년까지 이병철 회장 밑에서 경영 수업을 받을 때도 퇴근 후 주로 기계와 씨름하며 보냈다. 술을 워낙 좋아하지 않지만 기계에 대한 관심이 매우 높아서였다.
[이건희 일대기]말없는 소년, 한국 최대 그룹 총수가 되다
마침내 1966년 스물다섯 살의 이건희 회장은 한국에 돌아온다. 이듬해 11월 이 회장은 당시 중앙일보 홍진기 회장의 장녀 홍라희 리움미술관 관장과 결혼한다. 결혼 후 이 회장은 삼성 비서실에서 수습사원으로 근무했다. 그의 업무는 아침마다 신문을 보고 삼성과 관련된 기사를 찾아 붉은색 밑줄을 치는 일이었다.

1968년 12월 이건희 회장은 비로소 공식적으로 첫 직장 동양방송에 입사한다. 당시 직책은 동양방송 및 중앙일보 이사였다. 당시 중앙일보와 동양방송의 회장은 장인 홍진기였다.

이건희 회장은 홍진기 회장 아래서 아침 8시에 출근해 밤 10시까지 일했다. 당시엔 동양방송이 생긴 지 2년밖에 안 돼 하루라도 빨리 궤도에 올릴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영화광 이건희 회장은 여기서 한 가지 묘안을 내놓는다.

즉 TV의 시청률을 좌우하는 드라마의 중요성을 깨달아 과감하게 투자한 것. 특히 드라마의 조연들을 후하게 대접했다. 주연의 연기가 돋보이려면 좋은 조연들이 중요하다는 게 그의 판단이었다.

◆ 이병철 회장, ‘후계자’를 천명하다
[이건희 일대기]말없는 소년, 한국 최대 그룹 총수가 되다
1971년 이건희 회장 그리고 삼성의 훗날을 만들 ‘결정적 사건’이 발생한다. 이병철 선대 회장이 “후계자로 3남 건희를 정했으며 건희를 중심으로 삼성을 이끌어 가라”는 내용의 유언장을 작성한 것이다. 이 유언장은 그로부터 5년이 지난 후에야 세상에 공개된다.

이병철 회장이 1976년 위암 판정을 받고 이 유언장을 가족들에게 공개한 것이었다. 다행스럽게도 1976년 이병철 회장의 위암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후계자인 이건희 회장은 1978년부터 본격적으로 경영 수업을 받기 시작한다. 이병철 회장이 타계하기 9년 전이다.

1979년 2월 27일 이건희 회장은 그룹 부회장으로 승진하면서 삼성 본관 28층의 이병철 회장 집무실 바로 옆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가 삼성 부회장으로 출근하던 첫날 이병철 회장은 이건희 회장을 자신의 방으로 불렀다. 그리고 붓을 들어 ‘경청(傾聽)’이라는 휘호를 써 줬다.

대기업 회장이 남의 말을 잘 듣는 게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이병철 회장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는 의미다. 이건희 회장은 훗날에도 이를 자신의 경영 철학 중 하나로 꼽는다.

“선친은 경영 일선에서 항상 나를 동반하셨고 많은 일을 내게 직접 해보라고 주문하셨다. 하지만 자세하게 설명해 주시지는 않았다. 현장에서 부딪치며 스스로 익히도록 하셨다. 이런 시간이 쌓이면서 ‘경영은 이론이 아닌 실제이며 감(感)이다’라는 체험적 교훈을 배웠다.

” 이병철 회장은 후계자에게 많은 말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경청’과 함께 또 하나 던져준 화두가 있다. 바로 ‘목계(木鷄)’다. 목계는 글자 그대로 나무 닭을 뜻한다. 목계는 ‘장자’의 ‘달생편’에 나오는 이야기다. 요지는 나무 닭처럼 ‘세파에 초연해야 함’을 말한다.

◆ 46세의 회장, 삼성을 바꾸기 시작하다
[이건희 일대기]말없는 소년, 한국 최대 그룹 총수가 되다
후계자로 자리매김한 이건희 회장이 ‘탄탄대로’를 걸었을까. 아니다. 야심차게 추진한 첫 사업에서 큰 실패를 맛본다. 이 회장은 부회장에 오르면서 ‘해외사업추진위원회’ 위원장을 맡음과 동시에 중화학과 에너지 사업 부문을 맡았다.

이 회장은 1차·2차 오일쇼크 기간 동안 원유 확보에 온 힘을 기울였다. 이 기간 동안 기존 삼성의 순혈 주의를 깨고 여러 외부 인사를 영업하며 ‘에너지 사업’에 사활을 걸었다. 특히 유공을 인수하기 위해 치열한 인수전을 벌였다.

그러나 1980년 유공의 새 주인은 SK그룹(당시 선경그룹)으로 결정됐다. 국내 최대 에너지 회사 인수에 실패한 삼성은 해외 자원 개발에 눈을 돌렸다. 하지만 2차 오일쇼크의 충격이 가시기 시작하면서 원유가가 안정되기 시작했다. 그가 집념을 가지고 추진했던 여러 에너지 사업들은 원유가 하락에 점점 빛을 잃었다.

이후 1980년 중반까지 이건희 회장은 방랑의 세월에 들어간다. 에너지 사업에 대한 대내외적 문제 제기, 그룹 승계에 대한 견제 등에 시달린 것. 그 무렵 이건희 회장은 미국을 떠돌면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1980년대 초 미국의 한 호텔에서 손병두 전 전경련 부회장을 만나 밤새워 얘기하던 중 자신이 “얼마나 참고 있는 줄 아느냐?”고 털어놓을 정도였다. 본래 말이 없는 그로서는 이례적인 발언이다.

1987년 11월 19일 아버지이자 회장님이었던 이병철 회장이 78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그로부터 2주 후인 1987년 12월 1일 호암아트홀에서 열린 삼성그룹 신임 회장 취임식이 열린다. 당연히 주인공은 사장단으로부터 신임 그룹 회장으로 추대를 받은 이건희 회장이었다.

46세의 일이다. 1988년 3월 이건희 회장은 이제 50돌을 맞은 삼성에서 ‘제2의 창업’을 선언한다. “제2의 창업을 선업하고 변화와 개혁을 강조했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나도 달라지는 게 없었다. 50년 동안 굳어진 체질은 너무도 단단했다. 삼성이 제일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특히 1992년 여름부터 겨울까지 나는 불면증에 시달렸다. 이대로 가다가는 삼성 전체가 사그라질 것 같은 절박한 심정이었다. 체중이 10kg 이상 줄었다.”

이건희 회장의 인터뷰 내용이다. 물론 겉보기 삼성은 나쁘지 않았다. 문제는 이 회장의 말 대로 굳어진 삼성의 체질이었다. 이 체질을 바꾸기 위한 이 회장의 선택은 ‘비서실의 재구축’이었다.

‘관리의 삼성’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삼성 비서실이 강력한 권한으로 그룹 전체를 통제하면서 생겨난 말이다. 문제는 비서실이 지나치게 강해지면서 생겨났다. 관리가 지나치다 보니 1000원짜리 드라이버 하나 사는 작은 의사결정에 까지 대여섯 개의 결재 도장이 필요한 수준이었다. 이 회장은 대대적 수술에 나선다.

시작은 1990년 12월 이뤄진 소병해 비서실장의 삼성생명 부회장의 발령이다. 이건희 회장과 동갑내기인 소 실장은 이병철 회장을 12년간 보필해 온 최고의 가신이었다. 이 회장은 3년 탈상 시점을 기점으로 소 실장을 삼성생명으로 전출시킨다.

그로부터 장기간 이건희 회장은 비서실 조직에 수술을 가한다. 특히 ‘자율 경영’을 강조하며 계열사들의 역량을 강화한다. 비서실은 해체 직전인 1998년에 1990년대 초의 절반도 안 되는 100여 명 수준으로 인원이 감축됐다.

그는 기다리고 기다렸다. 유년 시절은 아버지의 부름을 기다렸다. 아버지의 부름을 받은 다음에는 ‘일’을 맡겨 주기를 기다렸다. 회장이 된 후에도 기다렸다. ‘이병철의 삼성’이 ‘이건희의 삼성‘이 되기까지 기다렸다.

물론 이 회장이 삼성의 수장이 된 후 경영 실적은 나쁘지 않다. 경영을 맡은 지 첫해인 1988년 삼성은 매출 20조1000억 원, 세후 이익 3411억 원이다. 경영 5년 차에 접어들자 삼성은 그룹 총매출 38조2100억 원, 이익 2935억 원을 기록했다. 매출이 두 배 정도 늘어나며 외형이 훨씬 커졌다.

그리고 드디어 이 회장이 꿈꾸던 그때가 됐다. 바로 1993년 ‘신경영’, 바로 본격적인 ‘이건희 경영’의 시작이다.
[이건희 일대기]말없는 소년, 한국 최대 그룹 총수가 되다
[한경비즈니스 이건희 회장 추모 특별판 발행]
온라인에서 다운로드 받으세요.(https://bit.ly/3dZdoA7)
hawlling@hankyung.com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300호(2020.10.26 ~ 2020.11.01) 기사입니다.]